소설리스트

176화 (176/260)

창고에 있던 상자들을 뒤적이다 내가 찾던 포션병들이 담긴 것을 발견했다. 포션의 색과 향을 확인하고는 그걸 들고 다시 욕실로 돌아왔다.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에디스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고 있었다.

들고 온 포션의 마개를 따서 옆에 치워두고는 보랏빛 포션을 에디스가 들어있는 욕조 안에 흩뿌렸다. 포션이 욕조의 물에 닿자 마치 물에 번지는 물감처럼 물에 퍼져나갔다.

동시에 욕실 안이 로즈마리 향기로 가득찼다.

방금 내가 사용한 입욕 포션은 향을 맡으면 정신을 안정화 시켜주고, 이 포션을 풀어놓은 물에 몸을 담그면 체력 회복 속도를 올려주는 것이었다.

예전에 수도에 머무르며 여자들을 만날 때는 몇 번인가 사용했었지만 이곳에 내려오고는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남자 혼자서 저런 것을 사용하는 것도 좀 이상하니 말이다.

다행히도 에디스는 이게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감고 다리를 쭉 뻗었다. 저대로 30분만 있으면 몸에 쌓여있던 피로는 대부분 풀릴 것이다.

"느긋하게 씻고 나오십시오."

나는 타올과 바디 워시를 욕조 바로 옆에 놓아두고 나왔다.

가게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뒤로 넘어간 의자를 일으켜 세워놓고, 에디스가 조수를 내뿜으며 축축하게 젖은 나무 바닥은 마법으로 물기를 말려냈다.

단순히 말리기만 했다면 판자가 썩을지도 모르니 그 부분에 경화 마법을 덧씌워서 강도를 올렸다. 다행히 아이린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창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에디스에게 저녁도 권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상한 소문이 퍼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방금 전에 아이린이 보였던 반응이 신경쓰여서 그만두기로 했다.

'아이린이 나를 좋아해주는건 괜찮지만, 이상할 정도로 집착이 강하단 말이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아이린은 이제 내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예전에 비해 행동이나 태도에서도 여유가 느껴졌고 나와 대화를 할 때도 굳어있지 않았다.

너무 예의를 지키던 전보다는 훨씬 또래의 아이들같은 모습을 보여줘서 좋았지만 내게서 너무 떨어지려 들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좀 더 친구들과 함께 놀러다녀도 될텐데 가게 밖으로 나가려 하질 않았다.

"...하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난번 수도에 올라갔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 그 때를 기점으로 아이린이 변했는데 그 원인을 모르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 때의 일을 생각하자 또 세이빌 녀석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마법으로 가게 안에 남아있던 정사의 흔적과 냄새를 지운 뒤에는 자리에 앉아 접시에 남아있던 쿠키를 집어먹었다.

입 안에서 바스러지는 쿠키에 들어있던 달콤한 초콜릿의 맛이 느껴졌다.

내일은 신전에 찾아가 오랜만에 마리안의 얼굴이라도 볼 생각이었다. 마리안은 어떤 과자를 좋아하려나. 지난번에 차를 마실 때 봤을 때는 단 것을 꽤나 좋아하는 것 같던데, 부디 케이크도 좋아했으면 좋겠다.

"...이것도 돌려줘야하고."

마리안을 만나기 전에 내가 입수했던 '신뢰의 목걸이'를 서랍에서 꺼냈다. 상징성을 중요히 여기는 교회 입장에서는 반드시 챙겨야하는 성물이었지만 마리안은 의외로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사실 이 목걸이는 교회가 가진 다른 성물들에 비해 아무런 효과가 없어보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마리안에게 돌려주는게 맞았다. 앞으로 마리안의 교회 내 입지를 단단하게 굳히기 위해서라도 이 목걸이를 들고 돌아가는 것이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습격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성물을 도둑맞았다는 것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게 아니니까.'

반대 파벌의 뿌리를 완전히 뽑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설전이 일어날텐데, 성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발목 잡히기 좋은 소잿거리였다.

그걸 원천봉쇄하기 위해서는 성물을 들고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조금은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비록 마리안과 함께한 시간은 반 년도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정이 꽤나 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헤어짐에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쉽기도 했다.

이것 역시 내가 변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죽든말든 신경쓰지 않았던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으니.

멍하니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상념에 잠겨있던 나는 에디스가 욕실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에 목걸이를 다시 서랍 안에 넣어놓고 일어섰다.

에디스는 수건을 몸에 두른 채 물기에 젖어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다른 수건으로 닦았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그런데 방금 전에 사용한 그 포션은 뭐에요?"

"입욕 포션이라고 욕조에 풀어놓으면 좋은 향과 함께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 용도입니다."

단순한 입욕제와 다르게 직접적으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아무래도 에디스는 입욕 포션이 썩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육체적인 피로 뿐만 아니라 정신을 안정시켜주는 효과도 있으니 에디스에게 몇 개 챙겨주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혼자 씻을 때 쓸 일도 없으니.

"돌아가실 때 몇 개 챙겨드리겠습니다. 옷부터 갈아입으시지요."

내 말에 에디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머리를 닦고 있던 수건을 펼쳐서 바구니에 던져넣었다. 내가 보는 앞에서 옷까지 갈아입는 것은 부끄러울테니 나는 자리를 비켜주기로 했다.

창고로 돌아가 방금 전 입욕 포션을 꺼냈던 상자에서 입욕 포션을 열 개 정도 꺼내 작은 상자에 담았다. 처음에는 이걸 돈 주고 구매했지만 이제는 이 포션의 제조법 역시 알고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더 만들 수 있었다.

장미향, 로즈마리향, 감귤향 등 각기 다른 입욕 포션을 색이 연한 순서대로 정리한 다음 상자의 덮개를 닫았다.

그래도 나는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에디스를 배려해주기 위해 좀 더 기다리다가 자리에 돌아갔다.

에디스는 처음 가게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기품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입욕 포션이 담긴 상자에 불면증을 치료해주는 수면제 두 병 정도를 추가로 넣어주며 에디스에게 포션이 가진 효과에 대해 설명했다.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입욕 포션과 수면제를 착각하면 꽤나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기에 한 번 더 주의를 주고 나서야 나는 에디스에게 포션들이 담긴 상자를 넘겨주었다.

꽤나 묵직했기에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주겠다고 말했지만 에디스는 괜찮다며 거절했다. 혹시 기사에게 부탁하려는건가 싶었지만 소중하게 품 안에 끌어안고 있는걸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내일 또 찾아올게요."

"내일은 제가 선약이 있어서, 모레 오시죠."

아무리 황위 계승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에디스라고 해도 황녀라는 지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틀이나 연달아서 찾아오면 분명 다른 사람들이 의심할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신전에 찾아갈 예정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약속이 황녀의 권유보다도 중요한가요?"

에디스의 도발적인 말투에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너무나도 '황족다운'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원래 황족이란 저런 태도가 정상이었다. 세상 모든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하며,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늘 자신이 으뜸이어야하는 것.

"농담이에요. 그렇게 굳을 필요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혀를 살짝 내민 에디스를 보고 나서야 나는 당황한 정신을 추스렀다.

"이번에는 제가 한 방 먹었군요."

"저만 당하면 억울하니까요. 그럼 모레 다시 찾아올게요."

그렇게 에디스는 상자를 양 손으로 들고 가게의 문에 손을 얹었다. 그것과 동시에 나는 창문에 걸어뒀던 환각을 걷어냈고 에디스가 나가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가로막고 있던 문 앞을 비켰다.

"어서가요. 이러다 저녁 만찬에 늦겠어요."

"알겠습니다. 황녀님."

에디스는 올 때도 그렇고 졸부처럼 마차를 끌고 다니지 않고 직접 걸어왔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는 경우 역시 많았다. 적어도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에디스에게는 경험이 필요했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에 대해 이해할수록 에디스는 자신이 바라는 인재를 곁에 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그 계기 정도는 내가 만들어줘야겠지만.'

에디스는 지금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가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그 계기가 될만한 사건을 계획하며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이린이 양 손 가득 찬거리가 담긴 봉투를 들고 돌아왔다.

아이린은 평소와 다르게 조금 축 쳐진 분위기였다.

나는 아까 아이린에게 엄하게 대한 것이 떠올라 가볍게 아이린에게 포옹했다.

"아까는 미안했다. 황녀님에게 있어서는 무척 중요한 이야기였거든. 이해해주겠니?"

"...네. 주인님."

아이린에게 포옹을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린은 축 쳐져 있었던게 거짓말처럼 표정이 밝아졌다.

"황녀님은 돌아가셨나요?"

"그래. 앞으로도 가끔씩 가게에 찾아오실 수도 있으니 다음부터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인사하렴."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영지 내에서도 예의 바르기로 유명한 아이린은 에디스를 보고 왜 그런 태도였던 것일까.

그 부분이 조금 신경쓰이긴 했지만 아이린은 내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저녁은 스튜를 만들어서 먹기 위해 감자를 썰려고 하는데 아이린은 내 옆에서 손을 씻으며 요리를 돕겠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또 하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이 지나갔다.

다음날. 나는 아침일찍 밀어닥친 모험가들에게 포션을 파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 가게의 단골이던 모험가들도 아이린의 급성장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드물게는 아이린의 미소를 넋 놓고 보고있는 녀석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어깨를 툭툭 치며 웃어주자 그제서야 깜짝 놀라서는 도망치듯이 가게를 나갔다.

아이린의 미모가 꽃을 피우면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그들에게는 아이린이 마탑에서 받은 비약을 먹고 성장했다고 둘러댔지만 어느 정도 연차가 있는 모험가들은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거짓말을 하지말라고 해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그 이유를 몰라서 이러고 있으니.

그렇게 모험가들이 썰물같이 빠져나간 다음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아침을 차렸다. 어제 아이린이 사온 찬거리로 만든 샐러드와 미리 사뒀던 크루거 가게의 빵이 아침 식사였다.

늘 먹던 것과 별반 차이는 없었지만, 그래도 맛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 솜씨면 좀 더 가격을 비싸게 받아도될텐데 정작 크루거 아저씨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니.

'...그러고보니 나도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가.'

내 포션의 효능이 워낙 뛰어난 편이다보니 다른 사람들은 좀 더 가격을 높여 받아도 되지 않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이미 다른 포션 가게들이 모두 망했는데, 이제와서 내가 포션 가격을 올려버리면 왠지 모험가들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 썩 내키지 않았다.

어차피 돈을 벌려고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선배가 후배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손해도 아니었다. 신참 모험가들에게 있어서는 하급 포션조차 손 떨리는 가격이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주인님."

아이린은 오늘 시청에 가서 다른 여자애들과 함께 교육을 받기로 했다. 원래는 아이린의 친구들과 함께 몇 년 뒤에나 받는 교육이었지만,급성장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생리와 임신을 비롯해서 신체의 변화에 대한 교육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아르웬에게 물어봤을 때 대략 서너 시간은 걸린다고 했으니 신전에 다녀올 시간은 넉넉했다.

아이린이 먼저 시청으로 떠나고, 나는 진열장의 포션을 잠시 정리하다가 '외출중'이라는 팻말을 창가에 걸어놓았다.

낮에는 손님이 없다시피 하지만 혹시 몰라 걸어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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