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260)

적당히 외투를 걸친 나는 곧바로 신전으로 향했다. 모험가들이 모두 영지 밖으로 나가 있어서 그런지 낮의 거리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시청을 지나치지 않고 신전에 이르는 길을 골랐다. 딱히 내가 잘못을 한 것은 아니지만, 왠지 아이린에게는 내가 다른 여자들을 만난다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당장 어제 보인 반응만 해도 그렇고...'

그렇게 조금 돌아서가긴 했지만 신전에 도착하는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신전 앞에는 경비를 서고있는 기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안면이 있는 나를 막지 않고 비켜서 길을 열어주었다.

"성녀님을 만나러 오신겁니까?"

"네. 전해드릴 것도 있고해서 오랜만에 찾아뵈러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신전 안의 정원에는 늘 평소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활기차게 공을 차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니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마리안은 어디에 있으려나. 나는 마침 앞에서 지나가던 수녀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성녀님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있을까요?"

"아아. 루디 씨셨군요. 성녀님이라면 지금 고해성사 중이실겁니다. 테라스에 가서 기다리고 계시면 제가 성녀님께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녀의 호의를 받아들인 나는 먼저 테라스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신성력을 받고 자라서 그런지 평범한 식물들보다도 훨씬 잘 성장한 덩굴이 신전 건물의 벽을 두르고 있었다.

그렇게 자리에 앉아 정원을 둘러보고 있으니 잠시 후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마리안이 나타났다.

"뭘 그렇게 급하게 오십니까.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루디 씨!"

성녀복을 입고 달려온 마리안은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마리안의 풍만한 가슴이 문질러지자 조금 흥분했지만 어제 에디스와 두 번이나 해댄 덕분인지 바로 반응이 오지는 않았다.

만약 어제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에라도 마리안을 방에 데리고가서 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이지. 보름 가까이 연락도 안 주시길래 걱정했잖아요. 중간에 만나러 갔을 때도 가게에 없으시고."

내가 수도에 올라갔었을 때 마리안이 찾아왔던 것일까.

"죄송합니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만 하는 일이 있었거든요."

비록 속사정이 있는만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마리안은 내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끌어안은 채 온기를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앞으로 며칠 있으면 떠나게 될텐데, 끝까지 루디 씨를 못 보고 가면 어떡하나 걱정했다구요. 정말이지..."

마리안의 귀여운 투덜거림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겨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난리가 날 행동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성녀님이 그렇게 기다리실까봐 이렇게 바로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영지에 머무르고 계신 동안은 계속 찾아올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루디 씨를 믿을게요."

그렇게 포옹이 끝나자 마리안은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끓여왔다. 신전에서 직접 재배한 차는 고급스런 차를 많이 접했던 에디스의 마음에 들었던만큼 깊은 풍미를 자랑했다.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드렸던 찻잎은 모두 쓰셨어요? 새로 좀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아직 절반 정도 남았거든요."

"그래도 제가 여길 떠나면 더 드릴 수 없으니 지금 충분히 받아두세요. 아무래도 평범한 사제분들이 재배한 것과 교회 본단에서 직접 키워낸 것들은 다를 수 밖에 없거든요."

마리안은 그런 말과 함께 찻잎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줬다. 이렇게 많이 받아도 되나 싶었지만 마리안은 문제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지 착해빠진 사람이라니까.'

선인(善人). 나 같은 놈과는 종자부터 다른 뼛속까지 선량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사람들에게도 동정심을 품고 있고, 그들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범인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리안은 내가 삼십 년이 넘게 살아오면서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인물 중 하나였다.

신전을 썩어빠진 사기꾼집단으로 생각했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게 해줬던 것 역시 마리안이었다.

과거 포션이 처음으로 등장했을 때 신전 측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포션 제작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던 일이 있었다.

그 이유는 당연히 신전의 사제들의 특권이었던 치유 마법의 수요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다친 모험가들을 치료해주며 '헌금'이라는 것을 뜯어냈던 교회는 포션이라는게 등장하자 자신들의 밥그릇에 위험을 느꼈고, 당시 황제에게 연금술을 탄압해줄 것을 요구했었다.

'물론 실패했지만.'

하필이면 그 때의 황제는 교회에게 우호적인 편이 아니었다. 황제는 오히려 포션의 가치를 꿰뚫어보고는 포션을 더욱 대중적으로 보급할 수 있도록 연금술사들을 지원했었다.

그 덕분에 포션은 모험가들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고, 나 역시 이렇게 포션 가게를 차려서 빌어먹을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수백 년 전의 이야기였다. 트라다 쿠스만이 연금술의 기틀을 잡기 오십 년 정도 전의 이야기일까. 말 그대로 연금술이라는게 이름만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최근에 신전에서는 별 일 없으셨습니까?"

"네. 매일같이 아이들을 돌보고 예배를 드리는게 전부에요. 아! 그러고보니 황자님과 황녀님도 한 번 찾아오셨었어요. 루디 씨도 만나 본 적 있으시죠?"

"물론입니다. 황자님께서 저한테 자신의 사람이 될 생각이 없냐고 제안을 하셨거든요."

"루디 씨라면 충분히 그런 제안을 받을만해요. 저도 앞으로 두 분과 함께 대륙의 순례를 돌아야하니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황녀님은 거의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황자님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 놀랐어요."

그 말에 나는 조금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황자라면 마리안도 자신의 패로 만들고 싶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성녀라는 존재는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까.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황자님의 말을 너무 믿지는 마십시오. 단순히 성녀님을 이용하려는 생각일지도 모르니까요."

순진한 마리안이 황자의 감언이설에 속아넘어가지는 않을까 싶었지만 마리안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후후.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황자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황자님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지질 않았거든요. 영지의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어딘가 겉도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건 분명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을 위해서 행동하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마리안이 작게 덧붙였다.

본질을 꿰뚫는 마리안의 일침에 나는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던 마리안이 이 정도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신랄하게 말씀하시네요. 그래도 황자님인데."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귀족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으니까요. 당장 바스티안 가문의 앨리스 양만 봐도 늘 영지의 주민들을 걱정하고 더 잘 사는 법을 생각한답니다. 저는 다른 귀족들도 앨리스 양처럼 진심으로 백성들을 아껴줘야한다고 생각해요."

마냥 순수하고 선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마리안에게도 이런 기준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몇 번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몸을 겹쳤는데도 나는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는게 많았다.

적어도 그녀가 영지를 떠나기 전까지는 그녀에 대해 더 많이 알아두고 싶다고 다짐했다

나는 그 뒤에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왔던 디저트를 꺼냈다.

마리안이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는지 몰라서 여러 조각을 종류별로 담아왔었는데, 마리안은 각양각색의 케이크 조각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더니 제일 먼저 녹차 케이크에 손을 뻗었다.

조심스레 포크로 케이크를 자르고는 오물거리며 맛을 음미하던 마리안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방금 전의 대화로 생각이 바뀌었다. 좀 더 마리안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방금 전에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내가 모르고 있던 마리안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알 수 있었다.

며칠 후면 떠나는 그녀를 좀 더 선명하게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다.

나는 마리안이 타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그윽한 향과 열기가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그렇게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리안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상의 이야기부터, 마리안이 신전 안에서 배운 것과 교회 내부의 조금 어두운 이야기들까지.

나도, 그녀도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마리안은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고 나 역시 마리안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마리안은 향이 강한 초콜릿보다는 담백한 녹차 케이크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도, 그녀가 버릇처럼 새끼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배배 꼰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그녀가 사실은 성녀라는 직위에 대해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저도 요즘에는 고민을 많이하고 있어요. 저는 분명 신께 선택받은 성녀지만 정작 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제가 다른 사람들에게 성녀라며 추앙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마리안은 지난번 파벌 싸움으로 목숨을 위협받으며 여러 생각을 했다고한다.

교회의 사람들은 모두 신을 믿지만 그들이 신을 믿는다는 이름 아래 행하는 행동들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는 순수한 선의로 움직인다.

그런데 마리안은 이때까지 자신이 함께했던 사람들이 적대 파벌에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자 스스로의 행동이 옳고 그른지조차 망설이게 된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마리안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었다.

그들의 파벌 논리에 묶여서 피를 본 피해자 입장에 불과했다. 정작 피해자가 괜찮지 않은데 그들은 괜찮다며 사건을 종결지으려한다.

"성녀님. 저기를 보십시오."

나는 정원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마리안은 고개를 살짝 내밀어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봤고, 마리안과 눈이 마주쳤는지 아이들 중 몇 명은 이쪽으로 손을 흔들며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저기 있는 아이들이 마음 편히 놀 수 있게 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요?"

"그야 당연하죠. 아이들은 그야말로 보물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마리안은 특히나 어린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녀는 아이들은 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보물이니 어릴때부터 사랑받을 필요가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했다.

"그렇다면 저 아이들이 마음 편히 놀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성녀님도 분명 옳을겁니다.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은 늘 자신이 옳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성녀님처럼 모두를 배려하는 사람이기에 자신이 옳은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겁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신이 옳고, 옳지 않다는 것을 고민하는 순간부터 이미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성숙해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하늘을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 뜨겁게 내리쬐던 해가 거짓말처럼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고, 가느다란 물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 역시 가느다란 빗줄기를 알아차리고는 화들짝 놀라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다른 사제나 수녀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신전 뒤편에 널어 놓았던 빨래를 걷으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비냄새를 맡으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루디 씨는... 역시 대단해요. 제가 위기에 빠져 있을 때는 늘 루디 씨가 도와주시는 것 같아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었다니 다행입니다."

마리안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조금은 다른 사람을 원망해도 될텐데 그러질 않았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기대십시오. 그게 저여도 좋고, 다른 사람이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성녀님이 옳은지 의심이 들 때는 성녀님의 곁에서 웃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거면 충분합니다."

나는 마리안을 끌어안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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