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260)

아주 잠깐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지고, 마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민을 해소해준 나는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줄기를 가늠했다.

처음에는 한 두 방울이던 빗줄기는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돌아갈 때 불편하지 않겠어요? 우산이라도 빌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이럴 것 같아서 우산을 챙겨왔거든요."

나는 품 속에 넣어온 작은 우산을 꺼냈다.

오늘 아침부터 비 냄새가 났다.

늘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날은 비가 왔으니까, 어쩐지 오늘도 비가 올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아무래도 적중한 모양이었다.

마리안은 비가 그칠 때까지 머무르는게 어떻냐고 했지만 나는 이 비가 쉽사리 그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린이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마리안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마침 시청의 교육이 슬슬 끝날 시간이기도 했고. 아마 지금쯤 다른 부모들도 갑작스런 소나기 때문에 시청에 남아있는 자식을 데리러 나왔을 것이다.

나는 비록 아이린의 친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린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다. 시청에 홀로 쓸쓸하게 남아있는 아이린은 보고싶지 않았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며 손에 쥐고 있던 우산을 폈다.

사슴의 가죽을 덧대어 만든 우산이었다. 가죽에 기름칠을 한 덕분에 물을 흡수하지 않고 흘려낼 수 있었다.

신전과 시청이 있는 거리는 번화가라 그런지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에 양 손을 머리 위에 올리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꽤나 보였다.

"젠장. 무슨 놈의 장맛비가..."

"금방 그치겠지?"

"화장 다 지워지겠네. 아아..."

각기 다른 투덜거림을 내뱉으며 그들은 나를 스쳐지나갔다. 어느새 빗물이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를 밟으니 찰박하는 소리와 함께 발목에 빗물이 튀었다.

방금 전 내가 마리안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옳고 그른지를 고민하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해당되는 말인 것일까.

몇 년 전에는 몬스터를 계속해서 죽여나가는 것만이 누나를 위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몬스터를 죽이는 것도, 죽이지 않는 것도 어느쪽이 옳은지를 모르겠다. 다만 둘 중 어느쪽을 고르더라도 죽은 사람에 대한 속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리안에게 했던 말은,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조금은 성장한걸지도.

'마리안이 떠나면 당분간은 또 쓸쓸해지겠네.'

이야기 상대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법이었다. 마리안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모성애 때문인지 나도 그녀 앞에서는 절로 무장해제가 됐다.

때문에 조금 힘든 이야기나 고민을 털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를 붙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녀니까. 제국의 시민들에게 희망을 나누어줄 의무가 있는 존재였다. 그걸 내 이기심으로 붙잡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찰박. 찰박. 고여있는 물웅덩이를 연달아 밟자 바짓자락이 완전히 축축하게 젖었다.

시청은 신전과 거리가 멀지 않았다.

몇 분 되지 않아 시청에 도착한 나는 건물 입구에 웅성거리며 모여있는 소녀들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첫 번째로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이린은 조금 뒤쪽에 벽을 기대고 서 있었는데, 내가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시청에 도착한 나는 우산을 접어 물기를 털어냈다.

소녀들을 관리하고 있는 것은 지난번에 본 적이 있는 아르웬의 동료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루디 씨. 요즘에는 아르웬 만나러 안 오세요?"

"하하. 요즘에는 조금 바쁜 일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아르웬 씨는 잘 지내고 계시죠?"

"직접 만나보세요...라고 하고 싶지만 아르웬이라면 이미 퇴근했답니다."

지난번에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아르웬의 동료들은 나와 아르웬이 이미 사귀고 있다고 확정한 모양이었다. 그 착각을 바로잡기에는 아르웬이 상처를 받을까봐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육이 끝났다면 아이린을 데려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정말이지 갑자기 비가 와서는... 곤란하다구요. 그래도 루디 씨는 정말로 아이린을 아끼시나 봐요. 시청에 직접 데리러 온 사람은 루디씨가 처음이거든요."

"우연히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루디 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건물 입구에 모여있던 소녀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당장 다른 볼 것도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수십 명이나 되는 소녀들의 시선을 받는 것은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안쪽의 벽에 멍하니 기대어있던 아이린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았다.

갑작스레 손을 잡힌 아이린은 그 손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주...삼촌?!"

무의식적으로 입에 달라붙은 주인님이라는 말이 나올 뻔 했지만 다행히 아이린은 말을 바꿨다. 다른 사람들도 듣지는 못했는지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비가 더 쏟아지기 전에 돌아가자꾸나."

어째서인지 주변의 다른 소녀들이 아이린을 부러워했다. 아이린 역시 묘한 우월감을 느꼈는지 조금은 우쭐거리며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나는 접었던 우산을 잡아당겨 다시 폈고, 아이린이 비에 젖지 않도록 우산을 아이린 쪽으로 조금 기울였다. 그 때문에 내 왼쪽 어깨가 조금 젖었지만 이 정도는 별 것 아니었다.

더욱 거칠어진 빗줄기가 우산을 두들겼다. 어깨는 차가운 빗줄기로 젖었지만 맞잡고 있는 아이린의 손은 무척이나 따스했다.

"주...주인님. 어깨가 젖으시니 조금 더 붙는게 어떨까요?"

아이린은 이미 비에 흠뻑 젖은 내 어깨를 가리키며 내게 찰싹 달라붙었다. 멀리서보면 영락없이 연인으로 보일 정도로 팔짱을 끼고 나서야 내 어깨는 비를 피할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이렇게 팔짱을 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아이린의 몸이 급성장한 덕분에 좋은 점도 있었다.

"아이린. 혹시 너는 내게 팔린걸 후회한 적이 있니?"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이린을 데려갔다면, 그게 아니라 아예 팔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혹시 아이린의 더 나은 미래를 빼앗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노예상에게서 소녀를 구입하는 목적은 대개 두 가지였다. 성욕 해소와 비틀린 성욕 해소.

아직 농익지 않은 몸에 욕정한 섹스는 기본 옵션에 구타와 고문은 서비스였다. 그게 현 시점에서 노예들의 위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지극히 신사적인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가 와서 감성적이 된 것인지, 아니면 방금 전 마리안과 나눈 대화 때문인지 평소 같았으면 절대 묻지 않았을 것을 물어버렸다.

아이린도 대답하기 곤란할텐데 역시 그냥 없던 일로...

"후회한 적 없어요."

"...그렇니."

아이린은 무척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만 듣고도 그녀가 진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주인님을 만나기 전에는 늘 후회만 했었어요. 왜냐하면 제 인생은 과거보다는 늘 현재가 더 비참했으니까. 빈민가에서 쓰레기를 뒤지고 다니고, 나중에는 노예 상인들에게 잡히고, 결국에는 헐벗은 채 노예로 팔렸으니까요."

후회는 과거보다 현실이 더욱 비참할 때 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인생은 후회밖에 없었다고 아이린은 작게 읊조렸다.

"하지만 주인님을 만나고나서 저는 달라졌어요. 후회보다는 희망을 가지게 됐고, 가끔씩 주인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하지만 절대 지금보다 낫지는 않았을거라고 확신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이거야 원. 대체 누가 어른인지.

"무엇보다도 주인님은 이렇게 절 데리러도 와주시는 상냥한 분이신걸요."

그렇게 속삭이듯 중얼거린 아이린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거리를 걷는 내내 우산을 두드려대는 빗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로부터 이틀 뒤, 나는 인적이 드문 공원의 숲 속에 있었다.

"...하읏!"

물론 나 혼자 있는 것은 아니었고, 에디스가 함께였다. 에디스는 한 손으로 나무를 짚은 채 엉덩이를 이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에 입고 있는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평범한 셔츠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리고는 수줍게 음부를 가리고 있는 팬티를 종아리까지 끌어내렸다.

그리고 나는 평소보다 조금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며 에디스의 깊숙히까지 물건을 박아대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에서 그것도 언제 들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하는 섹스는 약간의 긴장과 자극을 주는 법이었다.

"정말이지... 다른 사람들한테 보이면 어쩌려고...하응!"

내가 거칠게 한 번 물건을 박아넣자 투덜거리던 에디스가 남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신음을 억눌렀다.

하지만 이미 흘러나온 야릇한 신음을 감출 수는 없었다. 지난번에 할 때는 잘 몰랐는데 에디스는 섹스를 할때 야릇한 신음을 흘리는 편이었다.

단순한 신음이 아니라 정말로 느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색기 어린 신음이었다.

덕분에 무의식적으로 피스톤질을 하며 살짝 흥이 식을 무렵 들려오는 신음은 내 물건이 더욱 단단해지도록 만들었다.

아무튼 에디스의 말대로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바스티안 영지의 공원이었다.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주말이 아니면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는 공원의 공터에서 놀기 위해 찾아오는 아이들이었고, 두 번째는 나와 에디스처럼 자그마한 일탈을 즐기기 위해 찾아오는 연인들이었다.

아마 그들 중 절반 이상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불륜 관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지난번에 앨리스랑 할 때도 그랬지만, 밖에서 하는 섹스는 역시 각별하단 말이지.'

사방이 노출된 환경인만큼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긴장감과 언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짜릿한 긴장감이 주된 이유였다.

심지어 지금 나는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에디스에게 최대한 평범한 복장으로 찾아오라고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오면 변명하기가 힘들지만 이런 치마에 셔츠 차림이라면 에디스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크게 눈에 띄지 않고, 설령 들킨다 하더라도 변명이 가능하니까.

"아앙...흐읏...하아앙!!"

슬슬 절정에 이르려는 것인지 에디스가 다리를 부들대더니 곧이어 질척한 조수를 내뿜었다. 마치 소변을 보는 것처럼 잔뜩 조수를 뿜어낸 에디스는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것처럼 다리를 덜덜 떨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허벅지를 꽉 잡고 피스톤질 속도를 올렸다.

야외 섹스는 각별한 재미가 있지만 시간을 오래 끌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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