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0화 (180/260)

조금 안색이 창백하기는 했지만 그것 빼고는 문제 없었다. 황궁에서 지내며 내가 깨달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나를 결정하는 전부라는 점이었다.

조금이라도 칠칠맞은 모습을 보이거나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면 그것은 그대로 나와 어머니의 평판과 직결됐다.

물론 이제는 그들의 비난에 별로 신경쓰지는 않지만 처음 아버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긴장됐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늘 왕관을 쓰고 위엄있게 신하들을 호령하는 모습이 아닌, 꽤나 소탈한 복장이었다.

"...문을 닫거라."

들려오는 목소리에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반쯤 열려있던 문을 닫았다.

최대한 조신하게 아버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지만, 눈 앞의 아버지는 심기불편한 태도로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순례에 참가할 준비는 다 해놓았느냐?"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를 들은 나는 조금이나마 기대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차피 저 양반은 나한테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지.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어머니나 내 생활에 대해서 물어보지는 않을까 기대했었다.

만약에 아버지가 다른 황족들의 눈치가 보여서 챙겨주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와 내가 겪는 고충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대체 뭘 기대했던건지.'

"...네."

어차피 나는 챙길 짐도 몇 개 없었다.

요즘 폐인처럼 방에서 홀로 지내시는 어머니가 걱정됐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순례를 돌 수도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떠나기 전까지는 최대한 어머니 곁에서 머무르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래. 이번에 네가 만나게 될 성녀는 한창 대륙이 주목하고 있는 사람이니 조심해서 대하거라. 가뜩이나 요즘 교회의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그들과 분쟁을 일으켰다간 큰일이니."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를 보니 슬슬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차올랐다.

자식이 오랫동안 여행을 갔다오는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조심하라는 말은 못할망정 정치적으로 귀찮게 하지말라는 소리를 하다니.

정말로 아버지에게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결국 참다 못한 나는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안 물어보세요?"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그렇게 좋아하고, 당신만을 믿었던 사람인데 그렇게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야만 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자제력이었다.

"......"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사실대로 말해줬으면 좋을텐데. 그랬다면 마음놓고 아버지를 원망할 수 있었을테니까.

그런 어정쩡한 태도에 결국 참지 못한 나는 이때까지 가슴 속에 품고있던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어머니는 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하셨어요. 대단하고, 멋지고, 상냥한 사람이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죠. 어릴때부터 계속해서 그 소리를 들었더니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에요."

"......"

"하지만 이제보니 어머니의 눈은 완전히 틀린 것 같네요. 적어도 저한테 있어서 아버지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어머니를 저렇게 둘거라면 대체 왜 결혼한거에요?"

어머니는 왕비와 다른 첩들에게 구박을 받을 때에도 늘 괜찮다고 했다.

아버지의 곁에는 대단한 사람들 뿐이니, 평범한 사람인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며 아버지를 옹호하셨다.

그 때 어머니가 짓고 있었던 슬픈 미소를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저렇게 만들었어요. 늘 밝고 웃음 많으시던 어머니가 당신 때문에 저렇게 폐인이 됐다고요!"

그렇게 가슴에 억눌러뒀던 분노를 모두 표출한 나는 그제서야 내가 엄청난 무례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상황을 파악한 나는 주춤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혹시나 아버지가 화를 내며 기사들을 불러 나를 끌어내면 어쩌나 싶었지만 아버지는 두 눈을 감은 채 침묵했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하던 도중, 아버지는 나직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안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하니 그 아버지가 사과를 할 줄은 몰랐기에 나도 조금은 얼떨떨한 상황이었다. 철혈군주라 불리우며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버지였다.

그런 사람이 미안하다는 말을 내뱉은 것은 아버지에게 화를 냈던 나도 의외였다.

'...물론 그걸로 용서가 된다는건 아니지만.'

고작해야 사과 한 마디로 이때까지의 일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응접실에서 나온 나는 오랜만에 어머니의 방을 찾아갔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제대로 듣지 않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만났던 이야기를 하니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에디. 정말로 그를 만났니?"

어릴때부터 어머니는 나를 애칭인 '에디'라고 불렀다. 조금은 남자아이 같지만, 그래도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응. 엄마."

최근에는 잠도 제대로 못 자는지 눈가에 다크서클이 잔뜩 내려와 있는 어머니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정신이 또렷했다.

"이상한 소리는 안 했지? 응?"

"당연하지. 엄마도 내가 소심한거 알잖아."

물론 속으로는 내가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당장 황궁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면전에다 욕을 한 셈이었으니까.

다행히도 어머니는 내 거짓말을 눈치채지 못하셨다.

"다행이야... 에디 너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그에게 걱정을 끼치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렴. 가뜩이나 바쁜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구나."

"엄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대체 아버지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은거야?"

이런 상황에서까지 아버지 편을 드는 어머니를 보니 조금은 심술이 나기도 했다.

"그의 모든 것이 좋지만 굳이 따지자면 상냥한 점이겠지."

어머니의 말에 나는 속으로 투덜댔다. 아내와 자식에게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는 아버지의 대체 어떤 부분이 상냥하단 말인가.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손으로 부드럽게 빗어주었다.

지금만큼은 폐인같이 지내는 어머니가 아닌, 예전의 잘 웃는 그때의 어머니 같았다.

"에디스.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그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단다. 네가 조금 더 크게되면 알게될거야."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단순히 아버지를 옹호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예전처럼 곧잘 웃게 되셨다. 홀로 황궁에 남게될 어머니가 걱정됐었는데, 아무래도 한 시름 덜어놓았다.

"갔다올게요. 엄마."

"에디. 몸 조심해서 다녀오렴."

어머니는 나를 강하게 한 번 끌어안더니 등을 손으로 두드렸다.

일 년이 넘게 어머니를 못 본다고 생각하자 나도 마음이 아팠지만 이 지긋지긋한 황궁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조금 기쁘기도 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황궁으로 나가본 적이 없었기에 바깥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했다. 바깥의 음식을 맛보거나 책을 읽어본 적은 여러번 있었지만 직접 나가본 적은 없었다.

황궁의 입구 앞에는 나와 지크를 태울 마차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도 황족이라고 인정은 하는 것인지 황실의 금빛 문양이 박힌 사두마차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이번 순례를 돕기 위해 내게 배정된 기사들이 챙겨놓은 짐을 들고 뒤를 따랐다. 짐이라고 해봤자 속옷과 옷이 담긴 상자 두 개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마차 뒤에 내 짐을 싣고, 마차의 칸막이를 걷어내자 이미 자리에 타 있는 지크가 보였다.

"오랜만이야. 에디스 누나."

"...그래. 오랜만이네."

그나마 지크는 나와 비슷한 처지이기 때문인지 다른 황족들처럼 나를 업신여기지는 않았다. 물론 영악한 아이니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 나를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혹시라도 아버지가 마중을 나오진 않았을까 싶었지만 역시나 아버지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윽고 마차는 출발했고, 나는 열어뒀던 칸막이를 닫았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황궁을 빠져나갔다.

x x x

부스스한 머리를 한 손으로 걷어 넘기며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창 너머로 보이는 태양을 보니 이미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왜 그 때의 기억이 꿈에 나온거지."

그렇게 기억에 남을만한 일도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자면서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메이드 두 명이 화들짝 놀랬다.

"화, 황녀님!"

"...슬슬 씻고 싶은데, 도와주겠어?"

"물론입니다!"

두 사람 모두 바스티안 백작가의 메이드들이었지만 지금은 나를 전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내 방 안으로 들어와 욕실의 마석을 작동시켰고, 이윽고 욕조에는 뜨거운 물이 가득찼다.

입고있던 잠옷을 벗자 다른 한 명이 내 옷을 챙겼다. 아마 세탁을 하기 위해서겠지.

아무렇지 않게 알몸이 된 나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욕조에 몸을 담궜다. 어제 몸을 혹사시켜서 그런지 더욱 개운한 기분이었다.

온 몸의 뭉친 근육이 풀어지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앙."

남자들이 듣기에는 조금 야릇한 신음이었을지 몰라도, 메이드들 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상관없었다. 그녀들은 매일 하던 것처럼 세면도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었을 때는 메이드들은 필요없다며 혼자서 씻었다. 하지만 지난번 사건 이후로는 메이드들에게 씻겨주는 것 뿐만 아니라 화장까지 부탁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그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평소엔 눈치 빠른 주제에 이상한 부분에서는 둔감한 그였다. 그를 위해서 생전 안 하던 화장과 향수까지 뿌렸는데도 그는 칭찬 한 마디 안 해줬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달라진 점을 모르겠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황녀로서의 체면이 서질 않을 것 같아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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