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화 (181/260)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는 이런 상황을 '좋아하면 지는 거다'라고 했었는데, 그 말을 절실하게 통감하고 있었다.

그와 좀 더 함께 있고 싶지만 겉으로 티를 내면 왠지 나만 그러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

결국 나도 모르게 튕기는 말을 내뱉을 때가 많았다. 차라리 솔직하게 굴었다면 지금보다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르는데, 생리적으로 몸이 거부했다.

그에 대한 생각을 하니 또 가슴 한 켠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분명 지난번에 그에게 고백을 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선언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뒤로는 관계에 전전이 없었다. 섹스를 한 적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사귄다거나, 미래를 약속한 사이도 아니었다.

'물론 신분의 차이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조금 달콤하게 사랑한다고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가. 그를 만나기 전에는 늘 제대로 된 답을 듣고 말겠다고 결심하지만, 어느새 그의 페이스에 말려서는 자연스럽게 섹스로 넘어가고,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물론 기분은 무척 좋았지만 이대로 계속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보름도 남지 않았으니.

"...읏."

마치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아랫배가 시큰거렸다. 하필이면 오늘은 그 날이었다. 생리통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지내기는 힘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루디'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이런 몸으로 찾아가봤자 오히려 걱정 시킬 뿐이었기에 얌전히 쉬기로 했다.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짐이 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아. 정말이지..."

나도 루디와 정말로 사귀는 것은 무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당장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으니까.

그가 나보다 몇 살이나 많은지, 예전에 무슨 활동을 했는지, 그에게 다른 여자들이 또 누가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를 사랑하는 내가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중증이었다. 설령 그에게 다른 여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첫 번째라면 나머지는 용납해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내 생각을 알면 분명 경악하겠지.

어떤식으로든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고는 해도 황족인 것을 포기한건 아니었다.

물론 루디와 함께할 수 있다면 황족이란 것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지만, 순례를 돌기로 했던 황녀가 그랬다간 제국이 통째로 뒤집어지겠지.

그것 역시 루디가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용하게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던 루디에게 있어서 나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루디에게 돌아오는 것은 적어도 순례를 완전히 끝내고나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완전히 잊어먹었을 때 돌아오도록하자.

루디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아랫배에 시큰한 아픔은 사라지고 조금씩 열기가 돌기 시작했다.

입고있던 스커트를 걷어올리자 이미 반쯤 젖어있는 음부가 그대로 드러났다.

방에 혼자 있을 때는 속옷을 착용하지 않았다. 나는 예전부터 방에 홀로 있는 시간이 길었기에 할 일이 없는 그 시간 동안 꽤나 자주 자위를 해댔다.

처음에는 황궁 밖에서 들여온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며 자위를 했고, 그 다음에는 황궁 정원에서 몰래 섹스를 하고 있는 커플을 보고 그 광경을 떠올리며 했다.

그리고 지금은 당연하게도 루디와 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위를 했다.

하지만 이미 섹스의 쾌감을 알아버린 내 몸은 자위만으로는 부족했다.

루디는 나도 모르는 내 몸의 약점을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능숙하게 내 몸을 희롱했었다.

질 입구 부분에 물건을 넣었다빼며 자극한다거나, 젖가슴을 빨면서 유두를 입 안에 넣고 굴린다거나, 그... 바깥에서 언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지 모르는 상황에서 거칠게 한다거나 했다.

그와 하는 섹스는 이때까지 내가 했던 자위는 장난이라고 말하듯이 압도적인 쾌감을 선사해주었다.

자위만 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연속적인 절정과 머릿속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기분좋은 애무는 어느새 내 몸을 완전히 길들여놓았다.

때문에 앞으로 그가 없는 일 년을 버티려면 섹스 빈도를 줄여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매일같이 그를 찾아가려 했다.

"...휴우."

결국 그 날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스스로를 달래는 것으로 불이 붙기 시작한 성욕을 해소했다.

그 다음날. 성녀와 약속을 잡았다는 지크와 함께 신전에 가기로 했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가자 먼저 내려와 있던 바스티안 가주와 앨리스 영애가 보였다.

"오. 황녀님. 아침 식사를 하러 오셨습니까?"

"...네. 오늘은 지크와 함께 신전에 가기로 했거든요."

"그러시군요. 황녀님 몫의 식사를 금방 준비시킬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바스티안 가주는 귀족들 중에서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황실 기사단 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황실의 파벌 싸움에는 관심이 없는지 오로지 제국을 위한 충성만을 맹세했다.

덕분에 나는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마음놓고 푹 쉴 수 있었다.

바스티안 영지까지 내려오는 길에 들렀던 다른 영지들은 하나같이 다른 황자들의 파벌이라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가주의 옆에서 아무말 없이 식사를 하고 있던 앨리스 영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너무 빤히 쳐다본걸까. 내가 손사레를 치자 그제서야 그녀는 다시 식사를 재개했다.

지크와 함께 영지를 돌아다닐 때, 마을 사람들은 앨리스 영애에 대해 칭찬을 잔뜩 늘어놓았다.

가주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도 내 또래의 소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하게 일처리를 했다고한다.

가문을 이을 아들이 없는 바스티안 가문이었지만 그녀라면 가주의 빈자리를 충분히 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여자는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없으니 실제로는 불가능한 소리였지만, 그만큼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능력뿐만 아니라 외모 역시 아름다웠다. 나와는 대비되는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피부, 남자들이 좋아할법한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충분히 나와있는 몸매까지.

비교를 할수록 스스로가 초라해졌다. 내가 그녀보다 나은 것은 황제의 자식이라는 신분 밖에 없었다.

과연 나는 그녀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문득 지난번에 루디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직 귀족이나 기사들만이 내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

한 명의 사람도 허투루 대하지 말라는 그의 말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어머니 밖에 없었던 내게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그의 말대로 이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멀리했던 것은 나였다.

이제와서 '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지크가 내려온 것은 내가 아침식사를 마칠 무렵이었다. 늘 여유를 가지고 있던 지크는 어울리지 않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듯이 지크는 다리를 떨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지크 너..."

지크의 양 옆에 있던 메이드들이 황급히 지크를 부축했지만 여전히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지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은 괜찮다고 했지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핼쑥한 그의 얼굴을 보면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결국 나는 메이드들에게 지크를 부탁하고 홀로 성녀를 찾아가기로 했다.

아버지가 했던 말 때문은 아니지만, 우리 쪽에서 약속을 잡아놓고 아무도 가지 않는 것은 황족 이전에 사람으로서 큰 결례였으니까.

"황자님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제가 직접 황자님의 곁을 지키고 있을테니까요."

자신만만하게 선언하는 바스티안 가주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런 근육질의 노인이 간병을 한다니. 지크가 일어났을 때 깜짝놀라 기절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럼 지크를 부탁할게요."

가주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밖으로 나오자 이미 대기하고 있던 기사 두 명이 내 뒤를 따라걸었다.

신전은 저택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굳이 마차를 타고갈 필요는 없었다.

기사들을 대동하고 걷는 나를 본 주민들이 힐끔거렸지만 이 영지에 내려온지도 꽤 됐기에 금세 자신이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성녀와의 약속시간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바람이나 쐴 겸 느긋하게 거리를 걷던 도중,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은 비명이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그 증거로 다른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곳은 번화가 사이의 뒷골목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나 있는 음습한 골목 안에서는 남자 세 명이서 어린아이를 구타하고 있었다.

얻어맞고 있는 소년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몸을 웅크려 최대한 충격을 줄이려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이미 온 몸에 잔뜩 멍이 들어있었다. 아직 나를 보지 못한 그들은 여전히 소년을 두드려패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분명 소년은 불구가 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일에 참견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야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저들이 어째서 소년을 때리는 것인지는 내 알바가 아니니 전혀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루디가 했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 귀족이나 기사들만이 내 힘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모든 백성을 소중히 여기라는 그의 충고가 말이다.

"...거기 멈추세요!"

내 뒤에는 황실기사 두 명이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망설여졌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험상궂은 남자 세 명이 내게 달려들면 어떡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쉽사리 나오지 않는 말을 눈 딱 감고 소리치자 그제서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남자들은 인상을 찡그러뜨렸다.

"...뭐야? 저 여자는."

"너 몰랐냐? 이번에 영지에 내려왔다던 황녀잖아!"

"젠장! 그냥 튀어! 괜히 눈에 찍혔다가 귀찮아지지 않게!"

어리둥절해하는 한 남자의 목덜미를 낚아챈 두 명이 그대로 소년을 두고 줄행랑쳤다.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니 조금씩 꿈틀거렸다.

아직 살아있는 소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들에게 부탁해 소년을 등에 업게했다. 기사는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소년을 등에 업었고, 나는 바람을 쐬는 것을 멈추고 그대로 신전에 찾아갔다.

소년은 기절했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희미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신전 앞을 지키던 성기사들은 나를 보고 정중히 인사했지만 기사가 등에 업고 있는 피투성이의 소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으로 들어서자 정원에 있던 수녀가 나를 보고는 당장 성녀님을 모셔오겠다며 건물 안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지난번에도 한 번 만났었던 성녀가 나왔다.

아까 봤던 앨리스 영애와 마찬가지로 여성스러운 몸을 가진 그녀는 성녀답게 자애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어머. 그 아이는..."

나는 기사에게 손짓해 등에 업혀있던 아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그리고는 성녀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 설명을 들은 성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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