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2화 (182/260)

"그랬군요. 황녀님은 제 생각보다 훨씬 상냥한 분이셨군요. 다른 분이었다면 못 본 척했을텐데."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요."

확실한 것은 아까 그 상황에서 루디가 했던 말이 아니었다면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내가 계속해서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무시한다면, 결국 내 곁에는 아무도 오려하지 않을테니까.

성녀. '마리안'은 손을 들어 가벼운 주문을 중얼거렸고 그녀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신성력은 피투성이던 소년의 상처를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이때까지 사제들의 치유 마법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지만 저 정도의 상처를 단숨에 없애버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저 정도 능력은 있어야 성녀로 인정받을 수 있는걸까.

"이걸로 외상은 모두 치료했답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부서진 뼈도 다 아물어 있을거에요."

"휴우... 정말 감사드려요."

"후훗. 황녀님도 특이하시네요. 황녀님은 오히려 소년을 구하신건데 왜 저한테 감사를 하세요?"

그제서야 나는 내가 소년의 보호자라도 된 것마냥 감사 인사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마리안은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차를 권했다.

지난번에 지크와 함께 찾아왔을 때는 간단하게 이야기만 나누다 돌아갔는데, 마리안은 지난번에 비해 조금 기뻐 보였다.

기사들을 물리고 마리안과 함께 테라스에 가서 앉자 마리안은 손수 차를 끓여주었다. 그런데 그 차의 향이 전에 마셨던 것과 상당히 흡사했다.

혹시 향만 비슷한 것은 아닐까 싶어 입으로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셔봤지만 내 예상대로 루디가 끓여준 차와 완전히 똑같았다.

"혹시 차가 입에 안 맞으세요?"

"아니에요. 그냥 차가 무척 향이 좋아서요."

"후후. 그럼 다행이네요. 이 차는 신전 본단에서 직접 키운 찻잎으로 끓인 것이랍니다."

내게 차를 끓여주던 루디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럼 루디는 마리안에게 찻잎을 받은 것일까?

적어도 두 사람이 귀한 찻잎을 선물할 정도로 친한 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리안은 성녀인만큼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의외였답니다. 황녀님은 사실 백성들에게는 무심한 줄 알았는데, 제가 잘못 봤었나 봐요."

정곡을 찔린 나는 대답 대신 차를 홀짝였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정말 좋은 차였다.

마리안과 루디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점이 남아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캐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황자님은 안 오셨네요?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었는데 말이죠."

"지크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저택에서 쉬고 있을거에요. 조금 안색이 창백했는데... 그래도 큰 문제는 없을거에요."

그렇게 얼굴이 창백한 주제에 아무런 말도 안 하는걸 보면 남에게 말할 수 있는 부류의 일은 아닐 것이다.

당장 어제 저녁까지는 멀쩡했으니 어젯밤에 무슨일이 있었다는건데 지크는 어제 낮부터 저택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영지에서 바스티안 저택에 침입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가게에 찾아가면 슬쩍 물어봐야지.'

"그런가요? 그럼 저희 둘이서라도 여자들끼리의 이야기를 나누도록하죠. 사실 저는 제 또래의 여자를 만날 일이 거의 없어서 조금 적적했거든요. 황녀님도 괜찮으시죠?"

"무, 물론이에요."

친구라니. 지난번에 만난 안젤리카와 제시카를 제외하면 친구가 없었던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마리안이 내 연적이라는 가능성은 지울 수 없었지만, 교회의 교리대로라면 성녀는 남자와의 관계가 금지되어 있으니 루디와 끝까지 해버린 내 쪽이 좀 더 유리하다는 확신이 있었다.

분명 루디도 자기 입으로 나와의 속궁합이 최고라고 말했었다.

어쩐지 다른 여자들을 많이 만나본 것 같은 그런 어조는은 조금 싫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네가 최고라는 말은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감미로웠다.

그리고 나는 마리안과 함께 오직 여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꽃피웠다.

마리안도 나도 어릴때부터 엄격한 관리 속에서 자랐던만큼 이야깃거리는 부족하지 않았다.

나는 마리안이 불과 몇 달 전에 교회 내의 파벌 싸움 때문에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 공감했다.

당장 나와 지크만 봐도 눈엣가시 같다는 이유로 황궁에서 괴롭힘을 받기도 했고, 심할 때는 암살 미수까지 있었으니까.

물론 마리안이 들려준 이야기 중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무척 신경이 쓰였다.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리안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내 경계신호가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루디의 가게에 달려가 대체 여자를 얼마나 거느려야 속이 시원하겠냐고 따지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마리안과 나를 비교해봤을 때 성모처럼 자애롭고 그에 어울리는 몸을 가진 마리안.

제대로 좋아한다고 표현하지도 못하고 틱틱대는 주제에 몸매도 그렇게 좋지 않은 나.

내가 루디라고 해도 망설임 없이 마리안을 고를 것이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다.

마침 시기도 딱 맞으니 나는 머릿속으로 루디를 사로잡아놓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뒷골목으로 향하는 에디스를 보며 나는 계획이 성공한 것을 직감했다. 사실 반쯤은 도박이었다. 만약 에디스가 그들을 못본 척 지나간다면 계획을 처음부터 새로 세워야했을 터였다.

하지만 에디스는 내 예상대로 도적 길드의 녀석들을 쫓아내고 아이를 구해냈다. 물론 아이를 때리고 있던 도적 길드원도, 얻어맞고 있던 아이도 내가 지부장에게 부탁해서 준비한 인물들이었지만 에디스가 그걸 알 일은 없을 것이다.

에디스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였지만 그들의 연기력은 꽤나 괜찮았다. 특히 소년의 온 몸에 남아있던 시퍼런 멍과 핏자국들은 더욱 상황을 실감나게 보이게 했다.

에디스는 소년을 구해내서 신전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가게로 돌아왔다. 적어도 에디스가 전과는 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부디 에디스가 앞으로도 저런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랬다. 에디스를 보면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까웠으니까.

홀로 지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에디스는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줄 동료나 부하 한 명 없는 것은 좋다고 보기 힘들었다.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의 의미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나 역시 처음에는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있던 그들 덕분에 나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었다. 부디 에디스도 그런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이걸로 일단락된건가.'

에디스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덜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마리안에게 신뢰의 목걸이를 전달하는 것 뿐이었다. 에디스의 문제에 비하면 이쪽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마리안이 떠나기 전날에 신뢰의 목걸이를 돌려주기만 하면 됐으니.

마리안과 에디스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린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지난번에 내가 아이린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했던 이후로 아이린은 정신적으로도 조금 더 성숙해졌다.

지난번처럼 내가 다른 여자들과 이야기할 때 노골적으로 노려보지도 않고, 슬쩍 자리를 비켜준다거나 옆에 앉아 얌전히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있을때만 그런 것이고, 나와 단 둘이 있을때는 평소처럼 애교나 어리광도 자주부렸다. 오히려 둘이서만 있을 때의 스킨쉽은 더욱 심해졌다.

몸에 수건만 두른 채 서슴없이 다가오거나, 어느새 내 뒤에 와서는 백허그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거렸다.

게다가 더욱 무서운 점은 아이린의 성장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수도에 갔을 때 한 번 급성장을 한 아이린이었지만 돌아온 후로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비록 그 때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아이린은 이미 또래 여자애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는 내 목덜미까지 닿을 정도로 커진 키와 셔츠 너머로도 확연히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까지.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지난번에 내 꿈에 나왔던 서큐버스처럼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목소리 역시 조금 어린아이 티가 나던 것이 사라지고 전보다 살짝 높은 톤의 미성으로 바뀌었다.

누가 서큐버스 아니랄까봐 색기가 잔뜩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는데, 아이린이 바뀐 목소리를 들은 다른 손님들은 저마다 움찔움찔거리며 얼굴을 붉히곤 했다.

물론 아이린이 이렇게 변한 것은 영지에 잔뜩 소문이 퍼져서 포션을 사러 오지도 않던 일부 모험가들이나 한창때의 남자애들도 아이린을 보기 위해 가게를 찾을 정도였다.

물론 우리 가게의 단골들이 그런 녀석들을 어느 정도 정리해준 덕분에 내가 손 쓸 필요는 없었지만 조금 기분이 더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놈들이 아이린을 기분 나쁜 시선으로 훑어볼 때마다 불쑥불쑥 살의가 치밀 정도였으니까.

아이린이 처음 가게에 왔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던 놈들이 이제와서 아이린에게 치근덕거리려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났다. 예전에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아이린에 대한 소유욕이 생겼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님과 이야기 중이던 아이린이 고개를 돌렸다. 모험가라고 보기에는 멀쑥하고, 포션도 하급 포션 한 병 밖에 안 사는걸 보니 단순히 아이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온 놈이었다.

아이린을 바라보며 헤벌레 웃고 있던 놈은 내 일그러진 얼굴을 봤는지 그제서야 흠칫했다.

나는 그의 곁을 지나쳐 아이린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아이린은 내 옆에 찰싹 붙어서는 내가 가게를 비운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즐겁게 떠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고작 이런 걸로 우월감을 느끼는 나도, 허탈감에 터덜터덜 가게를 나서는 저 놈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오늘도 수고했다. 아이린."

약간은 복잡한 마음으로 내게 안긴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데 수조 속에서 배를 뒤집은 채 뒹굴거리던 워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어쩌면 제일 속 편한건 너일지도 모르겠다.

x x x

그리고 다음날 점심. 나를 찾아온 의외의 조합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에디스와 마리안.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 두 명이 이런 초라한 가게에 함께 찾아온 것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일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지.

하필이면 아이린도 집 안에 있을때라 나는 다급하게 아이린에게 손짓해서 방문을 닫도록 했다. 대체 어제 무슨일이 있었던거야?

혼란스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황급히 마법으로 아이린에게서 흘러나오는 마족의 기운을 차단했다. 급하게 하느라 엉성했지만 어떻게든 아이린의 방을 중심으로 마력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마법진까지 설치했다.

아슬아슬하게 마법진을 완성하는 순간, 에디스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보다 조금 가벼운 분위기의 핑크빛 반팔 원피스였다.

늘 차갑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는 에디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에디스의 뒤를 따라온 마리안 역시 늘 입고있던 성녀복이 아니라 하얀 셔츠에 연한 하늘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처음 입는 사복이 어색한지 자꾸만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지만 꽤나 즐거워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설마 두 분이 함께 오실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에디스나 마리안 둘 중 한 명이라도 나와의 관계를 말한 것은 아니겠지? 그랬다간 당장에라도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두 여자가 합심해서 내게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았고.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에디스와 마리안은 무척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도 원래는 올 생각이 없었는데 마리안이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해서요."

그러고보니 마리안이 내 가게에 찾아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마족인 아이린의 존재 때문에 이때까지는 늘 내가 신전에 찾아가곤 했다.

물론 이제와서는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마리안은 성녀인만큼 마족을 가만히 두고볼 수 만은 없는 입장이니까.

에디스의 고자질에 마리안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며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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