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60)

"...읏. 맞아요. 사실 루디 씨가 저를 찾아온 적은 많아도... 제가 루디 가게에 와본 적은 없으니까."

너무 숨긴 것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마리안은 천천히 내 가게 안을 훑어보고 있었고, 에디스는 가게 안쪽의 탁자에 앉았다.

"차라도 한 잔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내 말에 마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에디스의 옆에 가서 앉아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로 봐도 무방한데 저렇게 핀트가 잘 맞는 것은 의외였다.

부엌에 가서 주전자에 물을 받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마법진 덕분에 아이린의 존재를 들키지는 않았지만 아슬아슬한 상황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아이린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다가 실수로라도 두 사람과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들키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최대한 그런 쪽으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도록 이끌어나가야겠지. 찻잎을 우려내며 두 사람을 곁눈질했다.

마리안의 매끈한 다리와 잡티 하나 없이 예쁜 종아리. 평소에는 늘 몸 전체를 가리고 있는 성녀복을 입고 있었기에 이렇게 직접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섹스를 할 때도 내가 밤에 찾아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느긋하게 몸을 감상할 시간도 없었고. 뿐만 아니라 성녀복으로 감추고 있던 몸의 윤곽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마리안의 잘 빠진 몸매가 더욱 부각됐다.

적당히 살집이 붙어있어 만지는 맛이 있는 풍만한 엉덩이, 그리고 고작 셔츠 한 장만 입어서 잘 드러나지 않던 가슴까지. 지금이 점심 때라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이 다행이었지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난리가 날 광경이었다.

물론 에디스 역시 만만찮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우중충한 분위기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고귀하고 품격있는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어쩐지 조금 풋풋한 소녀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에디스였다.

허벅지가 완전히 드러난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 게다가 평소보다 옅게 화장을 했는지 에디스 자신의 아름다움이 잘 드러났다.

평소에는 너무 힘이 들어간 화장과 향수 때문에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의 에디스는 오히려 풋풋한 동네 처녀같은 느낌이라 더욱 강하게 끌렸다.

그렇게 멍하니 두 사람의 미모를 감상하던 나는 찻잎을 우려낸 주전자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열기를 뿜어내는 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불을 끄고 주전자의 수증기가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준비해둔 찻잔에 차를 조금씩 부었다.

시간을 제대로 재지 못한 탓에 평소보다 향이 덜했지만 그래도 못 마실 정도는 아니였다.

차를 다시 끓일까 고민했지만 두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아쉬운대로 다과와 함께 차를 쟁반에 담아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를 끓이다가 잠시 상념에 빠지는 바람에."

지난번에 알아뒀던대로 에디스에게는 초콜릿 케이크를, 마리안에게는 녹차 케이크를 접시에 담아주었다. 예상대로 반색한 두 사람은 너그럽게 내 실수를 용서해주었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저도 차는 많이 마셨으니 괜찮아요. 루디 씨."

여기서 두 사람의 성격이 드러났다. 내가 미리 사과하자 너그럽게 받아준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에디스와 혹시라도 내가 상처받지 않도록 옹호해주는 마리안.

평소에는 마리안 같은 성격이 좋지만 에디스 같은 성격도 잠자리에서는 정복하는 맛이 있었다.

아니, 자꾸 이런 쪽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데. 이러다간 내가 먼저 이상한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전혀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친해졌나 싶었는데,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을 보면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마리안과 애정결핍에 가까운 성향을 보이며 속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잔뜩 털어놓는 에디스.

생각보다 괜찮은 조합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불편한 자리가 오래 이어지는 것은 곤란했다. 바로 옆의 방 안에서 숨죽이고 있을 아이린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 둘을 가게에서 내보내야 했다.

"그런데 루디 씨. 저기 있는 아이는 뭔가요?"

마리안은 가게 입구의 수조에서 유유히 헤엄을 치고있던 워드를 가리켰다. 워터 드레이크가 흔한 몬스터는 아닌만큼 호기심으로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에디스는 지난 번에 지나가며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제대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지 반응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에디스는 파충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조금 질색하는 기색이었다.

"워터 드레이크입니다. 원래 산 속의 폭포나 큰 연못에서 사는 녀석이죠. 지난번에 계곡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잡았습니다."

워드 녀석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 비해 몸이 꽤나 통통해져 있었다.

야생에서 살 때는 그래도 먹이를 잡기 위해 조금이라도 움직였지만 요즘은 아이린이 너무 오냐오냐 먹이를 주니 꼼짝도 하지 않고 수조에서 뒹굴어댔다.

"혹시 만져봐도 되나요?"

마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어봤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워드 녀석은 몬스터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적었다.

사실 먹을 것만 준다면 상대가 누구든 재롱을 떨어댈 정도로 단순한 녀석이었다. 나는 워드 녀석의 저녁으로 손질해둔 말린 생선을 마리안에게 건네주었다.

마리안은 손에 든 생선을 조심스레 워드의 수조 안으로 던졌고, 유유히 헤엄을 치던 녀석은 귀신같이 생선 냄새를 맡고는 몸을 일으켜 입을 벌렸다.

커다란 입 안으로 통째로 생선이 사라졌다. 워드 녀석은 생선을 우물거리며 기분 좋게 르르렁거리는 소리를 냈고, 나는 마리안을 가볍게 밀며 워드 녀석을 만져도 된다고 했다.

마리안은 주저하면서도 내가 다시 한 번 권하자 손을 뻗어 워드 녀석의 머리 위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에게 간식을 준 사람이란 것을 아는지 워드는 가볍게 그르릉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그런 워드가 마음에 들었는지 마리안은 한 손으로는 워드의 턱을 간질였고,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몬스터라는게 안 믿겨질 정도로 온순하네요. 평소에도 다른 사람들이 찾아오면 이런가요?"

"글쎄요.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은 많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드레이크를 닮아서 잘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릴리스나 아이린처럼 순진한 아이들만이 워드 녀석을 좋아했다. 다른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워드는 관상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가요? 이렇게나 귀여운데..."

마리안의 미적인 기준을 제대로 검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역시 성녀쯤되면 취향의 폭도 마음만큼 넓어지는건가?

그렇게 한참 워드 녀석과 놀고 있는 마리안을 두고 탁자에 홀로 앉아있는 에디스에게 다가갔다.

"황녀님도 한 번 가보시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저래도 일단은 영물에 가까운 놈이라 먼저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설령 먼저 공격을 당해도 물 속으로 숨어버릴 정도로 겁쟁이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내 말에도 에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전 됐어요. 어릴때부터 파충류는 질색이었거든요. 예전에 황실 정원에 비슷한 녀석을 연못에서 키웠었는데, 제가 아끼던 물고기들이 전부 잡아먹히고 난 뒤로는 완전히 싫어졌어요."

사람에 대한 공격성은 없지만 식탐 하나는 엄청난 녀석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잘은 몰라도 정원에서 키우던 물고기들은 아주 씨가 말랐을 것이다.

"그런데 두 분이 이렇게 친해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앞의 대화는 사실 그냥 한 번 던져본 것이었고 사실 이쪽이 본론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황녀와 성녀라는 말도 안 되는 조합이 결성된 것인가.

"...그걸 정말 몰라서 물어요?"

에디스는 마리안을 한 번 쳐다보고는 나를 슬쩍 째려봤다.

찔리는 부분은 많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다.

에디스의 반응으로만 보면 마리안과 내 관계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쩌면 에디스가 나를 떠보는 것일지도 모르니 아직은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정치적인 감각이 아예 없지는 않단 말이지.'

잠깐 동안의 대치 상태가 이어지다 문제가 터진 쪽은 마리안 쪽이었다.

워드를 쓰다듬던 마리안은 워드 녀석이 재롱 부리는 것을 보다가 녀석이 몸을 뒤집다가 수조의 물을 잔뜩 튀겨 버린 것이었다.

졸지에 셔츠와 치마까지 쫄딱 젖어버린 마리안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꺄앗!"

놀란 에디스와 내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워드 녀석은 자신이 사고를 친 것을 눈치채고는 수조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넌 나중에 두고보자. 속으로 이를갈며 마리안에게 달려가서 혹시나 다친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정말로 물이 튄 것 뿐인지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조금 젖기는 했지만... 그것 빼고는 아무런 문제 없어요."

평소와는 달리 얇은 셔츠와 치마를 입고온 마리안이었기에 물에 젖어 속살이 비쳤다.

아직 마리안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눈치채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이럴 땐 차라리 선수를 치는게 좋겠지.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마리안은 젖으며 자신의 옷이 비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양 팔로 가슴을 감쌌다.

"...부탁드릴게요."

무척 부끄러워하는 마리안을 내 방으로 데리고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리에 앉아있던 에디스도 함께였다.

마리안의 몸에 맞는 옷이라면 며칠 전에 사온 아이린의 옷이겠지만 마법진까지 걸어놓은 아이린의 방문을 열 수는 없었다.

결국 조금 크지만 내 셔츠를 입히는 수 밖에 없었다. 흰색 셔츠와 활동하기 편할 반바지를 꺼내 침대 위에 놓았다.

"다 갈아입고 나오시면 됩니다. 성녀님께는 조금 커서 불편하시겠지만 입고 계시던 옷이 마를 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방문을 닫고 나왔다. 에디스는 여전히 방 안에 있었지만 같은 여자니 별 문제는 없겠지.

"...후우."

방 밖에서 조금 기다리자 내가 준 옷으로 갈아입은 마리안이 쭈뼛거리며 나왔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나는 잠시 넋을 잃고 쳐다봤다. 내가 준 셔츠는 평범한 흰색 셔츠였는데, 마리안의 체구에는 꽤 컸기 때문인지 허벅지까지 흘러내렸다.

문제는 활동하기 편하라고 꺼낸 반바지를 흘러내린 셔츠가 덮어버리자 마치 아랫쪽에는 아무것도 안 입고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엄청난 배덕감과 함께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려는 상황을 깬 것은 에디스였다.

"여기요."

마리안이 입고 있던 젖은 옷을 내 품에 안겨준 에디스는 나를 강하게 째려봤다. 아무래도 방금 전은 너무 노골적으로 쳐다봤나.

그래도 늘 자신의 몸을 감추는 옷을 입고 있던 마리안이 저런 옷차림을 했는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문제였을 것이다. 성녀의 저런 옷차림이라니. 살면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간 에디스에게 뺨을 얻어맞아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참았다.

"그럼 방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저런 옷차림의 마리안을 방 밖에 있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얌전히 마리안의 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청소 마법으로 수조에서 튄 물을 빼내고 깨끗하게 씻어냈다.

좀 더 빨리 마르도록 마법을 사용한 다음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그렇게 빨래를 끝내놓고 방으로 돌아가자 마리안과 에디스가 바닥에 쭈그려 앉아 내 책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소리 없이 그녀들의 뒤로 접근한 내가 묻자 깜짝 놀란 두 명이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졌다.

특히 마리안의 경우에는 넘어지면서 셔츠거 걷어올라가며 뽀얀 허벅지가 완전히 드러났는데, 분명 반바지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보일듯 말듯한 아래쪽이 신경쓰였다.

"자, 잠깐 루디 씨의 방을 둘러보고 있었어요. 딱히 이상한 의도가 있었던건 아니에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왜 그렇게 소리 없이 나타나요?!"

마리안은 양 손을 저으며 필사적으로 변명했고, 에디스는 되레 내게 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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