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을 돌려 마리안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손으로 등을 두드려주며 내가 감정을 추스르도록 기다려주었다.
포옹이 끝날 때 즈음에는 에디스도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잠시 뒤척이다 눈을 떴다.
"으응..."
일어난 에디스는 자신이 알몸인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 이불을 끌어당겼지만 마찬가지로 알몸인 마리안과 나를 보고 멋쩍게 웃으며 끌어당겼던 이불을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황에서 보인 귀여운 행동에 마리안과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에디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웃지 말라고 했지만 토끼처럼 깜짝 놀래서 후다닥 이불로 몸을 감추는 에디스는 무척 귀여웠다.
"그런데 저희 세 명이 함께 자기에는 이 침대는 조금 작지 않겠습니까?"
에디스와 마리안을 내 침대에서 재우고, 나는 의자를 이어붙여 그 위에서 눈을 붙일 생각이었지만 마리안이 그런 내 팔을 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모처럼 루디 씨의 집에 왔는데 그럴 순 없죠. 세 명이서 딱 달라붙어서 자면 괜찮을거에요."
그야 나도 알고있지만 양 옆에 미녀 두 명이 그렇게 몸을 밀착하고 있는데 가만히 넘어갈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이걸 노린건가?
오늘따라 요망해 보이는 마리안이라면 정말로 그럴지도.
"...우선은 욕실에 물을 받아놓겠습니다. 잠시만 방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정액 범벅인 알몸으로 저녁을 먹을 수는 없으니 나는 대충 옷을 걸치고 나왔다. 창가에는 지난번에 걸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환각 마법을 걸어놓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게 팻말을 뒤집어 영업 종료라는 것을 모험가들이 알 수 있게 했다.
그 다음에는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한 번 헹군 다음에는 비누로 거품을 내서 온 몸을 문질렀다. 그 다음 다시 대야에 받아놓은 뜨거운 물을 머리 위에 끼얹자 몸에 붙어있던 거품이 모두 쓸려나갔다.
두 번 정도 더 물을 뒤집어쓴 다음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몸을 닦아냈다.
평소 같았으면 두 번 정도는 수건을 더 사용했겠지만 자그마치 성녀와 황녀에게 내가 쓴 수건을 쓰게할 수는 없으니 새 수건을 두 개 꺼내놓았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아이린을 떠올렸다. 방에서 가슴 졸이고 있을 아이린을 위해서라도 몰래 저녁을 가져다 줄 생각이었다.
설마하니 두 사람이 오늘 내 집에 묵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마리안이나 에디스는 아직까지 아이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며칠 있으면 마리안은 떠나게 될텐데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후우."
순식간에 샤워를 끝내고 나온 나는 방에서 나올 때 대충 꺼낸 속옷과 옷을 갈아입었다. 마도구로 뜨거운 물을 욕조에 가득 받아놓은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내 방으로 돌아가 두 사람을 불렀다.
"두 분 함께 씻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친구랑 함께 목욕하는게 제 소원이었거든요."
"저도 괜찮아요."
마리안이 친구라고 말하자 에디스는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리안의 친화력은 대단하단 말이지.
"창가에 마법을 걸어놨으니 들킬 걱정은 하지 마시고 나오셔도 됩니다. 두 분이 씻으시는 동안 저녁 준비를 해둘테니 다 씻으시면 이야기해주십시오."
"알았어요."
마리안과 에디스는 내 안내를 받아 욕실로 향했고, 생각보다 시설이 괜찮다며 놀라워했다.
"어머. 이건 마도구에요?"
"받아놓은 물을 뜨겁게 데워주는 마도구입니다. 제가 직접 만들었지요. 공기가 차니 이만 닫겠습니다."
욕실 문을 닫고 나자 나는 창고에 보관중이던 블랙오크 고기와 향신료들을 꺼냈다.
그렇게 품에 한가득 재료를 끌어안고 나오던 도중 창고 한 켠에 비치된 와인셀러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 와인도 두 병 정도 꺼내왔다.
두 사람 다 성인이고 오늘같은 날은 한 잔 정도 마셔도 별 문제 없겠지. 도수가 센 것도 아니니 훅 갈 일도 없을 것이다.
욕실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에디스와 마리안의 목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몸매가 정말 좋으시네요'라거나, '최근 살이 찐 것 같아 걱정이에요.'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요리를 계속했다. 욕실은 방음이 전혀 안되는구나. 조심해야겠군.
원래는 블랙 오크 고기를 진작에 재워뒀어야 하지만 아쉬운대로 기름을 가득 두른 판에 블랙 오크 고기를 두 덩이 올려놓자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기가 익기 시작했다.
그렇게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샐러드를 준비했다. 다행히 아이린이 어제 장을 봐온 덕분에 신선한 샐러드에 소스를 버무리니 맛이 꽤 괜찮았다.
그렇게 탁자에 샐러드를 세팅하고 난 다음에는 한쪽 면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고기를 뒤집었다.
동시에 다른 냄비를 꺼내 불판 위에 올리고, 냄비 안에는 방금 전에 들고왔던 와인 한 병의 마개를 따서 부었다. 와인을 절반 정도 부은 다음에는 나머지 한 쪽 면도 거의 다 익은 고기 두 덩이를 냄비 안에 넣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와인이 졸기를 기다렸다. 탁자에 세 명 몫의 접시와 식기를 세팅하고, 마지막으로 아이린에게 갖다줄 접시에 샐러드를 담아놓았다.
와인이 완전히 블랙 오크 고기에 스며든 것을 확인한 나는 한 조각을 잘라 먹어보았다. 은은한 향과 함께 원래는 딱딱해야할 고기가 부드럽게 씹어졌다.
물론 급하게 졸이느라 향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더 뜸을 들였다간 두 사람이 욕실에서 나올지도 모르니 서둘러야했다.
고기를 총 네 등분을 한 다음 그중 하나를 아이린 몫의 접시에 담았다. 혹시 모르니 고기 뿐만 아니라 빵도 몇 조각 챙겼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아이린의 방 앞에 가서 방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아이린."
오 초 정도 지나자 끼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심스레 나온 아이린이 눈치를 봤다.
"...주인님? 손님들은 가신건가요?"
"미안하다. 아무래도 오늘 주무시고 가실 것 같으니 저녁은 방에서 먹어주겠니?"
"괜찮아요. 주인님.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제 정체를 들키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걸요."
정말 기특한 아이린의 말에 나는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린이 서큐버스만 아니었어도 두 사람에게 내 제자라고 자랑했을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아이린은 아쉬워하면서도 방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빛이 짠했다.
내일 두 사람이 돌아가면 아이린과 함께 외식을 해야겠다.
방 안에서 하루 종일 갇혀있는 아이린에게 다른 선물을 할만한 것이 없나 고민해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게 없었다.
옷은 이미 수도에서 맞춘 옷들이 있었고, 아이린은 다른 여자애들처럼 화장품이나 보석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나는 지난번에 아이린과 함께 서점에 갔을 때 아이린이 소설에 관심을 보이던 것을 기억해냈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최근 유행하는 연애소설이었다. 마법사와 귀족 영애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담은 내용이었던가.
하여간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그런지 그런 종류의 소설은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아이린도 이제 점점 성숙해져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연애를 하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최근 들어서는 아이린에게 찾아와서 고백을 하는 놈들도 있어서 더욱 그랬다.
물론 아이린은 웃으면서 모두 거절했지만 최근에는 또래 남자애들 뿐만 아니라 영지에 온지 얼마 안 된 새내기 모험가 녀석들도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물론 눈치 빠른 베테랑 모험가들이 그런 녀석들을 쥐어박아 주는 덕분에 내가 나설 일은 없었지만.
에디스와 마리안 몫의 고기를 접시에 담아 먹기 좋게 탁자에 세팅했다. 다른 술이라면 모를까 와인을 마시는 것은 꽤나 오랜만이었다.
지난번에 카르멘을 찾아갔을 때가 마지막이었던가?
와인의 겉표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을 보니 대충 20년 정도 숙성된 와인이었다.
창고에 걸어놓은 온도 조절 마법 덕분인지 적당히 서늘한 감촉이었다.
애주가인 카르멘이 있었다면 어떻게 와인을 맨손으로 잡을 수 있냐고 타박을 주었겠지만 나는 그녀같은 소믈리에가 아니었기에 거리낌없이 와인을 잔에 부었다.
보랏빛 와인을 잔에 절반 정도 채워놓은 다음 각 잔을 자리마다 놓았다.
다른 방의 불을 모두 끄고, 부엌의 식탁에 있는 등불만을 켜놓자 꽤나 괜찮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잠시 후 욕실에서 나온 마리안과 에디스는 각각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였다. 욕실 안에서 서로의 머리를 닦아주었는지 물기가 어느 정도 말라있었다.
나는 미리 챙겨둔 옷을 그녀들에게 내밀었고, 두 사람은 내 방에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조금 펑퍼짐한 반바지와 그녀들의 체구에는 큰 셔츠였지만 두 사람은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마리안이야 그렇다쳐도 에디스는 조금 투덜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이건 조금 의외였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으니 에디스는 내 셔츠를 잡아당겨 냄새를 맡아대고 있었다.
냄새를 몇 번 맡던 에디스의 한쪽 손이 아래로 향했고,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에디스는 황급히 두 손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냥 모르는 척 해주기로 하자. 저렇게 성욕이 왕성해서야 순례를 도는 도중에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두 분이 평소 드시던 음식에 비하면 훨씬 부족하겠지만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차려봤습니다."
두 사람과 차를 마신 적은 있어도 이렇게 식사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때문에 어떻게 간을 맞출까 싶었지만 그녀들이 평소에 먹어본 적 없는 자극적인 맛을 하기로 했다.
최대한 매콤한 향신료를 고기 안쪽에 넣은 다음 겉에는 졸인 와인을 스며들게 해서 달콤한 향기가 나게했다.
"스테이크인가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데 정말 루디 씨 혼자서 한거에요?"
"흐응...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꽤나 괜찮은데요?"
블랙 오크 고기는 겉으로 보기만 해도 기름기가 흐를 정도로 때깔이 좋은 고기였다. 그 덕분인지 두 사람은 꽤나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어느 정고 근력이 있는 마리안은 나이프로 쉽게 고기를 잘라냈지만 에디스는 낑낑대며 고기를 제대로 자르지 못하고 있었다.
"고기가 왜 이렇게 질긴거야...으으..."
"제가 잘라드리겠습니다. 나이프 주십시오."
에디스는 내 말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한참을 더 끙끙댔지만 결국 한 조각을 엉망진창으로 잘라내고 나서야 내게 식기를 내밀었다.
나는 에디스의 고기를 마리안의 것과 비슷한 크기로 먹기 쉽게 잘라주었다.
고기의 속살에는 매콤한 소스가 듬뿍 발라져 있어 붉은빛을 띠고 있었지만 내가 불을 몇 개 끄는 바람에 두 사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마리안과 에디스가 포크로 코기를 찍어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오물거리며 고기를 몇 번 씹으며 맛을 음미하던 도중, 먼저 반응이 온 것은 에디스였다.
포크를 쥔 에디스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입을 벌려 비명을 질렀다.
"후아악! 이거 엄청 맵잖아요!"
괴성을 지르며 마실 것이 없나 둘러보던 에디스는 바로 옆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그대로 원샷했다.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접시에 담긴 샐러드를 포크로 마구 찍어 입 안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입 안에 샐러드를 가득 집어넣고 우물거리던 에디스가 나를 째려봤다. 얼마나 배웠는지 눈가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평소에 못 먹었을 매운맛으로 간을 맞추긴 했지만 저 정도로 반응할 정도는 아니었을텐데. 혹시 내가 양 조절을 잘못했나 싶어 내 접시에 놓인 고기를 한 조각 포크로 집어먹었다.
처음 입 안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은은한 와인의 향기, 그리고 고기를 베어물었을때 터져나오는 육즙과 함께 맵싹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혓바닥에 맴도는 감칠맛은 분명 자극적이었지만 에디스처럼 저렇게 극적인 반응이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내 미각이 이상한건가 싶어 마리안을 쳐다봤지만 그녀는 고기를 호호 불어가면서도 맛있게 계속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에디스가 매운 것을 못 먹는 것 뿐인 모양이다.
내가 불쌍한 눈길로 에디스를 쳐다보자 그녀는 발끈하며 애꿎은 포크로 접시를 내려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