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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에 눈이 떠졌다. 쉽사리 올라가지 않는 눈꺼풀에 반쯤 눈을 뜬 채 기억을 더듬었다.
점점 정신이 돌아오며 어젯밤 늦게까지 에디스와 마리안과 즐겨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옆을 보니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내 양 옆에 누워있었다.
"...휴우."
어젯밤에 즐길 때는 몰랐는데 정말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성녀와 황녀를 함께 범했다는 사실은 대륙을 통틀어도 없으니 정복감이 엄청났지만 그 뒤처리가 문제였다.
그래도 창 밖이 조용한걸보니 아직까지는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새벽에 체력을 너무 소모했는지 온 몸이 다 욱씬거렸다. 최대한 마나를 운용해서 몸의 근육을 풀어주었지만 바로 회복되지는 않았다.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마시며 정신을 차릴 생각에 두 사람이 깨지 않도록 침대에서 빠져나와 방을 나오는 순간 발 밑이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발을 들어보니 나무 판자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물을 쏟았다기 보다는 마치 물이 튄 것 같은 흔적을 보고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한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내가 일어나고 나서 한 시간 정도 뒤에야 일어났다. 부스스 눈을 뜬 두 사람은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고는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에디스는 어젯밤이 자신이 했던 짓을 믿을 수 없다며 자신에게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냐고 묻기까지 했다.
두 사람이 욕실에서 씻는 동안 나는 크루거의 가게에 찾아가 갓 만든 따끈따끈한 빵을 사왔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빵을 사가는 나를 신기하게 여겼는지 크루거가 질문했다.
"오늘따라 꽤나 많이 사가는데 손님이라도 오는겐가?"
"하하. 그런 셈이죠."
괜히 길게 이야기하다가는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말을 할 것 같아 적당히 둘러대며 빵을 받아 나왔다.
가게에 돌아와 식탁에 빵이 담긴 주머니를 올려놓고, 냄비에 올려놨던 스프가 끓는 것을 확인했다. 다행히 스프는 따뜻하게 끓어있었고, 스푼으로 스프의 간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숙취와 피로도 덜어줄겸 최대한 담백하게 간을 맞추고 몸에 좋은 재료들을 듬뿍 넣었다.
느긋하게 씻었던 어젯밤과 달리 두 사람은 빠르게 샤워를 하고 나왔다.
"...아직도 아랫도리가 욱씬거려요. 대체 얼마나 했으면..."
새벽에 정을 나누던 도중 잠깐 쉬고 있을 때 에디스는 멋대로 남은 와인 한 병에 들어있던 와인을 마셔버렸고, 그 때문인지 새벽의 기억이 희미한 모양이었다.
물론 마리안과 나는 에디스가 술을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에디스의 짧은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처음에 에디스는 자신은 속이 별로 안 좋다며 스프만 먹겠다고 했지만, 고소한 빵 냄새가 가게 가득 퍼지고, 먼저 빵을 한 입 베어먹은 마리안이 연신 극찬하자 호기심이 생긴 듯 했다.
내가 한 번 먹어보라고 권하자 에디스는 못 이기는 척 빵을 베어먹었고, 예상보다 훨씬 괜찮은 맛에 놀란듯했다.
에디스가 평소에 먹는 고급스런 빵은 아니었지만 담백하면서도 따끈따끈한 빵은 빈 속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결국 스프가 담긴 냄비와 빵 봉투를 모두 비우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아침식사가 끝났다.
올 때는 들키지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두 사람에게 평소 내가 사용하는 인식 저하 마법을 걸어주었다.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하는게 아닌 이상 들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돌려보내고 나서야 나는 깊은 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앞으로 남은 날을 손으로 꼽았다. 이제는 그녀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쉬움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하."
그녀들도 분명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은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 두 사람은 목숨의 위협을 많이 받아왔지 않은가.
내가 그녀들을 붙잡는다면 두 사람은 분명 내 곁에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그녀들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망설여졌다.
흔쾌히 그녀들을 보내주지도 못하는 한심한 내 모습에 자조하고 있던 도중 방에 숨어있던 아이린이 걸어나왔다.
"...주인님?"
"왜 그러니. 아이린."
나는 굳어 있던 표정을 지우고 최대한 평소의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입꼬리가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아이린은 내 곁으로 걸어오더니 내 옆자리에 앉아 내게 몸을 기댔다.
따스한 몸의 온기와 함께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방금 나간 분들은 주인님에게 있어서 소중한 분이신거죠?"
"...그렇지."
"그리고 주인님은 저분들이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으실까봐 두려우신거고요?"
"......"
아이린에게는 두 사람과의 관계를 말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잘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린은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따스해지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두 분이 주인님을 잊지 않을법한 선물이나 흔적을 남겨드리는게 어떨까요."
아이린의 해답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은 이별하 때 그런 선물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바보같이 왜 그런 생각을 못했는지.
설령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를 가끔씩은 기억해주기를 바랬다.
"고맙다. 아이린. 네 말이 맞구나."
아이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헝클이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린은 내 손길을 받아들이며 기분 좋은 콧소리를 냈다.
동네 상점에서 파는 싸구려 기념품을 선물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단순히 값비싼 것을 선물한다고 그녀들이 마음에 들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급한 일들은 모두 마무리 지어놨기에 시간도 넉넉한 참이었다. 그녀들에게 어울릴법한 품격있는 선물을 준비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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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두 사람은 하루마다 번갈아가며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전처럼 정신나간 것처럼 서로의 몸을 탐하지는 않았다. 곧 일어날 이별 전에 최대한 서로에 대해 기억해두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가까웠다.
차를 마시며 그렇게 담소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래서 더욱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별다른 자극 없이도 이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것은 정말로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순례 여행의 출발일이 되었다. 나는 나흘 동안 하루에 두 시간도 자지 않은 채 그녀들의 선물을 만다는데 집중했다.
낮에 가게를 보는 것 역시 대부분 아이린에게 맡겼다. 며칠동안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가게를 보는 아이린에게는 미안했지만, 아이린은 오히려 내게 괜찮다며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만들라고 응원해주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그런 아이린의 응원 덕분인지 나는 아슬아슬하게 그녀들이 떠나는 날 새벽에 선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어제 찾아왔던 에디스는 오늘 아침에 마리안과 함께 출발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마리안이 성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바스티안 가문의 저택 앞으로 가서, 황실에서 준비한 마차를 타고 이동할 것이라고 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리안이 신전에서 출발했을 시간이었다.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나는 수염도 덥수룩했고, 머리카락도 마구 헝클어져 있었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외투를 걸쳤다.
"아이린. 가게 좀 맡기마!"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주인님."
아이린은 내게 어딜 가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며칠 전과 마찬가지로 내가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나를 배웅했다.
몰려오는 수마를 마나의 운용으로 몰아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수십 시간동안 잠을 자지 못해 정신은 피폐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저택 앞에는 이미 황실의 문양이 박혀 있는 마차가 대기중이었다. 혹시 에디스가 벌써 마차에 탔을까 봐 주변을 서성이던 도중,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크 황자와 함께 걸어오는 에디스를 발견했다.
조금 더 가까이오자 에디스도 그런 나를 발견했다. 문제는 옆에 있는 지크 때문에 에디스가 눈치만 보고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돌아온 황녀와 황자를 보호하기 위해 기사들이 몰려왔다.
에디스는 발만 동동구르고 있었기에, 결국 나는 조금 위험을 무릅쓰고 에디스에게 다가갔다. 지크와 에디스의 곁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그런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 순간 지크가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비켜드려. 나는 먼저 마차에 타고 있을테니 이야기 끝나면 돌아와."
뒤의 말은 에디스에게 한 것이었다. 기사들은 황자의 명령에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물러났다. 그렇게 황자와 함께 마차로 돌아간 기사들을 보며 에디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지난번에는 대체 어떻게 빠져나오신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몰골은 대체 왜 그래요?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은 사람처럼."
못 먹은게 아니라 안 먹은 것이었지만 굳이 그녀의 말을 정정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집중해서 만들다보니 끼니를 잊을 정도로 빠지고 말았다. 무엇보다 공복으로 날카로운 신경을 계속해서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 덕분에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여러모로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짓을 한 것도 처음이고, 앞으로도 할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만들었으니 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좀 더 재주좋게 대화를 했겠지만 지독한 졸음과 시간이 얼마없다는 초조함에 나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내 품에 넣어온 작은 함을 꺼내 에디스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함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드러난 금빛의 팔찌를 본 에디스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베이스는 금이었지만 중간중간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와 같은 보석을 박아 더욱 영롱해 보였다.
사실 저런 보석 공예로 팔찌를 만드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처음에 구상을 할 때는 조금 애를 먹었지만 한 번 집중력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하루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정작 시간이 걸린 것은 이 팔찌에 부여한 마법 술식 때문이었다.
평범한 물건에 마법을 부여해 아티팩트로 만드는 방법.
한동안 잘 사용하지 않던 마법을 사용해서 그런지 팔찌에 마법 주문을 새겨넣는데 골머리를 앓았다. 팔찌에 박혀있는 보석을 누를 때마다 마법이 발동되는 방식이었다.
푸른 사파이어를 누르면 주변의 공기를 정화시키고 온도를 낮춰주는 효과를, 초록빛 에메랄드는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 붉은 루비는 불의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기능이었다.
물론 정령이라고 해봤자 하급 정령이라 작은 불씨를 일으켜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정령의 가호를 받은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으면 몸의 마나 순환을 빠르게 해주는 것과 컨디션을 조절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불면증이 있는 에디스에게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에 넣은 기능이었다.
"이걸 직접 만든거에요?"
"자그마치 황녀님이 떠나시는건데 빈 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웃으며 팔찌가 담긴 함을 내밀자 에디스는 양 손으로 팔찌를 꺼내들었다. 알록달록한 색의 보석들이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이런 선물은 처음이에요. 반드시 소중하게 간직할게요. 이 팔찌를 볼 때마다 당신을 떠올릴게요."
다행히도 내 마음은 에디스에게 잘 전해진 모양이었다. 문제는 너무 잘 전해졌기 때문인지 에디스도 평소보다 고양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는 것이다.
"...아직 시간도 조금 남았으니... 이리 와요."
잠시 고민하던 에디스였지만 이내 생각을 굳혔는지 내 팔을 잡고 골목 구석으로 끌고갔다.
영지 중심의 거리라고는 해도 아직 이른 아침이었기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특히 이런 황가의 문양이 박힌 마치 주변을 태연하게 걸어다닐 정도로 간이 큰 인간은 없었다.
덕분에 우리는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이 서로의 은밀한 욕망을 채울 수 있었다.
사실 기사들이 조금만 이쪽으로 다가와도 드러날 정도로 아슬아슬 했지만 그들은 황자의 명령을 따르며 마차 주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에디스와 나는 바로 옆 골목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조금만 고개를 내밀어도 보이는 위치였지만 에디스는 신경쓰지 않고 내게 입을 맞췄다. 나는 그런 에디스의 키스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녀와 키스를 할 수 있는 것도 사실상 오늘이 마지막이니 그녀의 몸의 감촉과 온기를 최대한 기억해두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그녀의 입술을 느끼고 싶었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조금만 지나면 사람들이 거리를 돌아다닐테고, 마리안도 도착해서 마차가 출발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