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는 조금 이상한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뒷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교회 내부에서도 이미 이 목걸이는 잃어버린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으니 없어도 별 문제는 없을거에요. 저를 걱정해서 목걸이를 찾아와주신 루디 씨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목걸이를 당신에게 선물해도 될까요?"
신뢰의 목걸이는 내가 마리안의 목걸이의 모티브로 잡았던만큼 그녀의 것과 꽤나 닮아있었다. 다만 수정이 아니라 유리 공예에 강화 마법을 걸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마리안의 마음대로 이걸 줘도 되는지 걱정했지만 조금 떨어져 있던 성기사들은 뒤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 효과는 없다고는 해도 성물. 그것도 소중한 사람에게 받는 선물이 싫을리가 없었다. 나는 몸을 숙였고, 마리안은 그런 내 목에 신뢰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예전에 만들어진 목걸이답게 후크를 걸어 목에 딱 맞게 조이는 방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목에 걸치는 장신구였다.
그래도 여자들이 차고 다니는 목에 딱 맞는 목걸이보다는 차라리 이런 목걸이가 나은 것 같았다.
"이렇게 있으니, 꼭 커플 목걸이 같네요."
"...황녀님 앞에서는 말씀하시지 않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내가 만든 목걸이와 신뢰의 목걸이는 닮아있었기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배웅하기 전 에디스에게 이걸 들켰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기에 두 사람이 떠난 뒤에는 늘 착용하기로 마리안과 약속했다.
"루디 씨한테 받기만 하는건 곤란하니까요. 저도 루디 씨가 만들어준 목걸이를 보며 떠올릴테니, 루디 씨도 그 목걸이를 보며 절 떠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루디 씨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는 훨씬 밝아지신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보다 음울하고 차가워 보여서 걱정했는데, 지금이라면 안심하고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틀린 것 하나 없는 마리안의 일침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 때의 내게 지금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테니까.
설마하니 성욕이란 것도 거의 없고, 늘 혼자 있던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있던 도중 떨어져 있던 성기사가 다가왔다.
"성녀님. 죄송하지만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알겠어요. 금방 따라갈테니 먼저 가 있어 줄래요?"
"...알겠습니다."
마리안의 부탁에 성기사들은 반문하지 않고 마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아무래도 그들은 이미 나와 마리안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분들은 제가 어릴때부터 신전에서 함께 지내온 기사들이에요. 제가 믿을 수 있는 분들이니 안심하셔도 된답니다."
모두에게 친절한 마리안의 성품을 알고 있기에 그들도 성녀에게 금기시되는 행동을 한 마리안을 눈감아주는 것이리라.
"나중에 반드시 돌아올게요. 루디 씨도 그때까지 몸조심하세요."
"성녀님도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가볍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앞날에 축복이 깃들기를 기원하며 잠시 그녀를 포옹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볼게요. 가끔씩 편지할테니 꼭 확인해주세요."
"그러겠습니다. 황녀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이죠. 어쩌면 저랑 평생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할 식구일지도 모른데요. 후훗."
평소처럼 미소를 짓는 마리안이었지만, 그녀의 미소 뒤에서는 무척 아쉬워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단순히 내가 아쉬워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안녕히."
"루디 씨도 안녕히 계세요."
나는 몸을 돌려 멀어져가는 마리안을 뒤에서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마차 옆에는 앨리스와 그녀의 아버지인 바스티안 가주로 보이는 노년의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
기사들이 예의를 갖춰 그에게 인사를 한 다음에는 그들은 마차를 호위하기 위해 마차를 둘러싸듯이 진형을 갖춰 말에 탑승했다.
마차 앞에 있던 남자가 기사단장인지 말의 옆구리를 발로 한 번 걷어차며 고삐를 잡아당기자 말이 거친 울음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기사단장의 속도에 맞춰 마차와 다른 기사들도 출발했다.
나는 두 사람이 탄 마차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는데, 그녀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마차에서 무언가 내밀어진 것이 보였다.
마나를 이용해 시력을 강화해보니 마차에서 몸을 반쯤 내민 채 손을 흔들고 있는 에디스와 마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의 갑작스런 행동에 기사들이 위험하다며 말리는 것 같았지만, 그 의미를 알고 있는 나는 피식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녀들이 떠나서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가셨다. 이미 나는 삼십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왔다. 고작해야 일 년 정도는 이제와서 내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부디 에디스가 한 걸음 나아갔기를, 마리안이 무사히 성녀로서의 의무를 완수하고 평범하게 돌아오는 것을 느긋하게 기다리도록하자.
나는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비록 그녀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보이지 않아도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배웅을 마친 다음에는 오랜만에 거리를 둘러보며 시장에서 장을 봤다.
최근에는 마리안과 에디스의 상대를 해주다보니 대부분의 장보기는 아이린에게 시킬 수 밖에 없었는데, 한동안 아이린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만큼 오늘부터는 아이린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릴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장을 보러가자 시장의 상인들이 잔뜩 반겨주었다.
그들은 한동안 왜 찾아오지 않았냐고 하면서도 나를 대신해서 돌아다니는 아이린이 얼마나 성실하고 참한 아이인지 알려주었다.
시장의 사람들에게 늘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귀여운 미소를 짓는 아이린은 그야말로 마스코트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어쩐지 돈을 많이 주지 않았는데 재료를 양 손 가득 들고온다 싶었는데, 이들이 덤을 잔뜩 얹어준 모양이었다.
"시간이 되면 아이린과 함께 장을 보러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것도 괜찮겠군. 원래 아이린 나이때의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경써주기를 바라거든."
그렇게 이리저리 휩쓸려다니다 보니 원래 사기로 했던 식재료보다 잔뜩 사버리고 말았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빈민가에서 구르다 잡혀 노예 생활을 했었던 아이린이지만, 이제는 이 영지에 잘 섞여 살아가는 것 같아 안심했다.
그렇게 양 손에 들고있는 가죽 주머니가 온갖 채소와 과일들로 가득찬 채로 가게에 돌아오게 됐다. 가게의 진열장을 걸레로 닦고있던 아이린이 화색을 띠고 달려왔다.
"주인님!!"
최근 며칠 동안은 창고에 틀어박혀 마리안과 에디스에게 선물할 장신구를 만드느라 아이린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중간중간 아이린이 식사를 접시에 담아오면 나중에 먹겠다고 하고는 한참 뒤에야 간단하게 식사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아이린이 성장한 후로는 잘 하지 않던 스킨쉽도 받아주기로 했다. 새하얀 원피스 차림의 아이린을 끌어안자 달콤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지난번 수도에 올라갔을 때 샀던 향수 냄새였다.
"아이린. 네 덕분에 일이 무사히 끝났난다. 정말 고맙다."
"헤헤. 주인님에게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에요. 며칠 동안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셔서 정말로 걱장했다구요."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헤실헤실 웃는 아이린이었지만 걱정했다는 말을 할 때는 볼을 살짝 부풀리며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봐도 자신이 삐졌다고 말하는듯한 그 모습에 나는 결국 아저씨 미소를 지으며 아이린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래. 다음부터는 네게 걱정 끼칠 짓은 하지 않으마. 당분간은 느긋하게 둘이서 지내자꾸나."
내 말에 아이린의 눈이 빛났다. 내 팔을 자신의 가슴팍에 꼭 끌어안고는 양 손으로 도망치지 못하게 고정시켜버렸다.
"방금 그 약속. 꼭 지키셔야해요. 주인님?"
요염하게 입술을 혀로 훑으며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은 이때까지 자신이 등한시 됐던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 날 아이린은 내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서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한동안 아이린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기에 최대한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즐겁게 이야기하던 아이린은 피곤했는지 그대로 잠이 들었고, 나는 소파에 기대듯이 쓰러진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최근에는 아이린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전보다 더욱 예뻐진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복숭아빛의 입술이 위아래로 조금씩 요염하게 움직이고, 조금이지만 키도 더 커서 그런지 원래 입던 잠옷의 짧아져서 늘씬한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수도에 올라갔을 때 잠옷도 사올걸 그랬나.
며칠 동안 밤을 샜던 나 역시 피곤했기에 아이린을 방에 데려다 주고 슬슬 잘 생각이었다. 아이린이 깨지 않도록 그녀의 머리맡에 팔을 넣고, 그녀의 발목을 받쳐서 안아들었다.
아이린은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잠에서 깨는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금세 호흡을 되찾고 방금 전처럼 새근새근 잠들었다.
그녀를 안아들고 방까지 데려가는 도중에도 중간중간 잠꼬대를 해댔다.
"...으응...주인님... 거긴...안 돼요오..."
...대체 꿈 속의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몰라도 묘하게 홍조를 띤 아이린의 얼굴을 보면 안 좋은 일은 아니겠지. 본인은 행복해 보이니 냅두기로 할까.
나는 아이린을 그녀의 방 침대에 천천히 눕힌 다음 조용히 방문을 닫고 빠져나왔다. 아이린이 곤히 자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다간 나도 모르게 이상한 짓을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떠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러는지. 나도 어지간히 굶주린 모양이네.'
그녀들이 있을 때는 거의 매일같이 번갈아가면서 해댔는데, 최근에는 며칠 동안 섹스를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늘 낮에 에디스와 했던 것 역시 급하게 한 번 하느라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고.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했다간 정말로 이상해질 것 같아 나는 뒷목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내 방으로 돌아갔다.
이미 반쯤 내려온 눈꺼풀을 감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지친 육체에도 휴식을 주기로 했다.
그 날 밤의 꿈에는 드물게도 아이린이 나왔다. 꿈의 내용에 대해서는 내 명예를 위해서 말하지 않겠다.
다만 빌어먹을 것은 다음날 아침에 내가 서른 한 살을 먹고 몽정을 했다는 사실이다.
아침에 일어난 나는 아랫쪽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눈을 떴다. 서서히 몸을 일으켜 이불을 걷어올리고 보이는 광경에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씨발..."
서른 한 살 먹고 몽정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듣고 웃을 일이었다. 다만 그것보다 더욱 화나는 사실은 몽정의 상대가 아이린이라는 점이었다.
쓰레기 새끼. 아무리 굶주려도 그렇지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를 상대로 꿈속에서까지 욕정하다니.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지독한 허탈감과 자괴감에 머리를 싸맸다.
앞으로 아이린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지.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입고 있던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었다.
끈적하게 젖은 속옷과 바지를 대충 들고나와 욕실로 향했다. 다행히 아이린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욕실에 쭈그려 앉아 속옷을 빨아야했다.
최근에는 아이린이 빨래를 전담했었지만, 이런 것까지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아이린에게 이 사실을 들켰다가는 다시는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들지도 모른다.
결국 속옷을 깨끗하게 빨고는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건조대에 대충 걸쳐놓았다. 한 시간 정도 있으면 마르겠지.
비록 찝찝하게 아침을 시작했지만 마음을 가다듬었다. 꿈 속에서 아이린과 했던 짓은 일단 잊었다. 괜히 머릿속에 떠올릴수록 더 신경만 쓰일 뿐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릴 겸 욕실에서 가볍게 세안을 한 다음에는 부엌에서 차를 끓였다. 마리안이 떠나기 며칠 전에 최고급품의 찻잎을 몇 병이나 주고갔다.
찻잎을 넣은 주전자의 물이 끓기 시작하자 김과 함께 그윽한 향이 흘러나왔다. 정신이 맑아지는 감각과 함께 착잡하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무엇보다도 방금 전에 깨어났을 때는 신경쓰지 않았지만, 내 꿈에서 아이린이 상대로 나온 것도 조금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