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260)

아이린의 몸이 최근에 다른 성인 여성들과 비슷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아이린의 몸을 그런 의도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급성장한 몸을 보고 놀라기는 했지만 그것은 성적인 의도가 아니라 단순히 평소와 달라진 아이린의 체형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 뿐이었다.

적어도 내가 제정신인 동안에는 아이린에게 욕정한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아이린을 상대로 몽정을 했다는 것은 내 무의식이 아이린을 그런 시선으로 봤거나, 다른 이유가 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라고 믿고 싶었다. 아이린을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를 딸처럼 대해왔다.

누나가 고아로 빈민가를 굴러다녔던 내 부모가 되어준 것처럼, 나도 아이린의 부모가 되어주고 싶었다.

아이린이 내게 마음을 열어주기를 기다렸고, 그녀가 내게 의지하기 시작했을 때는 신뢰받을 수 있게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늘 굳어있는 아이린이었지만 어느순간부터 웃음기가 많아졌고, 내 곁에서 뭔가를 배우고 학습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린을 보며 나도 뿌듯함을 느꼈다.

최근들어 성장한 아이린과 스킨쉽을 하는 것은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걸로 흥분하거나 한 적은 없었으니 내 무의식 때문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내가 서큐버스에 대한 정보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이런 이유를 찾아내기라도 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서큐버스는 그 존재에 대한 정보가 적은 몬스터 중 하나였다.

그 트라다 쿠스만조차 서큐버스에 대해서는 자세한 정보가 없었는지 그가 남긴 몬스터 대백과에도 별다른 정보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그의 연구실이나 서재를 제대로 털어본다면 뭐라도 나올지 모르니 조만간 한 번은 찾아갈 생각이었다.

릴리스와 모네의 얼굴도 오랜만에 보고, 혹시 아이린의 몸이 급성장한 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차를 홀짝이던 도중 아이린의 방문이 열렸다. 어제 잠들었던 옷 그대로 하품을 하며 방을 나온 아이린은 부엌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나를 보고 움직임이 멎었다.

최근에는 아이린이 늘 나보다 일찍 일어나다보니 내가 먼저 나와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 같았다.

두 번 정도 눈을 깜박인 아이린은 벽에 세워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도망치듯이 욕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화장실 안에서 아이린이 당황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보기에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습도 귀여웠는데, 아무래도 아이린은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인게 부끄러운 모양이다.

아이린이 욕실에서 씻고 나오는 동안, 나는 찻잔과 주전자를 치웠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하기로 했다.

어제 사온 고기와 감자를 먹기 좋게 썰어놓고, 냄비 바닥에 버터를 한 조각 던졌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버터가 녹아 냄비 바닥에 퍼졌고, 미리 빻아놨던 마늘을 털어넣었다.

저녁에 돌아오자마자 고기를 재워뒀던 것이 정답이었다. 고기에서 잡냄새가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냄비에 기름을 둘렀다. 냄비 바닥에 기름이 깔리자 냄비 안에 고기 덩어리들을 투하했다.

기름과 마늘 소스에 먹기 좋게 버무려 주자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고기의 냄새가 부엌에 가득 퍼졌다. 그 다음에는 당근, 양파와 같은 야채들을 잘라서 냄비 안에 털어넣었다.

거기다 지난번에 만들어놨던 토마토를 잘게 으깨 만든 소스를 듬뿍 넣고, 월계수 잎을 조금 넣어 잡내를 잡을 수 있도록했다. 마지막으로 후추와 다른 향신료들을 털어넣었다. 그렇게 냄비 뚜껑을 닿자 때마침 아이린이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에 들어갈 때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밤동안 부스스해졌던 머리카락은 평소같은 윤기가 흘렀고, 방금 막 씻고 나와 화장 하나 없는데도 새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전의 일을 신경쓰고 있는지 도도한 표정을 짓고있는게 무척 귀여웠다. 저렇게 어른스러운 척을 해봤자 이전의 그녀 모습을 알고 있는 나였기에 딱히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번 일로 확신이 생겼다. 나는 아이린에게 무의식적으로 욕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도 나는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 뿐, 그녀를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내 곁에 다가온 아이린은 냄비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맡고는 메뉴를 맞췄다.

"오늘 아침은 스튜인가요?"

"그래. 한동안 네가 식사를 준비했으니, 오늘부터는 내가 맡으마."

"안 그러셔도 되는데..."

"최근에 가게도 보고, 식사도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지 않느냐. 당분간은 푹 쉬렴."

그렇게 말하며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린은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은 싫지만, 내게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것은 좋아서 그런 것일까.

조금 더 기다려 스튜가 완전히 끓자 나는 스튜가 담긴 냄비를 들고 탁자 위로 옮겼다. 아이린은 이미 냄비의 밑에 깔만한 나무 받침대를 가져놓았다.

그 외에 스튜를 덜어먹을 그릇과 식기를 세팅했다. 아이린과 둘이서 이렇게 식사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냄비 뚜껑을 열자 스튜의 달콤한 향기가 가득 퍼져나왔다.

달콤한 것은 내 입맛에 맞지 않았지만, 이번 스튜는 이때까지 고생해준 아이린의 입맛에 최대한 맞춰서 만들었다. 자극적인 향신료들을 잔뜩 넣은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스튜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아이린의 접시를 한 손에 들고 국자로 스튜를 잔뜩 담아주었다. 그 다음에는 내 몫의 스튜를 덜어냈다.

아이린은 내가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수저를 드는 법이 없었다. 그럴 필요없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아이린은 완강하게 절대 그럴 수 없다며 고집을 피워댔다.

내가 먼저 스튜를 스푼으로 한 입 덜어먹자 달콤한 토마토 소스의 맛이 느껴졌다. 이어서 뭉쳐놓은 고기를 입 안에 넣자 혀와 닿는 것과 당시에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내 취향은 조금 더 담백한 것이었지만 가끔씩은 이런 맛도 괜찮았다.

월계수 잎 덕분인지 향신료들의 강한 향도 어느정도 지워주었다.

내가 스튜를 먹는 것을 보고 조심스레 스푼을 든 아이린은 한 입 먹어보고 나서는 거침없이 수저를 놀리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스튜가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순식간에 그릇을 비운 아이린을 보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아이린을 가만히 쳐다보던 나는 그녀의 입가에 스튜가 묻은 것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내 손에 묻은 스튜를 씻는 것도 귀찮아 그냥 혀로 핥아먹었다.

그러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스튜를 먹고 있던 아이린은 어느새 스푼을 쥐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인님!"

당황한 아이린은 얼굴을 푹 숙이고는 방금 전보다 더욱 빠르게 스푼을 움직였다. 하여간 귀엽기는. 의외의 부분에서 순진한 아이린이었다.

결국 아이린은 냄비를 가득 채웠던 스튜를 모두 먹어치웠다. 저 작은 몸으로 이 많은 양을 어떻게 먹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그럼 다 먹은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주인님."

"그럼 부탁하마."

한동안 포션을 만들지 않아서 그런지 재고의 양이 부족해졌다.

재료는 충분하니, 오늘은 포션의 재고를 충분히 채워놓을 계획이었다. 냄비와 수저를 부엌의 계수대에 옮겨담은 아이린은 마도구를 작동시켜 흘러나오는 물에 식기를 씻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린을 뒤로한 채 나는 창고로 향했다.

창고는 지난번 내가 마리안과 에디스를 위한 장신구를 만드느라 꽤나 어질러져 있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광물 조각들과 제작 도구들이 놓여 있어서 나중에 아이린이 창고에 들어왔다가 발을 헛디디면 크게 다칠수도 있었다.

청소 마법으로 바닥에 흩어진 광물 조각들을 깨끗하게 쓸어담고, 오랜만에 사용했던 광물 제련 도구들도 정리해서 상자에 담았다.

그렇게 대충 정리를 끝낸 다음에는 준비해놓은 재료들로 포션을 만들었다.

거의 일주일 가까이 작업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재고가 바닥났기에 그걸 다 채우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조금 힘을 내야했다.

포션의 재고를 넉넉하게 만든 다음에는 상자에 담아 가지고 나왔다. 진열장에 비어있던 포션병들의 종류를 확인하고, 각각에 맞는 자리에 채워넣었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최근 들어 마비 포션이 불티나게 팔렸다는 것이다.

마비 포션은 화살촉에 포션을 바르는 궁수들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이상할 정도로 잘 팔렸다.

장부를 확인하다 이상한 점을 알아차린 나는 설거지를 끝내고 손을 씻고 있던 아이린을 불렀다.

마비 포션이 잘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그 용도가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마비 포션의 효과를 보기도 전에 쓰러지기 때문이다.

바스티안 영지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고블린. 드물게 오크나 트롤이 있는 정도였다.

지난번 던전 브레이크 때 출몰했던 오우거 정도 되는 상대가 아닌 이상 마비 포션을 검에 발라서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다. 때문에 검사들에 비해 파괴력이 적지만 원거리에서 지원이 가능한 궁수들이 화살촉에 발라서 사용하는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모험가들 중 활을 다루는 이는 적었다. 유명한 미궁이나 분쟁지역이라면 모를까, 고블린이나 오크를 사냥하는데 숙련된 궁수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궁수가 몬스터 한 마리를 사냥할 때, 검사는 몬스터 세 마리를 썰어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모험가들 사이에서 궁수의 역할은 정찰병과 후방지원. 딱 그 수준이었다.

'그런데 마비 포션이 그렇게 많이 팔리다니.'

상처를 치유해주는 단순한 효과 덕분에 수요가 끊임없는 하급 포션과 다르게, 마비 포션은 아주 가끔 한 두 병이 팔리는 정도였다.

혹시나 그들이 에디스처럼 다른 의도로 사용하려 한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아이린. 이 마비 포션을 사간 사람들은 누구니?"

바스티안 영지는 치안이 좋은 곳이었지만 위험이 될 일은 방지하는게 좋은 법이었다. 좁은 영지인만큼 포션을 사간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하지만 아이린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내 생각과 조금 달랐다.

"정말 그 사람들이 마비 포션을 사갔다고?"

"네. 게다가 다들 기운이 없으셨어요. 갑옷도 흙투성이셨고... 무슨 일이 있는걸까요?"

아이린도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오늘은 휴일이라 아침에 가게를 찾아오는 모험가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수상한 사람이나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조금 더 경과를 지켜봤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린이 말해준 사람들의 이름을 들으니 석연찮은 부분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들의 파티 중에는  활을 사용하는 사람이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휴일인 오늘 모험가들을 찾아가 사정을 묻는 것도 예의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기에 결국 내일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가게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던 도중, 창 밖으로 달려오는 마차의 모습이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마차라는 생각에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예상대로 마차의 옆에는 바스티안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예전에 내 가게에 찾아와 감사 인사와 함께 증명서를 줬었던 바스티안 가문의 집사장였다.

"이렇게 자네를 만나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구만. 그동안 잘 지냈나?"

"물론이죠. 집사장님께서 이런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아가씨께서 자네를 만나고 싶어하신다네."

앨리스가 나를 직접 부르다니. 안 그래도 조만간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나를 부를 정도라면 무언가 일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금방 준비를 갖추도록 하지요."

"그러게나."

나는 옷걸이에 걸어뒀던 외투를 걸치고, 신발을 구두로 갈아신었다.

"아이린. 잠시만 나갔다오마."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주인님."

아이린도 창 밖에 있는 바스티안 가문의 문양을 알아봤는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집사장과 함께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는 말에 채찍질을 하며 마차를 영주관으로 몰았다.

집사장은 내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지난번처럼 온갖 이야기들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말이 많은 성격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가 말해준 것들 중에서는 괜찮은 정보도 몇 가지 있었다.

바스티안 영지는 남쪽 대로를 제외하고는 사방에 숲 밖에 없었다.

때문에 다른 영지와 이어지는 유일한 길이 남쪽이었는데, 그쪽 숲에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상인들의 발길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고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앨리스가 나를 부른 것도 그 일과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았다.

"자네도 아가씨에게 꽤나 신임받고 있는 모양이구만. 사실 우리 아가씨는 좀처럼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거든."

"하하. 저야 늘 앨리스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영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돕는게 맞지 않겠습니까."

"역시 자네는 뭘 좀 아는구만. 아가씨가 자네를 부르시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해."

나를 단순한 포션가게 점주로 알고있는 그는 내 어깨를 툭툭쳤다. 조금 말이 많기는 했지만 집사장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집사장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며 남쪽 길이 막히게 된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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