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를 타서 그런지 평소보다 훨씬 빨리 영주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나와 집사장을 확인한 기사들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고, 집사장은 앞장서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을 지나 건물안으로 들어갔는데, 의외인 점은 집사장이 나를 데려간 곳은 응접실이 아니라 서재였다.
"아가씨는 서재 안에 계시니 어서 들어가보게. 최근 사건이 많아 바쁘시니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게 조언해주는 집사장에게 간단한 감사 인사를 하고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에 들어가자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서류들과 눈가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는 앨리스가 보였다.
"...오셨어요?"
초췌한 얼굴의 앨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몰골을 보아하니 밤을 꼴딱 샌 모양인데, 보통 가주가 사용하는 서재에서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앨리스가 저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문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나는 뚜벅뚜벅 걸어 앨리스의 앞에 놓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앨리스의 앞에서는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
예상대로 앨리스는 그런 내 행동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최근에 영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들으셨어요?"
"오는 길에 간단하게 설명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납득이 되지는 않더군요. 애초에 왜 영애가 이런 곳에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겁니까?"
탁자 옆에 굴러다니는 백작가의 인장을 보니 정말로 그녀가 혼자서 이 많은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는 것이 실감났다. 옆에 굴러다니는 서류 한 장을 집어 내용을 확인했다.
'레드 혼'을 토벌하기 위한 기사들을 차출하기 위한 승인서...
레드 혼? 설마 그 이름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기에 나는 옆에있던 다른 종이를 확인했다. 이번에는 정찰대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기사가 작성한 보고서였다.
[남쪽 숲 주변에 최근 레드 혼 무리가 출몰하며 대로를 막거나 지나다니는 상인들을 위협하기 때문에 신속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레드 혼 무리는 적어도 열마리 이상씩 무리지어 다니며, 어지간한 기사들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레드 혼이 들이받아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최소 C랭크 이상의 모험가나 정예 기사들을 보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제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들고있던 종이를 탁자위에 돌려놓았다.
레드 혼은 소의 형태를 한 몬스터였다. 다만 그냥 소가 아니라 산양의 뿔과 같은 거대한 뿔을 가지고 있었고, 몸 색깔 역시 이름에 맞게 새빨간 붉은빛을 하고 있었다.
고블린이나 오크처럼 맹목적으로 인간을 증오하는 몬스터는 아니었지만 녀석들이 거대한 덩치와 뿔로 위협하며 길을 막고 있는 경우는 가끔씩 있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레드 혼이라고 해도 기사들을 상대로도 버틸 수는 없을텐데요."
레드혼이 제아무리 육중한 몸을 가진 몬스터라고 해도 인간을 죽일 수 있을만큼 강력한 무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고, 고작해야 머리를 세게 들이받아 멀리 날려버리는 정도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격을 주기는 충분하지만 검에 마나를 불어넣을 줄 아는 기사 정도된다면 그 정도는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하아. 처음에는 대로를 막고 있는 레드 혼들을 한 번에 소탕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며 기사들을 이끌고 가셨지 뭐에요."
대충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졌다.
소드 마스터가 오우거도 아니고 고작해야 레드 혼을 때려잡겠다고 몸소 출진하셨으니 아마 레드 혼 무리의 우두머리를 단칼에 베어버렸을테고, 우두머리를 잃은 레드 혼들은 숲 속으로 모두 도망가버렸겠지.
몬스터들을 일망타진 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전력이라고 안심시키고 뒤통수를 후려치거나 처음부터 포위를 하고 시작했어야했다.
대로가 아예 틀어막혀 있었으니 포위는 불가능하다고 쳐도, 아무리 인간을 적대하는 몬스터라도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목격하면 그대로 줄행랑 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사단은 아직 대로 옆에서 천막을 치고 야숙 중이고, 모험가 길드에도 공문을 보내놨어요."
모험가들 역시 상인들이 오지 않으면 새로운 장비를 맞출 수 없었기에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궁수 하나 없는 파티의 모험가들이 마비 포션을 사갔는지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몬스터답게 단단한 가죽과 무식한 힘을 가진 레드 혼을 잡기 위해서는 놈들의 힘을 뺄 필요가 있었고, 아마 검이나 창에 마비 포션을 바르고 덤벼들었던거겠지.
갑옷이 흙투성이었던 이유는 그렇게 놈들에게 덤벼들었다가 얻어맞고 날라갔던 것일테고.
평소 같았으면 자신들이 잡은 몬스터를 자랑하고 모험담을 떠들어댔을 놈들이 왜 아이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야 덩치 큰 소한테 얻어맞고 꼴사납게 날아가버렸다고는 입이 찢어져도 말 못하겠지.
원래 모험가는 자존심 하나로 먹고 사는 놈들이었다. 곧 죽어도 약한 모습은 보이기 싫어하는게 녀석들이니.
"지금은 아버지가 이끄는 기사들과 저희 영지의 전속 길드인 나이트 울프의 길드원들이 숲을 통제하고 있어서 길을 확보하고 있었기에 황녀님과 성녀님이 돌아가시는 길은 문제가 없었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인력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계속 레드 혼들이 숲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제가 뭘 해주시길 바라는 겁니까?"
최근에는 앨리스에게 신세를 진 적이 몇 번 있었기에 간단한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생각이었다. 레드 혼을 토벌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도 않은 일이고.
"루디 씨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어요. 평소 같으면 모를까 이번에는 아버지도 있으시니 직접 나서면 정체가 발각될지도 모르니까요. 대신 레드 혼들을 숲 밖으로 불러낼 수 있는 포션을 만들어주시면 제가 적당히 포장해서 아버지에게 설명할게요."
그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고블린이나 오크를 불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피와 흥분제를 섞기만 해도 짐승에 가까운 그놈들은 정신 못차리고 뛰쳐나올게 분명했다.
지난번의 일에서 교훈을 얻었는지 앨리스는 더 이상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분명 좋은 일인데도 조금은 아쉬웠다.
앨리스가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다면 나도 망설임 없이 다시 그녀를 괴롭혔을텐데.
"...뭔가 표정이 기분 나쁜데요."
"기분 탓입니다."
나도 모르게 올라갔던 입꼬리를 내리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쓸데없이 이런 부분에서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앨리스였다.
"그럼 포션이 완성되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그대로 방을 나왔어도 됐겠지만, 저대로 놔뒀다간 얼마 못 가서 쓰러질 것 같았기에 앨리스에게 포션을 한 병 내밀었다. 하급 포션에 몇 가지 약재를 추가해서 만든 피로회복제였다.
앨리스는 내게 물약의 정체를 묻지 않고 마개를 따서 단숨에 마셨다. 약효가 즉각적으로 몸에 돌기 시작하자 앨리스의 초췌한 얼굴에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무리하지 말고 푹 쉬십시오. 귀한 영애께서 왜 이런 사무를 일일이 직접 처리하시는 겁니까?"
서재에 굴러다니는 다른 종이에 적혀 있는 것들은 집사장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도 문제가 없을 정도의 안건이었다. 굳이 혼자서 이런 일들을 일일이 처리하는 것은 비효율의 극치였다.
"...저는 가문을 물려받아야 하니까요. 저 혼자서도 아버지만큼이나 가문을 잘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걸 증명하고 싶은걸요."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다만 그런 것을 신경쓰기 전에 자신의 몸부터 돌보십시오. 이건 진심입니다."
앨리스 역시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러는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걸로 됐다. 앨리스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자신의 몸 상태 정도는 알아서 파악하겠지.
앨리스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서재의 문을 닫고 나왔다.
몇 번이나 저택을 몰래 들락거린 경험이 있었던 나였기에 나가는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정원을 지나 저택을 나오자 기사들이 내게 가볍게 목례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상대가 다른 몬스터였다면 단순히 몬스터들을 유인할 포션을 넘겨주는 것으로 끝냈겠지만 상대가 다름아닌 레드 혼이었기 때문이다.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하는 녀석들이었기에 만나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도 모험가로 활동할 때 몇 번인가 만난 적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맛있던걸로 기억하는데.'
쉽게 볼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기에 그 때의 우리 파티는 레드 혼의 고기를 먹을 수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의 우리는 멀리까지 모험을 나왔었기에 조금이라도 식량을 아끼기 위해 놈의 고기를 먹기로 했다.
그리고 입에 넣었던 녀석의 고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맛이었다.
별다른 향신료 없이도 입 안에서 살살 녹아내리는 부드러운 식감. 굽는 것만으로도 고기에서 흘러나오는 기름 때깔마저 고왔다. 결국 우리는 그날 저녁 레드 혼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먹었다.
사실상 뼈와 내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먹어치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평소 미식을 즐기는 카니스조차 이런 고기는 처음 먹어본다며 극찬할 정도였다.
결국 우리는 의뢰를 하는 도중에 레드 혼을 보이는 족족 잡았고, 세이빌 녀석에게 짊어지게 했다. 나중에 레드 혼 두 마리를 등에 짊어지고 돌아온 세이빌을 본 병사들이 깜짝 놀라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수도에 돌아오고 나서야 알게됐지만, 레드 혼의 고기는 부르는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고급품이었다. 우리 역시 잡아온 레드 혼의 사체를 비싼 값에 팔아치웠다.
'레드 혼 한 마리 정도면 두고두고 먹기에도 충분하고.'
그날 레드 혼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던 것은 우리가 무척 굶주린 상태였고, 파티에 있던 사야와 세이빌이 엄청난 대식가였기 때문이다.
아이린 역시 식성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수준이었기에 그 둘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가게를 보고있던 아이린은 내가 돌아오자마자 달려와 품에 안겼다.
예전에는 내 허리까지 오던 키는 어느새 훌쩍 커서 내 목까지 닿았고, 조금이지만 부풀어오른 가슴을 붙이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아이린은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주인님. 무슨 일로 불려가신건가요?"
"별 거 아니란다. 영지 밖에 출몰한 몬스터들이 있는데, 그 녀석들을 유인할 수 있는 포션을 만들어달라고 부탁받았거든."
사실대로 알려주자 아이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이 불렀으니 아이린이 걱정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럼 포션 만드는 것 좀 도와주겠니?"
"물론이죠. 주인님."
아이린은 마법 뿐만 아니라 연금술에 대해서도 이해도가 높았기에 하급 포션이나 간단한 해독제 정도는 이제 혼자서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이린은 아직 물건에 마나를 불어넣는 법까지는 몰랐기에 내가 만든 포션처럼 효능이 좋지는 않았다.
예전 다른 상인들이 팔았던 포션과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수준이었다.
그래도 머리가 좋은 아이린이었기에 포션의 재료를 모두 외우고 배합순서를 기억하고 있었기에 포션을 만들 때는 큰 도움이 됐다. 물론 당장 포션을 만들 수는 없었다.
이번에 만들 포션에 결정적인 재료가 아직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함께 장이라도 보고 오게 옷을 갈아입고 오렴."
내 말에 아이린은 활짝 웃으며 종종걸음으로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나는 방에서 탁자에 놓인 장부를 정리한 다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앨리스에게 찾아갈 때는 귀족에게 초대받은 것이니 예의를 차리겠지만, 매일같이 만나는 이들을 볼 때는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
아이린은 금세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지난번 수도에 올라갔었을 때 산 은빛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저런 차림으로 거리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을 잔뜩 잡아끌 것이 분명했지만, 원피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아이린에게 갈아입고 오라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잘 어울리는구나. 아이린."
"저, 정말요? 헤헷."
배시시 웃는 아이린은 내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거리를 돌아다니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떤 관계로 보일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생겼지만 행복해보이는 아이린을 보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이린은 손에 땀이 나지는 않을까 걱정될정도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는데, 너무 기합이 들어간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이린의 보폭에 맞추어 느긋하게 걷고있자 마침 지나가던 바크가 나를 알아보고는 아는체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