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디 형! 오랜만이에요. 옆에분은..."
바크는 브리튼 상단의 부단주이자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동생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바크가 일편단심으로 짝사랑했던 플로라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금 양심이 찔리긴 했지만 나는 티나지 않게 대응했다.
"너도 지난번에 본 적 있지? 아이린이야."
"아하. 아이린 양이셨군요...아?"
바크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려다가 다시 한 번 이름을 곱씹으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야 바크가 아이린을 만났을 때는 간신히 내 허리까지 오는 어린 여자애였으니 당연한건가.
그래도 아이린은 바스티안 영지에서 꽤나 유명인사였는데 바크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하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짧은 시간에 무척 성장하셨네요."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바크는 아이린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 그러고보니 최근 남쪽 대로가 막혔다던데 너희 상단은 괜찮은거냐?"
"형도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사실 저희 상단도 지금 골칫거리에요. 원래 납품받기로 했던 물건들이 아직 도착하지 못해서..."
바크의 안색이 안 좋아진걸 보면 정말로 상황이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지금 당장도 일시적으로 길을 탈환했을 뿐이지 완전히 안전해졌다고는 할 수 없다.
"금방 괜찮아질거야. 걱정마라."
"...그래도 형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기운이 좀 나네요. 사실 레드 혼의 가죽은 마력을 잘 통과하는 재질이라 마도구의 재료로도 가치가 있어서, 만약 레드 혼을 잡는다면 바스티안 가문에 거래를 신청해볼 생각이에요."
"얼씨구. 이런 상황에서까지 돈 벌 궁리 뿐이냐?"
"손해본만큼은 메꿔야죠. 앗.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났네. 다음에 시간이나면 가게에 또 찾아갈게요!"
"그래. 너도 고생하고."
바크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고는 헐레벌떡 중심가를 향해 뛰어갔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바크와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아이린은 내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슬슬 노을이 지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아지는 사람들 중에서도 아이린은 누구보다 시선을 잡아끌었다.
노을빛을 받아 아름답게 찰랑이는 보랏빛 머리카락과 보는 사람의 심장을 멎게할 것 같은 미소까지. 현실에 강림한 여신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이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동안, 아이린과 나는 오랜만에 거리의 노점상과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이렇게 둘이서 돌아다니는 것이 오랜만이었기에 잘 찾지 않던 노점상에 들러 군것질을 하거나 물건 한 번 보고 가라는 상인들의 뻔한 수법에도 한 번 속아주며 물건을 구경하기도 했다.
나 역시 며칠동안 창고에 틀어박혀 선물을 만들다보니 피곤했던 것도 아이린의 찬란한 미소를 보니 금세 사라졌다. 그렇게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했다.
슬슬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기에 가게가 문을 닫기 전에 목적지로 향했다. 가까이 가자 희미하게 피냄새가 새어나오는 그곳은 다름아닌 푸줏간이었다.
굳이 푸줏간에 찾아온 이유는 포션을 만드는데 필요한 피 때문이었다. 몬스터의 피로는 효과가 거의 없고, 인간의 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결국 남은 선택지는 동물의 피 뿐이었다.
"아이린. 밖에서 기다리겠니?"
저렇게 꽃단장을 했는데 피냄새가 베이면 곤란했기에 말리려 했지만 아이린은 내 팔을 놓아주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함께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푸줏간 문을 밀고 들어가자 강렬한 피냄새와 함께 천장에 달린 갈고리에 매달려있는 고기들이 보였다. 도축을한지 얼마 안 됐는지 아직 피를 빼는 중이었다.
날카롭게 빛나는 정육도를 들고 고기를 내리치려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오? 고기라면 아직 피가 다 안빠져서 줄 게 없으니 다음에 다시 오게나."
"고기는 필요없고, 돼지를 잡고 흘러나온 피를 조금 얻고 싶습니다만."
내 말에 남자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고기도 아니고 피를 달라는 손님은 없었을테니까. 그는 나를 수상한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돼지의 피는 어디다 쓰려고 그러는거요? 만약 이상한 일에 쓰려는거라면 절대 줄 수 없으니 썩 가시오."
그의 단호한 거절에 옆에있던 아이린이 볼을 부풀리며 내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린을 본 남자가 순간 멈칫했지만 그래도 나를 향한 경계심은 거두지 않았다.
다짜고짜 동물의 피를 달라고하면 이런 반응이 당연한거려나. 나는 품에 넣어놨던 1급 시민 증명서와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지난번에 내가 1급 시민 증명서를 받았을 때 좋아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비록 다른 영지에서는 신원을 보증받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 증명서를 발급해준 바스티안 영지 내에서는 준귀족에 해당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급 시민 증명서를 발급받을 정도의 인물이라면 영지를 다스리는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거나 귀족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바스티안 가문의 인장을 위조할 정도로 간 큰 인간은 없었기에, 남자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분이신지도 모르고..."
"아무런 설명도 없으면 충분히 그럴수도 있죠. 괜찮아요. 제가 동물의 피를 필요로 하는건 영지 밖에 나타난 몬스터를 유인할 포션을 만들기 위해서니 용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 설명에 안심한 그는 선반 아래에 흘러나온 핏물을 받아놓은 통을 빼냈다. 피가 빠진지 얼마 안 됐기에 아직 굳지 않은 검붉은 피가 통에 반쯤 차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무리지어 생활하는 녀석들이니 한 놈이 피냄새를 맡고 달려나오기 시작하면 다른 놈들도 따라올 것이 분명했다. 대충 열 병 정도를 숲 입구에 뿌리는 것으로 충분하겠지.
나는 묵직한 통에 담긴 피를 준비해온 포션병에 가득 담았다. 평소에 사용하는 하급 포션병보다 좀 더 큰 병에 흘러넘치기 직전까지 돼지의 피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나는 마개를 닫았다.
"감사합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사례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나는 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그에게 내밀었고, 그는 양 손으로 주머니를 받았다. 예상보다 묵직한 느낌에 당황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재밌었다.
피냄새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마개를 단단히 봉한 다음에는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머릿속으로 이미 포션의 레시피는 완성되어 있었기에 준비는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럼 슬슬 돌아갈까?"
"네. 주인님."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대답한 아이린은 이제 나와 팔짱까지 꼈다.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만 같은 얇은 팔목과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걸었다.
돌아가는 내내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끌었지만 아이린과 나는 더 이상 그들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았다.
내 가게를 매일같이 찾아오는 모험가들은 아이린과 내 관계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모습에 익숙해지만 일일이 지금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겠지.
물론 아이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한심한 얼간이들은 내가 따로 손을 봐줘야겠지만 말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디저트 가게에 들러서 케이크와 슈크림을 몇 가지 샀다. 비록 수도에 있는 '프로쉐'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했다.
애초에 제국에서 첫 번째로 손꼽히는 명품 과자점를 이런 변방의 디저트 가게와 비교하는 것부터 무리가 있었다.
아이린이 좋아하는 슈크림과 초코 케이크, 그리고 내가 즐겨먹는 녹차 케이크를 포장해달라고 했다. 안에 담긴 케이크의 형태가 망가지지 않도록 나는 상자를 든 왼손의 균형을 신중하게 맞췄다.
가게에 돌아와서는 오늘 산 케이크와 간식들을 정리했다. 아공간 주머니에 담겨있던 포션 병과 덤으로 받은 찬거리들을 정리해서 창고에 분류했다.
"저녁은 제가 차릴테니 주인님은 쉬고 계세요."
"그럼 잠깐 창고에 갔다오마."
아이린이 가죽가방에 가득 담겨있던 찬거리를 확인하며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아까 받아온 돼지 피가 담긴 포션병을 들고 창고로 향했다.
창고 구석에 내가 마련해놓은 탁자 위에 재료들을 나란히 늘어놓았다.
향을 들이마시는 것으로 강력한 흥분 효과를 발휘하는 포로멘 꽃잎, 피냄새를 숲에 가득 퍼지게 해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강렬한 향을 가진 맨드레이크의 뿌리를 잘게 빻았다.
붉은 꽃잎이 마치 핏물처럼 얇게 펴지고, 갈빛의 뿌리가 완전히 가루가 되자 나는 두 개를 열 개의 포션병 안에 골고루 털어넣었다.
신중하게 양을 조절한 다음에는 받아온 돼지의 피를 천천히 흘려넣었다.
돼지 피가 포션 병 안에 들어가는 순간 검붉은 피가 마치 방금 전 도축한 동물의 피처럼 선홍빛으로 변했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수그러들었던 혈향이 창고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내게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향이었기에 나는 멈추지 않고 다음 포션 병에 돼지의 피를 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 병을 모두 채우고 나자 그에 딱 마줘서 돼지의 피가 떨어졌다.
"...옷은 갈아입어야겠네."
푸줏간에 찾아갔을 때보다도 더욱 심한 피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모험가로 활동할 때는 매일같이 맡았던 향이었다.
뜨거운 피가 온 몸에 튀고, 피냄새와 함께 내장을 쏟아내는 몬스터들을 상상하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의 나는 더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서 희열을 찾지 않는다. 예전에는 향기롭게 맡았던 피냄새도 이제는 지독한 악취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며 나는 창고에서 나왔다.
부엌에서는 아이린이 가벼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치마를 한 채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낮에 받은 생선을 굽고 있는 아이린은 무척 즐거워보였다.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서 피냄새로 진동하는 옷을 갈아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아이린에게 들킬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생선을 접시에 담아 옮기고있던 아이린이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식사 준비가 끝났어요."
아이린의 말대로 노릇노릇하게 익은 생선에는 속까지 잘 익도록 군데군데 칼집이 나 있었고 생선의 옆에는 레몬 조각과 허브가 놓여있었다.
"수고했다. 어서 먹자꾸나."
나는 레몬 조각을 들어 생선에 두어 번 뿌리고는 포크와 나이프로 생선을 발라먹었다.
꽤나 크기가 있는 생선이라 그런지 양도 푸짐했고, 뼈가 거의 없는 덕분에 수월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아이린은 내가 먼저 생선을 한 입 먹고 음미하자 그제서야 수저를 들었다.
예의 바르고, 요리 실력도 출중한데다 마법적인 능력마저 뛰어났다.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완벽한 아이가 또 있을까.
아이린을 떠나보내고나면 혼자서 얼마나 쓸쓸하게 지내야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최근에는 내가 아이린을 보살펴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내가 아이린에게 보살펴지는 기분이었다. 뭐든지 배우는게 빠르고 열성적이다보니 어느새 능숙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모르게 그런 아이린에게 기대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생선을 모두 먹고 식기를 치운 다음에는 아이린이 조금은 기대하는 듯한 눈을 하고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포션을 만드실 때 제가 도와드릴건 없을까요?"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론은 금세 나왔다.
"오늘은 괜찮단다. 피곤할텐데 먼저 자렴."
이번에 만든 포션은 바스티안 가주가 이끄는 기사들이 사용하게 될텐데,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아이린의 마나에서 이질적인 감각을 찾아낸다면 일이 복잡해질 우려가 있었다.
과한 걱정일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아이린이 위험에 처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그래. 너도 잘 자렴."
아이린은 조금 시무룩했지만 그래도 평소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중에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줘야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창고로 내려갔다.
창고 문을 열자 아까보다는 좀 수그러든 피냄새가 나를 반겼다.
마개를 막아둔 덕분인지 더 이상 냄새가 새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마개를 따는 순간 빠져나온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우겠지. 그건 나로서도 곤란한 일이었다.
포션병을 한 손으로 쥐고 천천히 마나를 불어넣자 병 안의 액체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맨드레이크를 빻아서 넣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뿌리를 뽑아낼 때 비명을 지른다는 소문과 어울리게 맨드레이크는 마력을 품은 약초였다.
내가 마나를 불어넣자 그에 반응하듯이 잠시 빛을 내던 액체는 금세 빛을 잃었다. 하지만 병 안의 액체의 색은 더욱 진해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순서대로 다음 병을 손에 들고 같은 방법으로 마나를 불어넣고 열 병을 모두 완성했다.
나는 완성된 포션병들을 모두 아공간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레드 불이 그렇게 호전적인 몬스터도 아니고, 오늘은 이미 밤이 깊었으니 앨리스에게 포션을 전달해주는 것은 내일로 미뤄야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