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온 몸에 피로 하나 없이 말끔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자기 직전에 마나를 사용해서 조금은 피로가 쌓였을줄 알았는데 워낙 적은 양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방 밖으로 나오니 먼저 일어난 아이린이 가게 앞을 쓸고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인지 특히나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그런 아이린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아침으로는 크루거의 가게에서 사온 빵과 어제 디저트 가게에서 사온 슈크림을 곁들여 먹었다. 중간중간 차를 마시며 먹다보니 금세 배가 찼다.
설거지까지 아이린에게 맡길 수는 없었기에 아이린은 책을 읽으며 쉬고, 나는 그동안 설거지를 끝냈다. 잠시 후 가게를 열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 몰려왔다.
한동안 가게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기에 그들도 내가 반가운 기색이었다.
"얼마만에 보는건지. 며칠 동안 뭘 하고 다닌거야?"
"몸이 좋지 않아서 며칠 쉬고 있었습니다."
에디스와 마리안과의 관계를 말해봤자 믿을 것 같지도 않고, 농담이라고 치부할 것이 뻔했기에 나는 적당히 변명을 지어냈다.
다행히도 그런 내 변명이 먹혔는지 그들은 내 안위를 걱정했다.
"이런. 그런 줄은 몰랐군. 미안해. 몸은 이제 좀 괜찮나?"
"덕분에 완전히 나았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별 일은 없었습니까?'
내가 슬쩍 질문을 던지자 그는 내가 묻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레드 혼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대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기에 별로 영양가는 없었지만 그는 꽤 입담이 좋은 편이었기에 자신이 얼마나 용맹하게 레드 혼과 맞섰는지를 떠들어댔다.
레드 혼은 들이받는 것 말고는 위협적이지도 않고, 녀석의 뿔은 위로 굽어 있었기에 들이받쳐도 몸에 멍이 드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마치 생사의 혈투를 벌인 것처럼 떠들어대는 그의 말을 듣다보니 나도 정말로 레드 혼이 드래곤에 필적하는 몬스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걸 깨달은 놈이 줄행랑쳐버린거지."
그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결국 레드 혼한테 몇 번 들이받혔다가 놓친걸 저렇게 설명할 수도 있군.'
모험가들의 절반 정도는 사기꾼으로 활동했다면 대성했을텐데 왜 굳이 모험가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모험가들이 의욕을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수확은 충분했다. 계속해서 레드 혼의 사냥에 실패하면 실망하거나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모험가들의 고집을 너무 얕봤던 것 같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모험가들이 포션을 사러온 김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대부분이 레드 혼에게 얻어맞고 날아간 동료를 놀리는 이야기였지만 그 중에는 쓸만한 정보도 꽤나 있었다.
남쪽 대로를 기준으로 좌측보다는 우측의 숲에 레드 혼의 숫자가 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거나, 최근 발견된 흔적을 봤을 때 숲의 입구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는 점은 분명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나는 오랜만의 서비스라며 그들에게 하급 포션을 한 병씩 더 얹어주었고, 그들은 무척 좋아하며 포션병을 받아 나갔다.
모험가 길드의 요청이 있었다고는 해도 영지를 돕기 위해 저런 일에 나서는 그들을 보면 이 정도는 도와줘도 되지 않나 싶었다.
모험가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에야 간신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못 봐서 그런지 어찌나 수다스러운지.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벌써 중천에 뜬 해를 보니 아침을 먹을 시간은 없어보였다.
"아이린. 아침은 혼자서 먼저 먹으렴."
네. 주인님.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이린은 더 이상 전처럼 나를 구속하려 들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의 의존증 역시 많이 나아졌는지 내게 일일이 어디를 다녀오냐고 묻지 않았기에 나 역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에디스와 마리안이 영지에 있을 때의 아이린은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내게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혹시 두 사람이 떠나서 나아진건가?'
그건 너무 깊게 생각한거겠지. 곧 있으면 장마라 그런지 조금은 습한 날씨였다. 며칠 후에 장마가 시작되면 숲 속을 수색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질테니 앨리스가 조바심을 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렇게 영주관을 찾아가던 도중, 신전 앞을 지나가며 나는 잠시 멈춰섰다. 마리안이 떠난 신전은 어딘가 휑한 느낌이었다.
마리안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던 성기사들과 그녀를 돕기 위한 수녀들이 모두 사라져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원래 신전에 남아있던 수녀들은 변함없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비록 마리안은 없지만 전보다 훨씬 활기가 넘치는 신전의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주관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자연스럽게 길을 비켰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정원에서 바닥을 쓸고 있던 메이드가 나를 알아보고는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아가씨는 지금 방에서 쉬고 계시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아가씨를 불러오겠습니다."
그렇게 응접실로 안내받은 나는 다른 메이드가 타온 차를 홀짝이며 응접실을 둘러봤다. 이 곳은 지난번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기껏해야 전보다 먼지가 조금 더 쌓였다는 것 정도?
'바스티안 가문에 손님이 찾아올 일이 없으니 당연한건가?'
다른 귀족들과의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한 관광지로 상인들이 장사하기에 좋은 곳도 아니었기에 바스티안 가문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그렇게 응접실 옆에 놓인 사자 석고상을 만지작거리던 도중 앨리스가 들어왔다. 잠을 푹 잤는지 어제 남아있던 다크서클은 얼추 사라져 있었다.
"어제 주신 포션 덕분에 푹 쉴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앨리스의 감사인사에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적어도 어제보다는 얼굴에 혈색이 돌아보이는 모습에 안심했다.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뒀던 포션병들이 꽂혀 있는 케이스를 꺼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일반적인 하급 포션과 별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내용물은 냄새를 맡는 것 만으로 레드 혼 무리를 광기에 빠뜨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포션이었다.
"이게 그..."
"이걸 숲 입구 주변에 뿌리시면 냄새를 맡은 레드 혼 무리가 달려들겁니다. 유인하는 건 쉽겟지만 그만큼 흉폭해지니 조심해야 한다고 전해주십시오."
레드 혼은 기본적으로 선공을 가하지 않으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몬스터로서의 본능을 자극한 이상,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내 설명을 들은 앨리스는 조심스럽게 포션병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봤다.
"포션 안에서 희미하게나마 마나가 느껴져요."
원래부터 마나에 민감하고, 마나를 볼 수 있는 앨리스답게 포션 안에서 꿈틀대는 내 마나를 감지한 듯 했다.
"놈들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연금술만으로는 부족하니까요."
내 대답에 납득했는지 앨리스는 포션병을 다시 케이스에 꽂아놓았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황녀님과 성녀님이 떠나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서 걱정이었는데... 늘 신세만 지게 되네요."
앨리스는 허리를 완전히 숙여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귀족이 저렇게까지 예의를 차리는 일은 황제의 앞이 아니고서는 없지 않을까.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주었다.
"괜찮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요."
앨리스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했던 것처럼 터무니 없는 부탁도 아니었고, 내게 모든걸 먼저 털어놓고 솔직하게 도움을 구했다는 점에서 이런 일 정도는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었다.
더 이상 앨리스와 내가 남도 아니고, 마리안과 에디스가 영지에 머무르는 동안 내 편의를 꽤나 봐준 것도 앨리스였기에 그녀가 곤경에 처한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제국의 성녀와 황녀와 함께했기 때문인지 이제 어지간한 일로는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도움을 받아놓고 모르는 척 할 수는 없는걸요.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나중에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 때를 기약하도록 하죠."
앨리스는 내가 저택 정문까지 손수 나를 배웅해주었다. 직접 배웅해주러 나온 앨리스를 본 기사들이 조금 놀라워했지만 내가 정중하게 앨리스에게 허리를 숙이자 그 모습을 보고는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앨리스가 기사에게 시켜 포션을 가주에게 전달하고, 본격적인 작전을 펼치기까지는 적어도 서너 시간은 걸릴 것이다. 나는 그 전에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가서는 플라이 마법을 영창했다. 몸이 서서히 부유하는 감각과 함께 나는 남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 덕분에 순식간에 남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숲으로 들어간 레드 불을 통제하기 위해 병력을 차출했는지 성벽 위에는 좀처럼 병사들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은신 마법을 두르고 쉽게 성벽을 넘을 수 있었다.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플라이 마법을 영창한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바닥에 닿기 직전 몸을 멈출 수 있었다.
무사히 착지한 다음에는 대로를 달려나갔다. 마나로 강화한 육체는 순식간에 대로를 가로질렀고, 어느덧 숲과 이어지는 입구에 도착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기사들이 야숙을 하기 위한 천막들이 보였고, 그 중에서도 지휘관이 머무를 법한 큰 막사가 보였다.
괜히 저쪽으로 가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아침에 모험가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레드 혼이 많이 출몰한다던 오른쪽 숲으로 뛰어들어갔다.
숲의 안쪽에는 기사와 모험가들의 것으로 느껴지는 인기척이 잡혔다. 하지만 별다른 변화 없이 같은 곳을 천천히 맴도는 것을 보면 레드 혼을 만난 이들은 없어 보였다.
결국 그들을 지나쳐 숲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자 꽤나 거대한 생명체의 반응이 잡혔다. 레드 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인간보다는 훨씬 묵직한 덩치였다.
'...푸르...크릉."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가자 그곳에는 레드 혼 세 마리와 고블린 부락이 대치하고 있었다.
레드 혼들은 상처를 입었는지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고, 고블린들은 그런 레드 혼들의 덩치에 압도되었는지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있었다.
만약 레드 혼의 상태가 멀쩡했다면혼자서도 고블린들을 짓밟고 다녔겠지만 딱 봐도 몸이 성치 않았다.
아마도 레드 혼이 흘린 피냄새를 맡고 고블린들이 몰려왔던 모양인데, 이런 불편한 대치를 한지 꽤 오래 됐는지 주변에는 피냄새를 맡은 다른 몬스터들도 서서히 몰려오기 시작했다.
더 시간을 끌었다간 일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기에 나느 곧바로 고블린 부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차피 레드 혼 세 마리를 모두 잡을 생각은 없었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한 마리만 잡아가도 몇 달은 고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반항을 할 가능성이 높은 고블린 부락을 먼저 치기로 했다.
따로 검이나 무기를 챙겨오지는 않았지만 고블린 정도는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었다.
달려나가며 순식간에 영창을 끝내자 새하얀 마법진이 생겨나며 수많은 얼음화살들이 고블린 부락에게 쏟아졌다.
난데없이 화살 세례를 받은 고블린들은 당황하며 도망치려 했지만 레드 혼들 때문에 뭉쳐있던 녀석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순식간에 얼음화살에 심장이나 머리를 관통당했다.
레드 혼들 역시 고블린들에게 일어난 이변을 눈치채고는 몸을 돌렸다.
하지만 딱 봐도 성치않은 몸으로 제대로 도망갈 수 있을리가 만무했고, 무리 생활을 하는 놈들이었기에 다른 놈도 쉽사리 동료를 버리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었다.
아직 남은 고블린 부락을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 전격 마법을 준비했다. 마음 같아서는 화염 마법으로 시원하게 불살라 버리고 싶었지만 이곳이 숲이었기에 참았다.
괜히 화재를 일으켰다간 기사단이나 모험가들이 수상하게 여길 수 있었다. 영창이 끝나는 순간 손을 앞으로 내밀자 찬란한 금빛의 마법진이 그려지며 거대한 번개가 고블린들을 향해 쇄도했다.
"키에에엑!"
"캬아아악!"
놈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몸을 버둥거리며 도망쳤지만 아까 얼음화살이 발사되는 순간 줄행랑친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번개에 통구이가 되어버렸다.
조금은 역겨운 살점이 타는 냄새에 고개를 돌린 나는 아직 도망가지 못하고 있는 레드 혼에게 다가갔다.
놈은 쓰러지기 직전에도 눈을 번뜩이며 나를 향한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곱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마음가짐에 조금은 감탄했다.
녀석의 동료인 다른 두 녀석도 녀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곁에 남아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눈물겨운 우정이라고 칭찬해주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녀석은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틀거리면서도 거대한 뿔을 앞세워 내게 달려든 놈에게 방금 전 고블린에게 먹여준 번개를 녀석의 얼굴에다 갈겼다.
번쩍이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머리 부분이 완전히 노릇노릇하게 익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