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화 (198/260)

나는 녀석의 몸통이 상한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 일부러 몸통을 노리지 않고 정면에다 마법을 발사한 것 역시 도축하기도 전에 레드 혼의 고기가 상하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녀석의 가죽은 질기지만 전격 마법으로 속까지 익어버리면 고기의 품질이 순식간에 망가져버린다. 다행히도 머리와 뿔을 제외한 부분에 문제는 없어보였다.

순식간에 동료가 제압하자 남은 두 마리의 레드 혼은 눈치를 보며 물러섰다. 제아무리 동료 의식이 강하더라도 순식간에 제압당한 것을 보고는 전투 의지를 상실한 듯했다.

나는 굳이 남은 두 마리도 잡을 생각이 없었기에 쫓지 않았다. 어차피 좀 있으면 내가 만든 포션의 냄새에 이끌려 숲 밖으로 뛰쳐나갈 놈들이었다.

그보다도 쓰러진 이 녀석을 어떻게 옮길지가 문제였다.

아공간 주머니를 챙겨오긴 했지만 무게와 덩치를 고려했을때 모두 다 들고가는 것은 무리에 가까웠다. 결국 나는 주머니칼을 꺼내 칼날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희미한 푸른 빛을 머금은 칼로 녀석의 뿔을 잘랐다. 수많은 모험가들의 갑옷을 들이받고도 흠집 하나 없는 뿔이었지만, 이제는 그 위용을 잃고 초라하게 바닥에 떨어졌다.

잘린 뿔을 들어올리자 꽤나 묵직했다. 어쩌면 나중에 세공 작업을 할 때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단순한 짐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래도 뿔을 잘라내자 평범한 소보다 조금 큰 크기의 레드 혼이었기에 아슬아슬하게 아공간 주머니 안에 밀어넣을 수 있었다. 레드 혼을 담은 아공간 주머니를 옆구리에 차자 숲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블린들의 비명과 땅을 뒤흔드는 굉음. 레드 혼뿐만 아니라 다른 몬스터들도 피냄새에 이끌리듯이 숲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놈들은 피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다행히 이미 준비를 마쳤는지 숲의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은 무리없이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기사들 옆에서는 활을 쏘거나 마법을 발사하는 것으로 협력하고 있는 모험가들도 있었다.

칼날같은 바람이 날아가며 몬스터들의 몸을 가죽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런 변방의 영지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적었고, 특히 저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었다.

'안젤리카.'

그런 안젤리카의 곁에 서 있는 제시카는 언니를 지키기 위해 옆에 붙어서 전투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몰려들 몬스터를 대비한 태도였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가 이끄는 기사단답게 그들은 한 마리의 몬스터도 흘리지 않았고, 레드 혼을 비롯한 몬스터들을 순조롭게 토벌해나갔다.

생각보다 숲에 있던 몬스터의 숫자가 많았기에 걱정했었는데,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기사단은 몬스터들을 능숙하게 퇴치했다.

고블린과 레드 혼의 시체들이 산처럼 쌓였고,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완전히 상황이 정리되기 전에 나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 예상보다 효과가 좋아서 레드 혼 뿐만 아니라 숲 깊숙한 곳에 있던 온갖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의외였지만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영지 안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어제 찾았던 푸줏간을 다시 찾았다.

예전 모험가로 활동했을 때 짐승이나 몬스터의 해체는 내가 했었다. 당연히 레드 혼을 도축하는 법도 알고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집에는 레드 혼을 눕혀놓고 도축할만큼 공간이 없었다.

무엇보다 집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악취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푸줏간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자는 한창 정육도로 고기의 부위를 발라내고 있었다. 나를 알아본 그는 정육도를 쥔 손을 놓았다.

"무슨 일로 다시 오셨습니까? 혹시 피가 모자라셔서 더 오신건..."

"아닙니다. 오늘은 다른 용건이에요. 우연찮게 몬스터의 시체를 입수했는데 이걸 도축해줄 수 있는가 싶어서요."

"몬스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겁니까?"

여기서 레드 혼을 불러낼 수는 없었기에 나는 칸막이를 열고 주인장이 있는 곳으로 넘어갔다.

질긴 가죽장화를 신고있는 주인장의 발 밑에는 도축을 하며 흘러나온 피웅덩이들이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아공간 주머니를 뒤집고 내용물을 털어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레드 혼의 시체가 쿵하고 바닥에 떨어지자 그는 깜짝 놀라서는 뒤로 두 걸음이나 물러섰다.

"이건..."

그의 눈길은 뿔이 잘린 흔적이 남아있는 레드 혼의 머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레드 혼이라는 몬스터입니다. 최근 영지 밖에서 자주 출몰하는 녀석으로, 도축 방법은 소와 같습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가죽이 소보다 질기고, 힘줄이 잘 끊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소와 다를 바 없었다.

"무, 물론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걸릴텐데..."

"그럼 나중에 찾으러 오겠습니다. 내장이나 근육은 다 버리셔도 되고, 고기만 분리해 주십시오."

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다는 대답을 듣고 나왔다. 정화 마법으로 신발에 튄 핏기를 씻어냈다.

남은 시간 동안 어디서 뭘 해야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오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가까운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 때가 이미 지났고, 모험가들의 대부분은 영지 밖에 나가있는 시간이었기에 식당 안은 한적했다.

식당 한 켠에 자리를 잡자 아이린 또래로 보이는 여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주문은 어떤걸로 하시겠어요?"

"돼지 통구이 정식 하나랑 샐러드 추가로 부탁할게요."

"알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내 주문을 종이에 메모한 소녀는 주방으로 달려갔다. 식당 안에는 나 말고도 한 테이블이 더 있었지만 넓은 식당의 자리들에 비하면 조금 초라하다고 생각됐다.

예전에는 늘 다른 모험가들로 가득차서 떠들썩한 식당에서 식사했기에 지금의 이런 고요함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최근에는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아이린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필요한 것은 없는지, 혹시나 불편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달라고 해도 아이린은 그런 것은 없다면서 오히려 지금의 생활에 크게 만족하고 있다고 할 뿐이었다.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을 보면 절로 마음이 치유됐다.

아이린 생각을 하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정식이라는 이름답게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빵과 스프였다.

스프는 평소에 만들어먹는 옥수수 스프와 별반 차이가 없었고, 빵은 크루거의 가게에서 파는 것만 못했다.

중요한 것은 메인디쉬였다.

커다란 접시에 담긴 돼지고기를 나이프로 썰고, 포크로 찍어 먹으니 진한 기름기가 흘러나왔다. 그 다음에는 샐러드를 한 입. 아삭아삭한 샐러드가 입 안에 맴돌던 진한 기름 맛을 조금은 지워주었다.

담백하고 향신료가 적게 들어간 것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어차피 남은 시간 동안 따로 갈 곳도 없었기에 느긋하게 수저를 움직였다.

입 안에는 감칠맛이 맴돌고 있었다. 샐러드와 함께 먹으니 생각보다 괜찮아서 나도 모르게 접시를 대부분 비워버렸다. 시계를 확인했지만 아직도 한 시간이 넘게 남아있었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어떻게 때워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가게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요!"

아까 내게 주문을 받으러 왔던 소녀가 미소를 머금고 손님에게 인사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이번에 들어온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리를 잡다가 나를 알아봤다.

"루디 씨?"

벌써 정리가 끝났는지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제시카와 안젤리카였다. 두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합석해도 되죠?"

"그런 말은 앉기 전에 하는 겁니다."

내 핀잔에도 제시카는 키득대며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건 안젤리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안젤리카는 쓰고 있던 고깔모자를 벗어 옆에 내려놓았다.

마력 순환을 도와주는 도구라고는 해도 이런 더운 날씨에 모자를 쓰고 있으면 땀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안젤리카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훑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을 본 제시카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두 사람은 각각 샐러드 정식과 돼지고기 통구 정식을 하나씩 시켰다. 제시카는 자신의 언니에게 제대로 먹지 않으면 쓰러진다고 걱정했지만 안젤리카는 희미하게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제시카 씨는 조금 살이 붙은 것 같은데요. 너무 잘 먹으신거 아닙니까?"

그냥 가볍게 던진 말이었는데 정곡을 찔렸는지 제시카가 곧바로 반응했다.

"아, 아니거든요! 조금 허벅지가 굵어지긴 했지만 살이 찐건 아니라구요! 애초에 갑옷도 받쳐입고 있는데 그런건 어떻게 아시는거에요?!"

모험가로 활동하다보면 팔이나 허벅지에 근육이 잡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허벅지 굵다는 말을 듣기 좋아할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글쎄요. 언니 쪽은 오히려 전보다 좀 더 마른 것 같은데..."

철제 갑옷을 받쳐입고있는 제시카와 다르게 안젤리카는 몸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와 창백한 피부는 남자들에게 보호욕구를 일으키기에 충분해보였다.

"으으..."

제시카는 부정할 수 없었는지 입술을 삐죽대며 나를 흘겨봤다.

"어떻게보면 이게 다 루디 씨 때문이잖아요!"

갑자기 나를 걸고 넘어지다니.

"왜 그게 저 때문입니까?"

"루디 씨가 지난번에 언니한테 먹인 포션을 마신 뒤로 언니가 밥도 안 먹고 마법 연구에만 매진했단 말이에요! 저랑 잘 놀아주지도 않고!"

"어린애도 아니고 함께 놀 시간은 이미 지났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랬군요."

지난번에 에디스와 이야기할 때 도움을 줬던 안젤리카에게 보답으로 마나 포션을 하나 줬었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새로운 경지를 엿본 모양이다.

마법사들이 하루종일 마탑에서 연구에 전념하는 이유가 저것 때문이었다.

새로운 경지를 이룩했을 때의 충족감과 희열감. 그것을 잊지못해 계속해서 마나를 다루는 것을 연습하고 새로운 마법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아까 숲에서 나올 때 봤던 안젤리카의 마법 위력이 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다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

가끔씩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구 저질러대는 얼간이들도 있는데, 다행히 안젤리카는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다루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마나 포션을 마시기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몸 안의 마나는 깔끔하게 갈무리 되어 있었고 불순물이 섞인 흔적도 없었다. 말 그래도 피를 토할 정도로 지독한 연습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리라.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안젤리카가 입을 열었다. 어딘가 공허하던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 동생의 말대로 최근에는 잠도 자지 않고 마법 수련만 했어요. 마나 포션을 마시고 여관에 돌아오니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느껴졌어요."

마법사가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것은 뱀이 허물을 벗는 것과 같다.

자신의 육신이 가지고 있던 제약을 풀고, 마나를 다루는 것 역시 전혀 새롭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내가 준 포션으로 효과를 봤다는데 기분이 나쁠리가 없었다.

 "조만간 찾아가서 감사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만났네요."

"저를 도와주신 보답으로 드린 물건인데 감사까지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나 포션의 효과를 톡톡히 보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마나포션을 줬다고 하더라도 같은 효과를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효과를 볼 수 없을 뿐더러, 내가 마나포션을 주지 않았더라도 안젤리카는 언젠가 자신이 막혀있던 부분을 뚫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마나 포션은 그녀에게 있어 그 시기를 조금 당겨주는 것에 불과했다.

소녀가 요리가 담긴 접시를 들고오며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안젤리카는 샐러드와 함께 빵을 먹었고, 제시카는 복스럽게 돼지 통구이 정식을 먹어치웠다.

사실 제시카가 그렇게 살이 찐 것은 아니었다. 저렇게 먹더라도 어차피 몬스터들과 전투를 하거나 탐험을 다니면 살이 찔 수가 없었다.

모험가들 중에서는 오히려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 마른 사람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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