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화 (199/260)

매일같이 꾸준히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을 위해 체중 조절도 모험가들의 컨디션 관리중 하나에 들어갔다.

"마법 연습도 좋지만, 몸 관리도 하십시오. 육체가 받쳐주지 않으면 강한 정신력도 의미가 없으니까요."

"...새겨듣도록 할게요."

그제서야 샐러드를 깨작거리며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하던 안젤리카는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지난번 마나 포션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 말은 고분고분 잘 들었다.

대충이나마 내 마법 실력에 대해서도 짐작하고 있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마나 포션을 만들 수 있을 정도면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보장되니 당연한건가.'

제시카는 언니 몰래 내게 엄지를 척 올렸다.

정반대인 자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잡담을 나누다보니 어느새 두 시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벌써 가시게요?"

"선약이 있어서 말입니다. 다음에 가게에 찾아오시면 차를 대접할테니 그 때는 좀 더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도록하죠."

선약이 있다는 말에 제시카는 아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안젤리카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했다.

"알았어요. 마침 오늘 있었던 일도 들려주고 싶었고, 나중에 찾아갈게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나중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식당에서 나와 푸줏간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식당에서 나오니 어느새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물을 머금은 공기가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일 년에 일주일 정도는 정말 미친듯이 비가 쏟아지곤 했다. 그 시기가 멀지 않았다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투둑. 투둑하고 가느다란 빗줄기가 내 어깨를 적셨다.

모험가들도 한동안 영지 밖으로 나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장마가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푸줏간으로 돌아가자 가게 안에는 피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양 손의 장갑이 피로 물든 그는 나를 보고는 고기가 담긴 자루를 건넸다.

"말씀하신대로 내장과 머리를 제외한 부분을 모두 해체한 양입니다. 꽤나 무게가 나갑니다만..."

나는 그 자루를 아공간 주머니 안에 통째로 집어넣었고, 말을 하던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습니다. 이건 그 답례입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내가 차고 있던 돈주머니를 탁자에 올렸다.

그는 괜찮다며 어제 받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했지만 나는 기어코 돈주머니를 그에게 주고 나왔다.

이것은 일종의 입막음 비용이었다. 조금 후면 영지 내에도 레드 혼을 토벌했다는 소식이 퍼지게 될텐데, 그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떠벌리고 다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번에 1급 시민증을 보여줬을 때의 반응을 생각하면 그렇게 입이 가벼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뭐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푸줏간에서 나왔을 때는 비가 한창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보니 벌써 이 영지에 내려온지도 일 년이 다 되어 간다는 것이 실감났다.

내가 처음 바스티안 영지에 도착했을때도 지금처럼 비가 쏟아졌었다.

'당분간은 가게 문을 닫아도 되겠네.'

모험가들도 이런 장마에는 얌전히 여관에 틀어박혀서 휴식을 취하는게 대부분이었고, 가끔 정신나간 놈들은 홍등가에서 날밤을 새는 경우가 있었다.

어느 쪽이든 이런 비를 뚫고 영지 밖을 돌아다니는 녀석은 없었다.

내게 있어서는 희소식이었다.

장마가 없었다면 이번 주말이 되고 나서야 릴리스를 보러갈 수 있었는데, 장마 덕분에 뜻밖의 휴가를 얻게 된 셈이었다.

트라다 쿠스만의 저택에서 머무르며 아이린의 성장에 대한 자료나 서큐버스에 대해 기록해놓은 서류가 있는지 꼼꼼하게 찾아볼 계획이었다.

무엇보다도 릴리스가 나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테니 늦지않게 얼굴을 비춰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모네가 릴리스를 제어한다고 하더라도, 릴리스의 성격상 얼마 못 가서 뛰쳐나올 것이 분명했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와 함께 자리를 펴고있던 노점상들은 황급히 물건을 정리했고, 이제 막 돌아온 것으로 보이는 모험가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황급히 다른 건물로 들어갔다.

그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비는 더 이상 그칠 생각도 않고 게걸스럽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올 때는 온 몸이 비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쫄딱 젖은 내 모습을 본 아이린이 깜짝 놀라서 달려나왔다. 아이린은 들고온 수건을 내밀었고, 나는 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았다.

"주인님! 어쩌다 이렇게 젖으신거에요!"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더구나. 슬슬 장마가 올 때도 됐고, 일주일 정도 가게를 쉴 생각이란다."

가게를 쉴 거라는 말에 아이린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쉬는 동안에는 주인님이랑 둘이서..."

"그래서 장마기간 동안은 지난번에 갔었던 트라다 쿠스만의 저택에서 휴가를 보낼 예정이란다. 아이린 너도 괜찮겠니?"

내 말에 아이린은 잠시 얼굴이 굳었지만 금세 평소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아이린과 둘이서 느긋하게 노닥거리고 싶었지만 그녀의 몸상태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일주일 중 나흘 정도만 저택에서 지내고, 남은 사흘 정도는 가게에서 푹 쉬자꾸나."

결국 내가 정한 타협점은 이 정도였다. 어차피 저택의 자료를 모두 뒤지는데도 나흘까지 걸리진 않을 것이다.

한동안 고생한 아이린에게도 쉴 시간을 주고, 나 역시 느긋하게 여유를 만끽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제서야 아이린도 기뻐하며 내 품에 안기려 들었지만, 나는 그런 아이린을 제지했다. 비에 쫄딱 젖은 상태로 아이린을 안았다간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결국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비에 젖은 옷을 벗어 욕실 한 구석에 치워두고 뜨거운 물을 틀어 머리를 적셨다.

아마 내일 저택에 도착하면 릴리스는 나를 죽이려 들겠지. 자주 찾아오겠다고 했는데도 거의 한 달이 넘게 오질 않았으니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기 직전일 것이다.

그렇게 그 날은 릴리스가 좋아할만한 선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결국 내 예상대로 빗줄기는 새벽내내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창 밖을 보자 거센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며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장마가 계속되는 일주일 동안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

바람소리에 먼저 깼는지 아이린은 가게 중앙에 놓여있는 소파 위에 앉아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앗. 주인님. 일어나셨어요?"

"아이린 너도 벌써 일어났구나. 조금 더 자도 되는데."

나는 선반에서 쿠키를 꺼내 접시에 담고, 평소에는 잘 마시지 않는 레몬티를 끓였다. 향긋한 향기를 풍기는 레몬티 두 잔과 쿠키가 담긴 접시를 들고 아이린의 옆에 앉았다.

내게 찻잔을 건네받은 아이린은 평소처럼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차를 호호 불었다.

입을 오므려 뜨거운 차를 호호 불어 마시는 아이린의 모습은 아기 고양이 같아서 귀여웠다.

그러고보니 아이린은 고양이 혀였던가. 매운 것이나 뜨거운 것을 먹으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호호 불어서 먹곤했다.

아기 고양이같다는 생각을 하자 어쩐지 아이린의 머리에 고양이 귀가 있는 것 같은 환각마저 보였다.

'성격만 봤을 때는 고양이 보다는 강아지에 가깝겠지만.'

내가 아이린을 부르면 늘 웃는 얼굴로 달려오고, 내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사실 고양이든 강아지든 아무런 상관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아이린은 아이린일 뿐이니까.

"...그런데 주인님. 지난번의 그 저택에 가려면 빗속을 뚫고 숲을 지나야하는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이린이 걱정스레 묻자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제는 익숙하게 머리를 내밀어 내 손길을 즐기는 아이린은 무척 행복해보였다.

"굳이 직접 걸어갈 필요는 없단다. 지난번에 저택에 마법진을 새겨놨으니 텔레포트 마법으로 단숨에 이동할 수 있거든."

물론 내가 트라다 쿠스만의 유산을 상속받으며 저택에 설치된 마법진을 뜯어고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래 트라다 쿠스만은 저택의 모습을 감추는 은신 마법과 허가받지 않은 이들의 침입을 막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은신 마법진은 건드리지 않는 대신 텔레포트 마법진을 조금 손봤다.

모네 역시도 마법진을 확인한 다음 문제 없다고 했고, 나도 몇 번이나 꼼꼼하게 확인했으니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겠지.

내 대답에 아이린은 안도하며 레몬티를 홀짝였다. 설마 이런 폭우를 뚫고 숲을 걸어다닐거라 걱정했던걸까.

차를 모두 마신 다음에는 저택에 가기전에 짐을 챙겼다.

며칠 동안 머무르며 갈아입을 옷과 모네와 릴리스에게 선물할만한 간식들, 그리고 내가 이때까지 서큐버스에 대해 알아낸 정보들을 기록한 수첩을 챙겼다.

아이린에게는 오랜만에 릴리스를 보기 위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아이린은 그런 내 말에 납득해주었다.

비록 며칠 안 됐지만 아이린과 릴리스는 함께 지낸적도 있으니 겉으로는 아웅다웅해도 생각보다 친한 모양이었다.

저택에 있는 자매들의 머릿수에 맞게 케이크를 상자에 담다보니 어느새 상자가 가득찼다. 그리고 릴리스의 분노를 풀어줄만한 선물도 따로 하나 챙겼다.

이걸로 화를 풀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마땅히 떠오르는 다른게 없었다.

아이린은 갈아입을 옷을 제외하고는 저택에서 읽을만한 책을 몇 권 챙겼다. 최근 아이린이 푹 빠진 연애 소설들이었다.

 나는 내 방의 바닥에 트라다 쿠스만의 저택과 연결된 마법진을 새겼다. 그렇게 마법진을 완성한 다음에는 챙겨놓은 짐을 마법진 위로 옮기고, 아이린을 불렀다.

일반적인 텔레포트 마법이라면 마법진을 그리고 짧은 영창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트라다 쿠스만이 숨겨놓은 저택이었기에 평소보다 정신을 집중한채로 마법 술식을 중얼거렸다.

텔레포트 마법은 거리가 멀수록 영창의 길이가 길어지고, 마나의 소모량도 증가하기에 내 몸에서 마나가 계속해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 정도는 지난번 릴리스의 자매들과 한꺼번에 계약했을 때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그 때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한계까지 마나를 끌어냈으니까. 조금이지만 그 뒤로 체내의 마나량이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영창이 거의 마무리되자 나는 아이린의 손을 잡았다.

"어지러울 수도 있으니 눈을 감으렴."

내 조언대로 아이린은 눈을 감았다. 마침내 영창이 끝나는 것과 함께 바닥의 마법진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수도에 있던 텔레포트 게이트를 탔을 때와 비슷한 몸이 부유하는 감각과 함께 감고있는 눈 너머로 공간이 어그러지는 것이 상상됐다.

약간의 어지럼증과 함께 다시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지난번 릴리스의 자매들과 계약을 했었던 방에 도착해 있었다.

다행히도 아이린과 짐도 무사히 이동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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