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린은 텔레포트의 후유증으로 약간 다리를 비틀거리며 어지러워했지만, 그녀의 어깨를 잡아주며 심호흡하라고하니 금세 괜찮아졌다.
잘 쓰지 않는 방일텐데도 꾸준히 관리를 하는지 깔끔했다. 당장 내 가게의 창고도 사흘만 내버려놔도 먼지가 잔뜩 쌓이는데 말이다.
챙겨온 짐을 등애 매고, 방에서 나가려하자 문 너머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정체가 누군지는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오빠아아아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들어온 릴리스는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번뜩이는 눈빛은 조금 무서울 정도였지만 자주 찾아오겠다고 약속해놓고 그걸 지키지 않은 것은 나였기에 얌전히 그런 릴리스를 받아냈다.
"정말이지! 자주 오겠다고 해놓고 너무 늦잖아!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미안미안. 예상 외로 일이 너무 많았어. 한 번만 봐주라."
내 가슴팍을 두드리는 릴리스의 주먹에 실린 힘은 아이린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대로 조금만 더 얻어맞으면 장기가 뭉개질 것만 같았는데, 다행히도 그러기 전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릴리스. 그만하세요. 주인님에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있었을겁니다."
모네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릴리스의 주먹을 쥔 손이 잠시 멈췄다. 그래도 이번에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릴리스는 뺨을 부풀렸다.
"하지만 모네도 거짓말은 나쁜거라고 그랬잖아!"
설마하니 릴리스가 정론을 들고 나올 줄은 몰랐는지 모네가 쓰고있던 안경을 검지로 살짝 밀어올렸다.
나 때문에 괜히 두 사람이 싸우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나는 손을 흔들어 다시 입을 열려는 모네를 제지했다.
"모네. 이번에는 내가 잘못한거니까 그냥 릴리스가 원하는대로하게 해줘. 난 괜찮으니까."
"...주인님이 그러시다면."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릴리스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내밀었다.
'사실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티도 안나긴 하지만.'
그래도 방금 일로 화가 조금은 풀렸는지 더 이상 나를 때리지는 않았다. 만약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내게 투닥거리던 릴리스는 그제서야 내 뒤에 서 있던 아이린을 보고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고보니 릴리스는 아이린이 성장한 모습을 보는건 처음이었지.
아이린이 급성장을 하기 전에는 릴리스와 키가 비슷했는데 이제는 손 한 뼘 가까이 차이가 났다.
릴리스는 눈 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는지 아이린을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린?"
릴리스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린은 자신의 우월한 신체를 과시했다. 평소에는 늘 겸손하고 예의바른 아이린이었는데, 이상하게 릴리스만 만나면 이랬다.
아마 일종의 경쟁심리 때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아이린의 그런 태도는 릴리스에게 꽤나 치명상을 입혔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린의 가슴은 이제 겉으로 봐도 봉긋 솟아올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에 반해 빨래판에 한없이 가까운 릴리스는 앞으로도 성장 가능성이 전무한 안타까운 몸이었다.
물론 영원히 늙지 않는 불사의 몸을 가졌다는 것은 매우 큰 메리트였지만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은 아이린 앞에서 그런 장점을 어필해봤자 아무런 효과도 없을게 분명했다.
릴리스는 여러모로 자신보다 커진 아이린을 보고는 눈을 깜박이더니 내게 고개를 돌렸다.
"오빠! 오빠가 저렇게 만든거야?"
아마 내가 마법이나 포션을 이용해서 릴리스의 몸을 키워줬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에 대해 아는바가 전무했다.
그걸 알고 있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내가 고개를 젓자 릴리스는 아이린의 기고만장한 태도가 분한지 입술을 짓씹었다.
"씨잉..."
조금만 더 갔다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았기에 나는 릴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기로 했다.
"괜찮아. 릴리스 너는 너만의 매력이 있으니까 굳이 다른 사람을 질투할 필요는 없어."
"...진짜지? 어린애 같은 몸이라고 싫어하는거 아니지?"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물론 릴리스의 몸은 단순한 취향의 범위를 벗어나 페도필리아로 오해받기 좋은 체형이었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만큼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짓자 릴리스는 울먹거리는 것을 멈추고 나를 끌어안았다. 가까이서 봐도 역시 조각상 같은 미모였다.
수도에서 우연히 들어갔었던 박물관에 새겨진 여신의 조각상이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아름다울지도.
릴리스의 화를 완전히 풀어주기 위해 나는 따로 챙겨뒀던 비밀병기를 꺼내들었다.
지난번 마리안과 에디스가 떠나는 날 나는 새벽 늦게 그녀들에게 선물한 장신구의 세공을 마쳤다.
하지만 지금 잠들었다가는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고, 가만히 앉아서 시간을 떼우기에는 지루했기에 남은 재료들로 간단한 장신구를 하나 더 만들었었다.
마리안과 에디스의 것처럼 마법을 부여하고, 온갖 정성을 들여 화려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석 본연의 모습을 최대한 잃지 않도록 깎아냈다.
붉은 빛의 루비와 투명한 수정을 합쳐서 불투명한 붉은색으로 빛나게 만들었다. 남은 재료로 만든 것이었기에 목걸이나 팔찌처럼 큰 것도 아니었고, 최대한 가볍게 만들 수 있는 귀고리로 정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쌍의 귀고리는 릴리스의 머리카락처럼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반짝였다.
이걸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릴리스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어때. 릴리스 널 위해 만든 귀고리야."
고급스런 함에 담긴 귀고리를 본 릴리스는 눈을 반짝이더니 양 손으로 한 쌍의 귀고리를 들었다.
"...정말 날 위해서 만든거야?"
사실은 시간이 남아서 심심풀이로 만든 것에 불과했지만, 이런 선의의 거짓말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굳이 진실을 말해서 모두가 상처를 받을 필요는 없지않은가.
"물론이지. 마음에 들어?"
"응! 앞으로 계속 차고 다닐게!"
그렇게 말하며 릴리스는 곧바로 귀고리를 차려고 했지만 모네가 그런 릴리스를 말렸다.
"릴리스? 아직 귀도 안 뚫어놓고 무슨 귀고리를 끼겠다는거에요?"
한 번도 귀고리를 착용해본 적이 없었던 릴리스는 그런 맹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모네에게 보채기 시작했다.
"모네. 귀 뚫는 법 알지? 어서 뚫어줘! 조금이라도 빨리 오빠가 준 귀고리를 차고 싶은걸!"
"...하아. 어쩔 수 없네요. 우선은 릴리스를 데려가겠습니다. 주인님."
모네는 쓴웃음을 지으며 앞장서서 방을 나갔다.
"그래. 나는 일단 서재에 갈 생각이니까 나중에 보자."
"금방 돌아갈게. 오빠!"
방금 전 아이린에게 패배한 기억은 말끔히 사라졌는지 좋아서 방방 뛰어대는 릴리스도 모네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다행히도 귀걸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내가 늦게 찾아온 것에 대한 화도 완전히 풀린 것 같았다.
'이거 만들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만들었는데,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그렇게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은 아이린이 있었다. 늘 해맑은 미소를 짓는 아이린만 보다가 저런 모습을 보니 조금 신선했다.
"왜 그러니. 아이린?"
혹시 내가 릴리스 편을 들어서 삐진 것인가 싶었는데,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지난번 손님들한테도 장신구를 선물하시고, 릴리스한테도 주시면서......"
뾰루퉁하게 중얼거리는 아이린의 말을 듣고나서야 그녀가 삐진 이유를 깨달았다. 한 마디로 남들은 다 받았는데 자신만 선물받지 못해서 저러는 것이었다.
하긴. 다른 누구보다 나와 오랫동안 지냈던 아이린에게도 당연히 선물을 해주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나중에 돌아가서는 너한테 어울리는 것도 하나 선물해주마."
"...정말요?"
"그래. 네가 이때까지 날 도와준게 얼만데 그 정도도 못해줄리가 있겠니. 혹시 받고 싶은 장신구가 있다면 미리 말해보렴."
아이린이 갖고 싶은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꽤나 기합을 넣어서 만들어 보기로 했다. 어떤 것을 만들지 미리 머릿속으로 그려놓기 위해 원하는 부위를 묻자, 아이린은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저기...그...반지요..."
스스로도 말하기 부끄러운지 자꾸만 빼던 아이린은 내가 똑바로 쳐다보자 그제서야 진심을 말했다. 반지라는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멈칫했다.
일반적으로 반지를 선물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린 역시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결국에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정말로 반지로 괜찮겠니?"
아이린은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눈을 보이며 대답했다.
"...네. 반지가 좋아요."
평소의 아이린이었으면 부끄러움을 못 이기고 다른걸로 바꿨을텐데, 이번만큼은 아이린도 물러나질 않았다. 방금 전의 릴리스를 본 영향일까.
"그래. 네가 그렇다면 반지로 만들어주마."
사실 다른 사람들이 아이린이 반지를 끼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슨 소리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그 반작용으로 아이린에게 찝적거리던 놈들이 떨어져 나갈수도 있으니 긍정적인 효과도 기대해볼만 했다.
'그래. 뭐 연인들끼리 같이 끼는 커플 반지도 아니고, 단순히 반지를 선물하는 것일 뿐...일리가 있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반지를 선물하는 것은 그런 쪽으로의 의미밖에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순수한 아이린을 상대로 그런 생각을 하면 죄를 짓는 것만 같아 머리를 흔들어 머릿속을 맴도는 불순한 상상을 떨쳐냈다.
방금 전의 대화 때문에 아이린과 나는 조금 어색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걷고 있었다.
아이린도 평소처럼 내 손을 잡거나 딱 달라붙어서 걷는게 아닌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희미하게 홍조를 띤 얼굴을 한 아이린은 중간중간 나와 시선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려버렸다. 부끄러워하는 아이린의 모습도 귀여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머릿속은 복잡했다.
설마, 절대로, 분명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아이린이 내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이린의 몸을 힐끔 훑어봤다. 비록 말투나 얼굴에서는 앳된 모습이 남아있었지만 체격으로만 봤을 때는 어지간한 성인 여성과 비교해도 차이가 없었다.
정신적으로는 물론 또래 애들보다도 훨씬 성숙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