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2화 (202/260)

'고기를 똑같이 구워도 맛은 전혀 다르니까.'

모네가 고기를 맛 없다고 생각한 이유는 제대로 피를 빼지도 않고, 향신료 하나 없이 고기를 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준비한 고기들은 이미 다 가공이 되어 있고, 아공간 주머니 안에는 혹시 몰라 챙겨온 소금과 후추같은 향신료들도 듬뿍 들어 있었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먼저 기름이 든 병을 꺼내 모네에게 건넸다.

"모네. 부엌에 있는 가장 큰 판에다가 기름을 부어서 불 위에 올려놔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식기의 위치를 일일이 모네에게 물어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지시하는게 훨씬 더 수월하다.

"아이린. 내가 썰어낸 고기에 향신료들을 골고루 뿌려주렴."

"네!"

아이린의 활기찬 대답을 듣고나서는 요리를 하는 동안 옷이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렸다.

다음에는 부엌의 찬장에 꽂혀있던 칼을 들고 큼직큼직한 고기 덩어리들을 썰어냈다.

이대로 굽기에는 고기 덩어리가 너무나도 컸기에 절반 정도로 썰어냈다.

평소에는 고기가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잘라내서 구웠지만 이번에는 사람의 머릿수가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고기를 썰어 접시에 담으면 아이린은 내가 꺼내놓은 소금, 후추, 허브를 순서대로 뿌렸다.

"주인님. 슬슬 예열이 다 되었습니다."

때마침 준비를 마친 모네에게 릴리스가 고기가 담긴 접시를 건넸고, 모네는 접시에 놓인 고기를 그대로 판에 털어넣었다.

고기가 기름에 닿는 그 순간 지글지글거리며 고기가 익는 소리와 함께 특유의 냄새가 부엌에 가득 퍼졌다.

모네는 지난번에 맡았던 고기 냄새와는 전혀 다른 냄새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어때? 잡내가 하나도 없지?"

"...확실히 그렇군요. 혹시 방금 전에 뿌리신 것들 덕분입니까?"

"향신료 덕분도 있지만, 단순히 살점을 잘라내는 것만으로는 잡내를 뺄 수 없으니까. 나중에 제대로 도축하는 법을 가르쳐줄게."

비록 영지 안에 있을 때는 장소가 없었기에 직접 도축할 수 없었지만 이곳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 없는 숨겨진 저택이었다.

모험가로 활동하며 온갖 들짐승들과 몬스터들을 도축한 경험이 있는 나였기에 이런 쪽의 노하우도 상당했다.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전(前) 주인님이 계실 때는 몇 번인가 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맡았던 냄새가 지금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비록 먹지 않아도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다고는 해도, 맛있는걸 먹는 즐거움은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 앞으로 자매들이랑 식사할 때도 기왕이면 맛있는걸 먹는게 좋잖아?"

좋아하는 사람이랑 함께 맛있는걸 먹는 기쁨은 지친 삶을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되어주는 법이다.

 고기를 쉬지 않고 계속 썰다보니 어느새 접시 위에는 내가 썰어내고, 아이린이 간을 맞춘 고기들로 가득찼다.

"다른 자매들도 부를까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고기를 본 모네가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 식사부터는 자매들한테도 요리를 가르치겠지만, 이번에는 우리끼리 서프라이즈로 하자고."

사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이지 힘든 일은 아니었다.

릴리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자제심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집에서 머무를 때는 매일같이 고기반찬에 갓 구운 빵을 먹다가 이곳에 돌아와서는 다시 야채만 먹었다니.

물론 나도 야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쓰는 법이었다.

고기를 구우며 냄새가 퍼졌기 때문인지, 지난번에 계약을 하며 스쳐가듯이 봤었던 릴리스의 자매들은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확실히 기름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의 냄새는 폭력적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렬한 향이었다.

순식간에 늘어난 자매들은 아이린과 모네가 나를 도와 요리하는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서프라이즈는 완전히 물 건너가버렸구만.

"혹시 릴리스가 어딨는지 아는 사람?"

곧바로 한 소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다른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성숙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얼굴은 약간 앳되어 보이는게 귀여움과 섹시함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저요! 아까 지하에 내려가는 걸 봤어요!"

저택의 지하라면 창고와 서재 정도였다. 아마도 나를 만나러 갔다가 길이 엇갈린 모양이다.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몰려든 이상 슬슬 상을 차려야했다.

"다들 그렇게 몰려있지말고 자리에 앉아 있어. 금방 가져다줄테니까."

내 지시에 따른 그녀들은 얌전히 식탁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군데군데 빈 자리가 있는 것을 보면 정해진 자리가 있는 것 같았다.

모네가 구워놓은 고기 네 덩어리를 다시 한 번 잘라냈다.

접시에 담기 적당한 크기로 잘라낸 고기를 접시에 옮겼다.

그리고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는 자매들의 앞에 접시를 세팅해주자 그녀들은 눈을 반짝이며 양 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들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멈췄다.

""주인님은 안 드시나요?""

아무래도 메이드인 자신들이 먼저 식사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있다 먹을테니 그런거 신경쓰지말고 먼저 먹어."

""...그럼.""

내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들은 능숙하게 나이프로 두툼한 고기를 썰어내고, 포크로 썰어낸 고기를 찍어먹었다.

자연스러운 행동들에도 하나같이 기품이 깃들어있는게, 트라다 쿠스만이 그녀들을 어떻게 교육시켰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벽에 등을 기댄채 그녀들의 반응을 살폈다.

고기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던 그녀들은 고기의 맛을 천천히 음미했고, 표정이 실시간으로 변해갔다.

'제대로 된 고기요리'를 먹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는지, 우아한 식사 예절과는 반대로 점점 빨라지는 손놀림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다들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이네."

"...꿀꺽. 고기가 이런 맛이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릴리스의 바로 다음에 만들어진 모네와 다르게 이 자매들은 고기 요리를 제대로 맛본 적이 없는 듯 했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고기 요리에 매료된 그녀들은 단숨에 접시에 놓인 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불과 오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순식간에 동난 접시를 보니 아무래도 저녁 내내 고기를 구워야할 것 같았다.

"킁킁...이 냄새는..."

그 와중에 고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탐욕의 끝판왕이 나타났다.

다른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고기 냄새에 이끌렸는지 식당에 찾아온 릴리스는 먼저 식사를 하고 있는 자매들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앗! 언니들! 나만 빼놓고 고기를 먹다니!"

"릴리스? 너는 주인님이랑 함께 있을 때 자주 먹었다면서. 이번에는 조금 참으렴."

"그래. 이렇게 맛있는걸 매일같이 먹을 수 있다니. 마음 같아서는 언니도 주인님을 따라가고 싶단다."

먹음직스러운 고기 앞에서는 자매의 정도 없었는지 그녀들은 오히려 릴리스에게 타박을 주었다. 결국 릴리스가 달려온 곳은 내 품이었다.

"오빠! 고기를 구우면서 왜 나는 안부른거야!"

"나는 아무도 부른 적이 없다고. 네 언니들이 멋대로 온거다."

정작 본인도 고기 냄새를 맡고 달려온 주제에 투덜대기는.

"네 몫의 고기도 지금 굽고 있으니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아니면 굽는 동안 다른 자매들도 불러오던가."

"칫. 금방 다녀올테니까 고기 많이 준비해놔야해!"

신체능력으로 따지면 다른 자매 누구보다도 뛰어난 릴리스였기에 금방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고기가 더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자매들을 보니 모네에게만 고기 굽는 것을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부엌으로 돌아와서는 쓸 수 있는 모든 판 위에 고기를 담아 굽기 시작했다.

특히 마나로 작동하는 화로의 불길이 조금 사그라들어있길래 마나를 잔뜩 주입해서 활활 타오르게 했다.

살이 익는 것만 같은 열기에 땀이 엄청나게 흘렀다. 당장 창 밖에는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저택 안의 공기도 싸늘한데 순식간에 열탕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네. 지금부터는 내가 고기를 구울테니까, 네가 썰어서 아이린에게 넘겨줘."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고기를 굽기 시작했고, 방금 전보다 훨씬 빠르게 더 많은 양의 고기를 구워낼 수 있었다.

물론 내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피로는 장난이 아니었지만, 복스럽게 먹는 자매들과 릴리스의 모습을 보니 그럴 가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이린과 모네, 내가 먹을 고기를 구워 접시에 담자 비로소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예전 모험가로 활동할때 세이빌과 사야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세이빌 녀석은 굳이 고기를 자를 필요도 없이, 설익어도 대충 던져줘도 잘 받아먹었으니까. 사야는... 잘 먹는 모습이 귀여웠으니까 됐다.

손등으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대충 옆에 놓인 의자를 끌고 걸터앉았다.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감각 때문인지 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끝없는 갈증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주인님. 여기 물이에요."

그런 내 심정을 파악한 아이린이 눈치 빠르게 컵에 물을 담아 갖다줬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물을 들이켰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 나니 그제서야 갈증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식당에서는 내가 죽어라 구운 고기가 게 눈 감추듯 사라져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처음 고기를 먹었던 자매들은 배가 부른지 더 이상 수저를 들지 않았고, 릴리스를 비롯한 늦게 도착한 자매들만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남은 고기 정도면 이들이 먹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주인님은 안 드시는겁니까?"

어느새 자매들의 곁에 앉아 고기를 썰고 있는 모네가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쳐서 그런지 딱히 식욕도 없네. 부엌에 놓여있던 사과 먹어도 되지?"

"물론입니다. 저택의 모든 것들은 이제 주인님의 것이니까요."

모네의 허락과 함께 나는 계속 서 있었던 탓에 욱씬거리는 허리를 일으켜서 식탁 위에 놓인 사과를 집었다. 시장에서 파는 사과보다 훨씬 크고 실했다.

정원에서 직접 재배한 사과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사과를 한 입 깨물자 입 안 가득 새콤한 향과 함께 과일 특유의 단물이 잔뜩 흘러나왔다.

과일에 약을 탄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과가 달았다.

'이런 과일을 매일같이 먹으면, 확실히 고기가 없어도 문제는 없겠네.'

조금 과장해서 평생 사과만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저희가 정원에서 재배하는 과일들은 모두 전 주인님께서 따로 종자를 개량한 것들이니까요. 숲에서 자라나는 과일과는 당도와 크기 자체가 다르답니다."

나는 껍질째 사과를 모두 베어먹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한 과실의 달콤함에 절로 혀를 내둘렀다.

누가 연금술사 아니랄까봐 식물 품종 개량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는 놀랍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트라다 쿠스만이라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아이린은 릴리스와 모네 사이에 의자를 갖다놓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릴리스도 아이린 양처럼 조신한 아이였으면 얼마나 좋을지..."

모네의 발언에 릴리스가 발끈하며 '캬아악'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금세 모네의 꿀밤으로 제재당했다.

모네만큼은 아니어도 아이린을 귀여워하는 것은 다른 자매들도 마찬가지인지 다들 아이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는 릴리스와 다르게 아이린은 사랑스러운 소녀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말괄량이 같은 릴리스만 보다가 순진한 아이린을 본 그녀들은 또 다른 매력을 느꼈는지 중간중간 아이린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저기. 아이린 양은 주인님이랑 어떻게 만나게 된 거에요?"

"...노예 상인에게 잡혀서 팔려갈 위기에 처해있던 저를 주인님이 구해주셨어요."

사실은 아이린을 내가 돈을 주고 사온 것에 불과했지만 아이린은 조금 각색해서 말했고, 그 말을 들은 다른 자매들은 자기들끼리 작게 비명을 지르며 로맨틱하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아이린 양은 주인님이랑 어떤 관계인가요? 스킨쉽은 어디까지 했어요?"

누가 말했는지는 몰라도 열다섯도 안 된 애를 상대로 뭘 묻는거냐고 소리치려는 순간 머뭇거리던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그...저기...뽀뽀...까지 정도요..."

그렇게 말한 아이린을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고, 다른 자매들 역시 더욱 불타올랐다.

그녀들은 나와 아이린을 번갈아 쳐다보며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이린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인채 빈 접시만 스푼으로 휘젓고 있었다.

아이린의 말이 거짓말도 아니었고, 굳이 정정하기에는 엄청난 수고로움이 들 것이 명백했기에 나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는 것으로 자매들의 시선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뒷정리를 해야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뒷정리는 맡겨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나를 식당에서 내쫓았다.

모네에게 혼자서 다른 자매들에게 요리를 가르칠 수 있겠냐고 묻자 문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모네가 괜찮다면 그런거겠지.

아이린과 릴리스를 데리고 터덜거리며 욕탕으로 향했다.

지난번에 욕탕에서 모네와 데이지에게 덮쳐졌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두 사람 모두 부엌에 있을 터였다.

릴리스와 아이린과 함께 씻는 다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아마 괜찮을 것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장서서 걷는 릴리스는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의 귀에는 방금 전 내가 선물한 귀걸이가 걸려 있었는데, 찬란한 빛을 내뿜는 보석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런 릴리스에 반해 아이린은 자꾸만 주춤거리며 어쩔줄 몰라했다. 아이린과 함께 씻는 것은 그녀가 처음 내 집에 왔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함께 씻자고 하는 릴리스와 다르게 아이린은 지극히 상식적인 인간...이 아니라 마족이었고, 이 상황에서 명백하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욕탕은 하나 밖에 없었고, 따로 씻으려면 두 배로 시간을 소비해야했기에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다른 자매들과 함께 씻는 방법도 있겠지만 아이린은 그러지 못했다.

"헤헤. 잘 어울리지. 오빠?"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내게 묻는 릴리스를 본 아이린의 눈빛이 절로 날카로워졌다. 그야 자신은 받지 못한 것을 저렇게 자랑하듯이 말하면 당연히 질투가 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 빨리 아이린에게도 반지를 선물해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무척 잘 어울리네.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오빠가 준 선물인걸!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거야!"

릴리스는 그렇게 소리치며 귀걸이를 소중하게 어루만졌고, 그걸 본 아이린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두 녀석 다 나를 좋아해주는 것은 괜찮지만 저러다 두 사람이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됐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욕탕에 도착했다. 챙겨놨던 갈아입을 옷을 꺼내 바구니에 담아놓고,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 옆의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고기를 굽는 동안 땀으로 흠뻑 젖은 셔츠는 세탁을 해야했기에 옆의 빨래통에 던졌다.

그렇게 내가 웃통을 완전히 까자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우와..."

어쩐지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는 릴리스와 모르는 척하지만 힐끔거리는 아이린. 두 사람의 끈적한 시선은 내 복근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희는 옷 안 갈아입니?"

내 말에 아이린은 그제서야 입고 있던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릴리스는 오히려 내게 다가와서는 내 배를 손으로 만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봤지만 오빠의 복근은 진짜 대단하네. 창고에 있던 조각상보다도 훨씬 단단해보여."

"썩 보기 좋은 몸은 아니지만 말이야."

내 가슴팍과 배에는 무수히 많은 상처들이 남아있었다. 몇 바늘이나 꿰매거나 포션을 부어 응급처치를 했는데도 깊은 상처가 남은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릴리스는 그런 것도 신경쓰지 않는지 오히려 내 배에 손을 뻗어 직접 복근을 만지작거렸다.

"하아... 지난번에 오빠랑 할 때도 느꼈지만 이 감촉은 정말...읍읍!"

릴리스가 위험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길래 나는 바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린 옆에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다행히 내 배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상태에서 중얼거렸기 때문에 아이린에게는 들리지 않은 것 같다.

내게 입을 틀어막힌 릴리스가 뭐라고 웅얼대리는 것을 본 아이린의 의아해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그제서야 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하여튼 잠시도 안심을 할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이어서 바지를 벗고,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벗고 나서야 나는 어쩐지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고 느꼈다. 일 년 전에 내가 아이린을 씻겨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도 한 몫 했다.

아이린은 알몸으로 탕에 들어가는 것이 부끄러운지 욕탕 입구에 놓여있는 수건을 허리에 감고 있었다.

반면 릴리스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입고있던 고딕 드레스를 벗어버리고는 당당하게 알몸으로 서 있었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았기에 그대로 욕탕의 문을 열었다.

이미 뜨거운 물을 받아놨는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뜨거운 수증기가 눈 앞을 가렸다. 지난번에는 욕탕에서 제대로 몸의 피로를 풀 시간도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느긋하게 열탕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고기를 썰고, 구우며 이완된 몸의 근육이 열탕에 들어가는 순간 비명을 질러댔다. 온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도 근육이 풀리는 변태적인 쾌감에 몸을 떨었다.

"흐어..."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분나쁘다고 질색할 신음이었지만 어쩌겠는가. 탕에만 들어가면 절로 이런 소리가 나오는데.

릴리스는 처음에는 탕에 한쪽 다리만 담그더니, 이윽고 양 다리 모두 담그고, 마지막으로 탕에 완전히 몸을 담궜다. 그에 반해 아이린은 나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입욕했다.

참고로 아이린은 나와 마주보는 건너편의 벽에 기대어 앉아있었고, 릴리스는 내 바로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단순히 열탕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는 지루한지 물장구를 쳐대기도 했다.

아이린은 열탕의 열기 때문인지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함께 목욕하는게 부끄러운 것인지 내쪽으로는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아이린을 본 릴리스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 조금 있다가 서로 씻겨주기 할래?"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릴리스의 몸을 씻겨주는 것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릴리스가 내 몸을 씻어주려면 한참은 걸릴 것이다.

무엇보다 릴리스가 내게 부탁할 때 맞은편의 아이린이 어깻죽지에 달린 날개를 희미하게 파닥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거절하자 아이린의 날개는 파닥거림을 멈추고, 다행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고. 응? 한동안 오빠를 보지 못해서 오빠의 기운을 받고 싶단 말이야."

릴리스의 말이 궤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움찔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찾아가겠다고 해놓고 한 달이 넘게 안 갔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귀걸이 선물과 오랜만의 고기 요리로 화는 다 풀린 줄 알았는데 비겁하게 또...

내가 고민에 빠지자 아이린의 날개가 다시 퍼덕이기 시작했다. 마치 나한테 '뭘 고민하고 있는거에요! 바보 주인님!'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아이린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번만큼은 릴리스에게 어울려주기로 했다.

"좋아. 대신 내가 널 씻겨주는 것 뿐이야. 네가 내 몸을 씻겨주려면 너무 오래걸리니까."

"히힛. 알았어. 그 정도면 괜찮아."

어차피 릴리스의 몸은 위쪽은 빨래판, 아랫쪽은 민둥산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번뇌를 가질 부분은 손톱의 때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내가 릴리스를 씻겨준다는 사실이 불만족스러운지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열탕의 수증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이린의 매끈한 허벅지와 다리가 물장구를 치듯이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자이라도 아이린을 달래주고 싶었지만, 릴리스가 자꾸만 내게 달라붙는 바람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열탕에서 적당히 몸을 불린 다음에는 욕탕 의자에 앉았다. 나를 따라 나온 릴리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의자 하나를 끌고와서 내 옆으로 왔다.

물에 흠뻑 젖은 머리를 한 번 걷어올리고, 입구에 놓여있던 타올을 챙겨왔다. 참고로 아이린은 아직도 열탕에 남아서 얼굴이 물에 반쯤 잠긴채 부글부글 기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타올에 물을 조금 묻히고, 비누를 슥슥 문질러 거품을 냈다.

내가 손을 내밀자 릴리스는 그 위에 자신의 팔을 얹었다. 부끄러움도 없는지 다리를 오므리지도 않고 벌린 채였다. 지난번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아랫도리는 실오라기 하나 없이 매끈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고 그녀의 팔을 잡고 타올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헤헷. 오빠가 이렇게 씻겨주니까. 조금 흥분된다."

"이상한 소리하지말고 오른팔 내밀어."

양 팔 모두 거품을 낸 다음에는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내 무릎 위에 그녀의 다리를 올리고, 타올로 그녀의 발부터 종아리까지 꼼꼼하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긁어주던 도중, 릴리스가 야릇한 신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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