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아이린이 혀를 내밀고 릴리스를 놀린걸 기점으로 릴리스가 달려들었고, 다투는 두 사람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나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 발견했던 책의 설명대로라면 서큐버스들의 성인식은 '첫 경험'이라는 것인데, 그 부분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이린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부분이니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서재에 도착한 나는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어제 아이린을 피해 바닥에 무너뜨렸던 책더미를 뒤졌다. 읽던 도중 집어던졌기 때문인지, 내가 읽던 페이지는 구겨져 있었다.
'인간형 몬스터에 대한 기록'. 책을 펴서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구겨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폈다. 어제 읽었던 부분을 확인한 다음, 그 아랫부분을 훑었다.
'아무리 그래도 섹스 한 번에 성인식이 끝난다는건 이상하니까.'
내 예상대로 아래에 주석이 달려있었다.
[서큐버스는 '첫 경험'을 하는 것과 동시에 정기를 갈취하는 법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서큐버스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는 첫 경험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고한다. 서큐버스와 첫 경험을 한 상대는 대부분 정기를 빨려서 죽음에 이르지만, 유일하게 살아남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긴데.
서큐버스와 인간의 사랑은 지난번 아이린이 읽던 마법사와 공주의 사랑을 다룬 동화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서큐버스에게 있어서 인간은 먹잇감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식사거리에 불과한 짐승에게 애정을 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큐버스에게 인간은 자신의 허기를 채워줄 존재에 불과하다.
[정기를 계속해서 갈취할수록 서큐버스는 날개와 뿔이 더욱 커지고, 꿈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능숙해진다. 다만 서큐버스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몽마를 '서큐버스 퀸'이라고 부르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으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는 소문만 존재할 뿐, 실제로 그 모습이 확인되지는 않았다.]
서큐버스에 대한 기록은 그걸로 끝이었다.
서큐버스 퀸이라. 던전에 있는 서큐버스들을 족치다보면 정보를 얻을 수 있으려나.
하지만 아이린과 관련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아이린은 오히려 반쪽짜리 마족에 가까웠으니까.
성인식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고, 첫 경험을 기점으로 제대로 된 서큐버스로 거듭난다는 사실도 알게됐다.
다른 서큐버스들과 다르게 이미 마나를 다루는 법을 완벽하게 숙지한 아이린이라면 정기를 흡수하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
결국 아이린이 성인식을 치르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린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기를...바라는 수 밖에 없나.'
조금 입맛이 쓰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나같은 아저씨 곁에 머무르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착잡한 기분으로 읽고있던 책을 덮었다.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는 책들을 정리하고, 다른 책들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성인식 뿐만 아니라 서큐버스에 대한 다른 정보가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첫 책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건질만한 정보가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거나, 서큐버스를 본 적이 있다는 사람들의 증언 정도였다.
흔히 자기들끼리 음담패설을 하는 남자들이 꿈에서 서큐버스라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대중들에게 서큐버스는 대부분 기분 좋은 꿈에서 즐기는 것과 함께 정기를 조금 가져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까 읽었던 첫 경험인 서큐버스를 제외하고는 상대의 정기를 한계까지 쥐어짜내지 않는다.
서큐버스들이 일부러 정기를 조금씩만 갈취하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인간과 비등하거나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종족이니까 인간들이 자신을 토벌하지 않도록 일부러 그런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하여튼 영악한 녀석들이었다.
예전에 내가 찾아갔던 던전에서 만났던 서큐버스들은 자신을 토벌하러 온 모험가들에게 환상을 걸어놓고 자신들의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그녀들과 다르다.
나는 아이린을 인간처럼 키워서,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과 이어줄 생각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러는 편이 아이린의 파트너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테고.'
미래에 누가 아이린과 사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슬퍼하는 미래는 썩 보고싶지 않았다.
아이린은 지금처럼 순수하고 착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심정이다. 잔뜩 쌓여있는 책들을 다시 제자리에 꽂아놓고, 바닥에 오래 앉아있어 바지에 묻어있던 먼지를 털어냈다.
서큐버스는 인간의 정기를 흡수하지 않으면 몸이 소멸하기에 필연적으로 인간과 접촉할 수 밖에 없다.
다른 몬스터들과는 달리, 서큐버스는 인간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다.
아이린이 아직은 관심있는 남자가 없어 보여서 다행이지만, 나중에 그런 놈이 생기면 한층 더 경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린에게도 방금 전에 알게 된 사실을 전해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분명 원하던 정보를 얻었는데도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 만났을때는 키가 내 허리에도 닿지 않던 아이린의 성인식을 벌써 걱정해야하다니.
이 정도면 충분한 수확이었기에 그 다음부터는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분야에 대해 기록된 서적을 찾아다녔다.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고대의 포션이나 마법에 대해 기록된 것도 몇 개 있었다.
연금술에 대한 기록 중에서 전해지지 않은 것은 두 종류였다.
불법적인 종류의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이거나.
트라다 쿠스만이 남긴 서적들은 두 가지 모두 해당됐다.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리고, 환각마저 유도하는 마약의 제조법이 불법적인 것이었다.
사람의 영혼을 옮기는 법과, 시체를 일으키는 법은 흑마법사들이나 사용할 법한 악독한 종류의 마법이었다.
요즘같은 세상에 이런 마법을 사용했다간 당장 신전의 성기사들에게 골통이 깨지고, 사제들이 성수를 끼얹을 것이다.
이제는 입수하기 힘든 흑마법은 내 탐구욕을 자극했지만, 정식 마법이 아니라 알음알음 전수되다보니 그 형식이 완전하지 않았다.
트라다 쿠스만 역시 그 사실을 아는지 제대로 된 흑마법을 사용하기는 어렵다고 적어놓았다.
결국 나는 본래의 목적인 마약에 대해 훑어보기 시작했다.
자백제, 미약, 환각제 등 온갖 위험한 약물들에 대한 제조법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 일부는 나도 사용하는 눈에 익은 레시피였다. 그것 말고도 엄청난 양의 레시피들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하루 이틀 보는 것으로는 제대로 익히기도 어려워보였다.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직접 실험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집고있던 책을 아공간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당장 내가 써먹어볼만한 것은 진정제 정도였다.
최근에는 덜했지만, 에디스와 마리안이 떠난 이후로 연초를 찾는 일이 잦았다.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연초를 찾으려는 손을 보면 다시 증상이 재발했나 싶었다.
진정제라도 먹으면 조금 나아지겠지. 자그마치 트라다 쿠스만이 기록해 놓은 진정제니 효과도 죽여줄 것이 분명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서재의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이었다.
지금쯤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서 저녁 식사만 기다리고 있을 자매들의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복잡했던 머릿속의 잡생각들이 조금씩 정리됐다.
기분이 나빴던 이유도 자각할 수 있었다.
나는 미래에 아이린이 만나게 될 남자를 질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곁을 떠나 그 남자에게 가버릴 아이린의 모습을 상상하니 화가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가 부르면 강아지처럼 달려와서 미소를 짓고, 내가 다른 여자애와 놀고 있으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질투하고, 내가 끌어안으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린을 다른 사람에게 뺏긴다고 생각니 당연히 기분이 더러울 수 밖에 없었다.
언젠가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켠에서는 아이린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표정이라는게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감정이 메말라있던 아이린이 웃음을 되찾게 한 것은 나다.
아이린이 좋아하는 음식, 취미, 버릇까지도 나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개뼈다귀놈이 아이린과 성인식을 치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점에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이린에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추잡한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시원하게 인정하고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아이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서큐버스의 페로몬 때문이든, 그녀와 함께 지내는 동안 사랑에 빠진 것인지는 몰라도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공간을 불편하게 여겼는데, 아이린과 있을 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살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이 있던가. 어릴 때 나를 거두어줬던 '누나'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나마 손에 꼽는다면 동료였던 '사야' 정도일까.
내가 지금 아이린에게 품고있는 감정이 이성으로서의 사랑인지, 뒤틀린 부성애인지는 몰라도 아이린을 놓아주기 싫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언제까지고 아이린이 내 곁에서 머무르며 미소를 지어줬으면 좋겠다.
생각이 모두 정리될 때 즈음에는 창 밖의 빗줄기도 어느새 멎어있었다. 며칠동안 쉬지않고 쏟아지던 빗줄기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창문을 여니 구름 뒤에 숨어있던 태양이 나오고 있었다. 하늘 저편에는 무지개가 걸렸다.
입고있던 외투를 정돈하고, 양 손에 깍지를 끼고 우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손을 풀었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돌던 걱정이 사라지자 몸도 한결 가벼워졌다.
식당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자매들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먹었던 고기의 맛을 잊지 못했는지 하나같이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 중에서도 릴리스는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다면서 어리광을 잔뜩 피워댔다. 아이린은 내게 엉겨붙는 릴리스를 부러워하면서도 의젓하게 자리에 앉아있었다.
나는 아이린과 모네를 불러 요리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은 흔쾌히 내 보조를 자처했고, 자신도 하고 싶다며 방방 뛰어다니는 릴리스에게는 밖에 비도 그쳤으니 고기와 함께 먹을 야채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다른 자매들이 릴리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자, 아공간 주머니에서 고기를 꺼냈다.
다만 이번에 꺼낸 고기는 어제 먹었던 것과 때깔부터 달랐다.
'원래는 아껴 먹을 생각이었지만... 기분이다.'
내가 꺼낸 고기는 다름아닌 '레드 혼'의 고기였다.
정육점의 남자가 솜씨가 꽤나 좋았는지, 생각보다 쓸 수 있는 고기가 많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좋은 부위를 분리해서 접시에 옮겨담았다.
당연히 레드 혼의 고기로만 식사를 할 수는 없다.
자매들의 먹성이 얼마나 좋은데 소 한 마리로 감당이나 되겠는가.
그러니 레드 혼의 고기는 인당 한 접시만 맛보기로 줄 생각이다.
레드 혼의 고기는 따로 향신료를 뿌릴 필요도 없었다.
불판 위에 그대로 고기를 던지자 기름기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가득 퍼졌다. 냄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자매들은 벌써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레드 혼의 고기를 여러 번 먹으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고기의 육즙을 잘 살려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쉬지않고 계속 불판을 흔드니 금세 고기가 익어갔다.
부엌을 가득 채우는 폭력적인 냄새에 나도 예전에 먹었던 레드 혼 고기의 맛을 떠올렸다.
한 번 먹으면 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성이 있는 맛이었지. 살면서 그런 말로 형용키 어려운 맛은 처음이었다.
물론 좋은 의미로 말이다.
당장에라도 한 점 집어먹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고기를 굽는 것에 집중했다.
기름기가 어느 정도 빠지고나자 굽고 있던 고기를 뒤집었다.
적당히 시간이 지나자 불의 세기를 약하게 한 다음 고기를 한 점 집었다.
고기를 후후 불며 조금 식힌다음 아이린에게 내밀자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입을 벌려 고기를 받아먹었고,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거리며 맛을 음미하던 아이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도 이 고기를 처음 먹었을 때는 저런 반응이었지.
입에 넣자마자 녹아버리는 것만 같은 극상의 식감과 입 안 가득 퍼지는 육즙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이린 역시 그건 마찬가지였는지 멍하니 서 있었다.
황실 요리사들 중에서는 레드 혼 고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요리사도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나도 배워보고 싶었다.
아이린의 반응을 보니 맛에 대한 평가는 필요 없었다. 고기를 한 점씩 잘라 접시에 담아주었고, 모네는 손바닥만한 고기의 양을 보고 의아해 했지만 얌전히 내 명령대로 접시를 탁자에 세팅했다.
가장 먼저 자신 몫의 접시를 받은 릴리스가 고기를 보고 투덜댔다.
"고작 양이 이것밖에 안 돼?"
"그런 소리하지 말고 한 번 먹어봐."
내 조언에도 삐진 기색을 감추지 않던 릴리스는 연신 투덜댔는데, 작게 잘린 고기를 단번에 입 안에 넣은 다음에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놀라움, 그 다음에는 환희, 마지막에는 아쉬움이었다. 좀 더 오랫동안 고기의 향과 맛을 즐기고 싶었을텐데 한 번에 먹어버렸으니 그럴 수 밖에.
릴리스는 레드 혼 고기의 맛에 사로잡혔는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텅 빈 접시를 주시했다.
"오빠. 나 한 접시만 더..."
"안 돼."
단호히 거절하자 릴리스는 시무룩해져서는 텅 빈 접시를 깨작거렸다.
나중에 몰래 남은 고기를 줄 생각이지만, 다른 자매들에게도 공평하게 대우받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였다.
여자의 마음은 의외로 섬세해서, 별 것 아닌 일로도 상처받고 질투한다. 릴리스의 자매들은 서로를 아껴주니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면 릴리스의 버릇도 나빠지니. 적당히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서 사용해야한다.
"우와...!"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곧이어 다른 자매들도 고기 맛을 보고는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렇게 기뻐해주니 고기를 구운 보람이 있구만.
모네도 자기 몫의 접시에 담긴 고기를 먹어보고는 담담히 '다른 고기들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군요'라고 평가했다.
전체적으로 반응이 괜찮았다. 그녀들 중 일부는 눈물까지 흘리며 레드 혼 고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인간보다 감각이 둔한 호문쿨루스조차도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니.
나도 남은 접시에 올려진 고기를 하나 집어 먹었다.
몇 년 만에 먹어보는 고기맛은 역시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깊은 풍미에 나는 최대한 오랫동안 맛을 음미했다. 이러니 평민이고 귀족이고 가릴 것 없이 한 번 맛보면 잊을 수가 없지.
순간 머릿속으로 레드 혼을 기르는 목장을 구상했지만, 아쉽게도 지난번 토벌에 대부분 죽어버렸으니 당분간은 힘들 것 같다. 황실에는 따로 식용 몬스터들을 기르는 장소가 있다고 들었다.
레드 혼 뿐만 아니라 입수하기 어려운 골드 피쉬같은 생선도 마찬가지였다. 황실의 만찬에 올라가는 메뉴들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엄격한 감시 하에 몬스터들을 기르고 있다고했다.
아쉽게도 그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나라고해서 못할 건 없었다.
마침 트라다 쿠스만의 저택 주변은 텅 빈 공터였고, 인적이 드문 곳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나중에 서재에서 트라다 쿠스만의 목축에 대한 기록도 있는지 찾아봐야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접시를 내려놨다.
제대로 맛도 보지 못하고 고기를 삼켜버려 울상을 짓고 있는 릴리스에게 몰래 고기를 몇 점 더 얹어주며 그렇게 저녁 만찬이 끝났다.
비록 레드 혼의 고기는 아니지만 돼지고기로 배를 든든하게 채운 그녀들은 각기 자신의 방을 청소한 다음 씻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혼자서 욕탕을 쓸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모네가 느긋하게 씻으라며 릴리스와 아이린을 데리고 간 덕분이었다.
어제는 두 녀석을 돌보느라 제대로 씻지 못했는데, 오늘은 마음놓고 욕탕을 즐길 수 있었다. 뜨거운 열탕에 몸을 담그고 멍하니 천장에 맺힌 물방울을 응시했다.
양 손에 물을 받아 얼굴을 헹구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이린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나서도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아이린은 여전히 내가 딸처럼 돌보는 아이였고, 적어도 내 쪽에서 먼저 그녀에게 다가갈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린은 착한 아이니까. 분명 거절하지 못하겠지.'
만약 내가 아이린에게 고백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이린은 내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내가 싫더라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순진한 아이린의 마음을 그런식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남은 방법은 아이린이 나를 좋아하는 것 뿐인데...
'어렵겠지.'
아이린이 내게 보이는 호의가 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은 가족애인지,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인지는 본인만이 알겠지. 사실 서른 먹은 아저씨를 좋아할 여자애가 어딨겠냐만은.
내가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말재주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