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260)

이렇게 고민을 해봤자 답이 나오는 문제도 아니었기에 다시 욕탕에 얼굴을 푹 담궜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한결 정리됐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욕탕 문을 열고 나오자, 그 순간 문 뒤에 있던 사람이 놀라 자빠졌다. 지나가면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분명 이름이...

"...케시?"

가물가물한 기억을 끄집어내서 간신히 이름을 떠올렸다. 흔치 않은 푸른빛의 머리카락과 은빛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욕탕 안을 엿보고 있었는지 쭈그려 앉아있던 자세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는 여전히 내 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케시?"

"...네. 넷!"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대답을 하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무릎을 꿇은 정좌 자세였다. 케시는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었다.

"왜 욕탕 앞에서 그러고 있었던거야?"

딱히 질책할 의도는 없었다. 정말로 순수하게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는데 케시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서는 몸을 덜덜 떨었다.

"...사, 사실은 모네 언니에게 주인님의 입욕이 끝났는지 확인하고 오라고 들었어요."

그제서야 나는 복도에 걸린 시계를 보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의 사색에 너무 빠진 모양이었다.

"주인님이 욕탕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하고 돌아가려 했는데..."

"했는데?"

"...주인님의 몸을 보고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내 배를 힐끔거렸다. 별로 볼만한 몸도 아닌데 남자를 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있어서는 꽤나 자극이 강했던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신경쓰지 말고 모네한테 나는 다 썼다고 전해줘."

"아, 알겠습니다!"

케시는 얼굴을 붉히며 그대로 복도를 달려가버렸다. 다 큰 처녀가 고작 이런 일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색다른 느낌이었다.

저런 순수한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는데, 정작 막내 취급을 받고 있는 릴리스가 저렇게 발랑 까졌다는게 안타까웠다. 처음 교육할 때 제대로 가르쳤어야하는데 한 번 쾌락을 알고나서는 틈만 나면 하자고 달라붙는게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침대에 앉아 낮에 서재해서 챙겨놨던 책을 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었던 다른 이종족들에 대한 기록을 읽었다.

엘프야 수도에서도 가끔씩 볼 수 있고, 모험가로 활동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익숙했다. 특히 하프엘프의 경우에는 엘프들에게 배척받는 일이 잦기 때문에 대부분 모험가로 활동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쪽은 님프였다.

서큐버스가 고위 마족의 상징과도 같다면, 님프는 그보다 아래에 위치한 저급 악마와 같았다.

다만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마치 요정같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진짜 요정이라면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님프는 본 적이 없단 말이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자들을 유혹해서 숲 속으로 끌고들어간다고한다. 그렇게 한창 흥미로운 부분을 읽던 도중,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책을 덮었다.

"오빠!"

문을 박차고 들어온 릴리스는 그대로 내 품을 향해 달려왔다. 침대 위로 몸을 던지는 릴리스를 간신히 받아내자 그녀는 방금 씻었는지 좋은 향기를 풍기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댔다.

남자들이 여자의 가슴을 좋아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남자의 가슴을 좋아하는 걸까. 딱딱하기만 해서 별로 재미도 없을텐데.

가만보니 릴리스의 오른 옆구리에는 베개가 들려있었다.

"헤헷...오늘은 같이자자. 응?!"

"글쎄다."

적당히 말을 흐리며 릴리스를 돌려보내려 하는데, 방 입구에 서서 베개를 가슴팍에 안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딱 보니 아이린도 릴리스랑 같은 생각을 찾아온 것 같았다. 어쩌면 릴리스가 온 것을 보고는 따라왔을 수도 있고.

"...그래. 대신 오늘만이다?"

내 허락에 릴리스가  만세 소리를 지르며 양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이런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어린애란 말이지.

가만히 서 있던 아이린도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조심스레 침대 위로 올라왔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릴리스와 달리, 아이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옆으로 바싹 달라붙었다.

결국 나는 덮은 책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침대 한 켠에 접어뒀던 이불을 폈다. 아이린과 릴리스 둘 다 잠옷차림이었는데, 릴리스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붉은색 파자마를 입고 있었고, 아이린은 흰색 네글리제를 입고 있었다.

릴리스가 입고 있는 파자마는 아마 다른 자매가 만들어준 것이겠지. 다만 아이린은의 네글리제는... 수도에서 속옷과 함께 잠옷을 잘 때 함께 샀던 것이었다.

살 때는 몰랐지만 훤히 드러난 어깨와 겨드랑이 부분을 보니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게다가 옆에서 보면 아슬아슬하게 가슴이 보일락말락해서 신경쓰였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 것을 보니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린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미 릴리스는 내 왼팔을 꽉 잡고 누워있었고, 아이린은 내 오른쪽에 누워서 자꾸만 나를 훔쳐봤다.

그러던 도중 릴리스가 갑자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헤헷. 오빠 팔 엄청 단단해... 마치 오빠의...읍읍!"

또 분위기를 탄 릴리스가 위험한 소리를 내뱉으려 하자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고개를 돌리니 아이린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들린건 아니겠지?

몸을 이쪽으로 돌린 아이린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내 오른팔을 그대로 자신의 가슴팍에 끌어당겼다. 방금 전 릴리스의 뽀뽀 때문에 질투심에 불이 붙었나보다.

얇은 네글리제의 천 너머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이 닿고 있었다.

분명 릴리스와 아이린이 한 행동은 같았는데 결과는 전혀 달랐다. 정말로 어린애처럼 내 팔을 껴안고 있는 릴리스의 평평한 가슴과는 다르게, 아이린은 충분히 성장한 여성의 매력을 물씬 내뿜고 있었다.

아이린이 몸을 비틀 때마다 팔뚝에 몰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경험이 풍부했기에 고작 이런일로 몸이 반응하지는 않았다. 아직까진 무사한 내 아들놈을 확인하고는 안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릴리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아이린은 조심스레 얼굴을 들고는 아까 릴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내 뺨에 키스하려고 했다.

집에 있을 때 심부름 다녀온 아이린의 이마에 내가 입을 맞추는 일은 일상이었지만 아무래도 뺨에 키스를 받는 것은 부끄러웠다. 릴리스의 눈치를 보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아이린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결국 릴리스가 내 팔을 끌어안은 채 잠에 들자, 아이린은 눈을 감고 서서히 내 뺨에 입술을 갖다댔다. 양 팔이 두 소녀들에게 봉쇄되어 있었기에 마땅히 도망갈 방법도 없었다.

나는 얌전히 아이린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뺨에 부드러운 아이린의 입술이 닿는 순간 온 몸이 번개를 맞은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젠장, 무슨 첫사랑하는 소녀도 아니고 고작 이런 일로 반응하다니.

다행히 아이린은 입술이 닿자마자 금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름대로 큰 용기를 냈던 것인지 그녀의 얼굴을 낮에 먹었던 사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그 뒤로는 별 일 없이 잠에 들었다. 새근새근 잠에 빠진 두 소녀를 쳐다보던 나도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눈을 감았다. 그날 밤의 꿈에는 아이린이 나왔다.

꿈 속에서의 나는 아이린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지금보다 좀 더 키가 커지고, 그 이상으로 가슴과 엉덩이가 커진 아이린은 성숙미가 물씬 뿜어져나왔다.

특히 그녀의 보랏빛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요리를 하는 모습은 마치 미의 상징이라 불리는 엘프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슴이 빨래판이고 인간에게 적대적인 엘프와 다르게, 아이린은 커다란 가슴을 출렁거리며 보는 것만으로도 남자를 유혹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꿈 속의 나는 그런 아이린에게 몰래 다가가서는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이린은 그런 내게 짓궂다고 하면서도 부드러운 모닝 키스를 해주었다.

그 감각은 황홀할 정도로 좋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꿈이 아이린의 무의식이 흘러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내 망상의 잔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자각몽. 이게 꿈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꿈 속의 몸은 내 의지와 다르게 자연스럽게 아이린의 허리를 휘감았다.

분명 그녀의 가슴은 더욱 커졌는데 허리 둘레는 그대로였다. 뒤에서 그렇게 허리를 끌어안자 아이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요리중이잖아요."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싫은 기색이 아닌걸보니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 보였다. 그러고보니 앞치마를 두른 아이린의 모습은 처음봤다.

나는 평소 앞치마를 쓰지 않았기에 사놓지 않았고, 자연스레 아이린도 앞치마를 입지 않고 요리를 했다.

하지만 앞치마를 한 아이린의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용적인 용도보다는 단순히 야릇해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이린은 구운 생선과 함께 레몬 조각을 접시에 함께 담았다. 평소 내가 생선 요리를 할 때의 습관 그대로였다.

몇 년이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아이린의 성장이 아직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흔히들 말하는 황금 비율을 그대로 실현한 것 같은 몸매와 여성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가슴과 엉덩이는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매료시켰다.

요리를 끝내고 앞치마를 벗은 아이린은 얇은 셔츠 한 장에 몸에 달라붙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몸의 굴곡이 더욱 강조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아이린은 남자를 홀리는 요물같은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손으로 슬쩍 셔츠를 잡아당기며 가슴골을 열어보였다.

속옷도 입지 않았는데 대담하기 짝이 없는 어필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내 반응이 재밌었는지 아이린은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어젯밤에도 그렇게 격렬하게 잔뜩 하셨으면서..."

내 입장에서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결국 나는 아이린과 하는건가?

게다가 말투를 보니 하루 이틀 그런게 아닌 모양이었다. 몇 년 뒤면 불혹을 바라보는 나인데, 나는 이때까지도 혈기왕성한 듯 했다.

꿈이라고는 해도 남자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문제였기에 안심했다. 더 이상 물건이 서지 않으면 남자로서의 상징이 죽는 것 같아서  찝찝하단 말이지.

지금 이 상황은 꿈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이린이 구운 생선은 아무런 맛도, 향도 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는데 맛을 느낄 수 없는 것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아이린이 차를 끓여오겠다며 부엌으로 가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던 나는 창 밖의 풍경을 보고 이곳이 꿈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창 너머에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새하얀 공백만이 그곳을 채우고 있었고, 마치 내 집만 공간을 잘라낸 것 같은 형상이었다.

아이린이 가져 온 차는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향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고 홀짝였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삶을 동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가정을 꾸리고,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평온한 시간을 보낸다.

과거의 내가 꿈꿨던 미래가 이렇지 않았을까. 기억 한 구석에 쳐박아뒀던 과거가 떠올랐다.

산처럼 쌓인 몬스터들의 시체더미 위에서 핏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 매일같이 똑같은 일상과 계속되는 살육에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 내가 해야할 일을 찾지 못했고, 이런 삶을 언제까지 연명해야하는지 고민하곤 했다.

그때의 내가 꿈꿨던 미래는 지금에 한없이 가까웠다.

나같은 놈이 결혼을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만약 기회가 된다면 마음에 맞는 여자와 함께 집을 짓고 거기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더 이상은 무언가를 죽이는 것도 질렸을 때의 기억이었다. 몬스터든, 사람이든 칼에 찔렸을 때 내뿜어지는 피를 볼 때마다 발작에 가까운 광증을 일으켰었고 삶에 대한 회의감이 극에 달했었다.

이 꿈은 그런 내 소망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적어도 내가 이때까지 만나본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아이린이라는 연인. 소박하면서도 있을건 다 있는 집. 마지막으로 한적하면서도 사람들은 서로의 이웃에게 상냥했다.

사실 현실과 달라진 것은 하나뿐이었다. 아이린이 내 연인이 되었다는 것. 불과 일 년 전에 홀로 집에서 틀어박혀 자살을 고민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대비적이었다.

왜 내가 이런 꿈을 꾸는지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거겠지.

내가 아이린과 함께 사귀는 순간 이런 모습이 일상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난번처럼 꿈 속에서 내가 아이린을 덮쳤던 것과는 명백히 다르다.

구름이 끼었던 것처럼 불투명한 기억의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정신이 멀쩡했고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찻잔을 다시 들려는 순간, 손이 점점 투명해졌다.

집 안의 가구들이 창 밖의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갔고, 나는 이것이 꿈을 깨는 신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 밖에 해가 떠올라 있었다.

이번에는 아래쪽이 축축하지도 않고,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민하고 있던 내게 행복한 미래를 보여준 꿈 덕분에 더욱 확신이 생겼다.

여전히 내 팔을 꼬옥 끌어안고 있는 아이린이 깨지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이 아이가 꿈속의 그녀처럼 된다는 것은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옆에있던 릴리스가 어디갔나 싶었는데, 잠버릇이 안 좋은지 이불을 내쪽으로 걷어차고는 바닥에 굴러떨어진 모양이었다.

파자마차림으로 바닥에 웅크려서 몸을 떨어대는 것을 보고는 그녀의 파자마 뒷덜미를 잡아들고는 침대 위로 끌어올렸다.

"...으응?"

그러던 도중 잠에서 깼는지 릴리스는 배실배실 웃으며 다시 내게 안겨들었다.

"오빠 품... 따뜻해...히힛..."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끌어당겨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어차피 쉬러 온 것이니 조급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릴리스와 아이린을 옆에 낀 채 누워서 생각에 잠겼고,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올라 있었다. 여전히 쿨쿨 잠들어 있는 릴리스와 다르게, 아이린은 이미 깨어 있었다. 다만 팔을 끌어안은 채 내 얼굴을 쳐다보던 아이린과 눈이 마주치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혹시 내 얼굴에 뭐 묻었니?"

그러자 아이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리질하는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아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잠자리라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아이린의 눈가에는 옅은 다크서클이 남아 있었다. 어쩐지 조금 피곤해보이길래 좀 더 쉬게 내버려두었다.

아이린은 내가 머리를 살살 쓰담아주자 금세 잠들었고, 릴리스는 이미 세상 모르게 쿨쿨 자고 있었다.

침대에 사이좋게 누워 잠든 두 소녀를 가만히 쳐다보던 나는 욕실에서 몸을 씻은 다음 계단을 걸어내려갔다.

비가 그치자 평소처럼 저택의 청소를 하거나 정원에서 가져온 식재료들을 정리하는 자매들도 있었다.

그녀들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들에게 수고하라고 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원으로 걸어나오자 어제 비가 그치며 아직은 조금 질척이는 땅바닥을 밟았다.

군데군데 빗물이 고인 곳도 있었지만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비에 잠겼던 어제를 생각하면 오히려 빨리 마른 편이었다.

정원에는 아직 물기에 젖은 꽃과 과일들이 잔뜩 있었다. 나무에 달려있는 사과를 하나 따서 그대로 베어먹었다. 지난번에 먹었던 사과와 다를 바 없이 무척 달콤한 맛이었다.

아침을 대신해서 사과를 우물거리며 건물의 뒤쪽으로 돌았다. 온갖 야채와 과일들을 키우고 있는 정원과 다르게 저택 뒤에는 텅 빈 공터밖에 없었다.

공터의 한 켠에는 돌무더기로 보이는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나는 가까이 가서야 그게 지난번 내가 쓰러뜨린 샌드 골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난번에 모네가 내게 첫 번째 시련이라며 샌드 골렘과 싸움을 붙인 적이 있었다. 그 때 핵을 박살냈을 때의 잔해인가.

거대한 돌덩어리들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이것들을 써먹을 방법이 떠올랐다.

골렘의 핵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마석에 마나를 주입해주면 그것만으로도 골렘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평소에는 릴리스가 함께 있으니 괜찮겠지만 혹시 모르니 저택을 위한 안전장치를 만두는 것도 괜찮아 보였다.

자아가 없어 명령하는대로만 움직이니 힘 쓰는 일에 부려먹으면 좋았다. 물론 섬세한 조작이 필요한 작업은 못하지만, 여러모로 써먹을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다.

골렘을 시켜 내가 구상하고 있던 몬스터의 사육 시설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골렘 정도 되면 어지간한 몬스터들의 공격에도 꿈쩍 안할테고 잠을 잘 필요도 없으니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도 좋겠지.

결론을 내린 나는 바로 모네를 찾았다. 골렘을 만든 다음에는 그 명령권을 모네와 내게 지정할 생각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은 모네가 골렘을 지휘해줘야하니까.

모네는 내 계획을 듣고는 괜찮은 생각이라고 했다. 이때까지는 가끔씩 침입한 야생동물이나 몬스터들을 릴리스가 쫓아냈지만 릴리스가 없는 동안은 가슴 졸일 때도 있었다고 한다.

트라다 쿠스만의 저택으로 가서 골렘의 핵으로 쓸만한 마석을 찾았다.

트라다 쿠스만의 창고에 있는 것들 답게 마석은 하나같이 고급품 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마석들이 내 주먹보다 훨씬 컸다.

고작해야 골렘의 핵으로 쓰기에는 아까운 것들이었기에 그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것으로 정했다.

골렘을 만들 때 필요한건 골렘의 핵이 될 매개체와 마법사 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방법이 단순했다.

공터의 구석에 치워져있던 돌덩어리들 주변에 주워온 나뭇가지로 마법진을 그렸다.

골렘 제작 마법은 오랜만이었지만 꽤나 괜찮게 마법진이 그려졌다.

마법진을 완성한 다음에는 마석을 돌무더미 사이에 던졌고, 영창을 하기 시작했다.

영창 주문을 읊을수록 쌓여있던 돌덩어리들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산산조각났던 몸이 다시 본래의 형태를 되찾아 가는 것처럼 마석을 중심으로 몸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다만 지난번 내가 부쉈던 골렘들의 잔해를 모두 긁어모았던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내가 만드는 골렘은 그보다 덩치가 두 배 정도는 컸다.

비록 한 마리 뿐이지만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보자마자 도망갈 정도로 거대한 덩치였다.

완성된 골렘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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