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골렘의 덩치는 오우거보다도 더 거대했다. 거대한 암석 여러 개가 뭉쳐서 만들어진 몸은 보는 것만으로도 육중해보였다. 저 거대한 발을 한 번 내려찍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몬스터는 그대로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지겠지.
마침 저택의 일을 끝내고 나온 모네가 골렘을 보고 감탄했다.
"전에 있던 골렘보다도 훨씬 크네요."
"굳이 숫자가 많을 필요는 없잖아?"
몬스터나 동물들은 본능에 충실하다. 물론 이성을 잃은 인간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긴 하지만.
아무튼,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이런 골렘의 덩치를 보는 순간 저항 의지를 상실할 것이다.
여차하면 한 놈 정도 본보기로 짓밟아주면 그만이었다.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 날뛰던 이가 단순한 고깃덩어리가 되는 것은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모험가 놈들 중에서도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다가 오우거의 주먹 한 방에 묵사발 난 놈이 한둘이 아니었지.
나는 마법진을 발동시켜 다시금 골렘의 핵에 마법진을 새겼다. 마지막 인식 작업을 위해 모네를 내 옆에 서게한 다음, 나와 모네를 골렘의 주인으로 인식시켰다.
골렘들은 자아가 없기 때문에 주인을 마나 파장으로 알아본다. 그리고 명령을 할 때 역시 주인의 의도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정신을 집중하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한 번 명령해볼래?"
내 권유에 모네는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골렘을 향해 말했다.
"양 손을 드세요."
모네의 말과 함께 가만히 서 있던 골렘은 양 손을 들어올렸다. 육중한 양 팔을 들어올리는 순간 강한 바람이 일으켜졌다. 모네는 바람때문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명령은 잘 듣는 것 같네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골렘이 자신의 명령을 듣는 것을 확인한 모네는 마저 저택 청소를 하겠다며 돌아갔고, 나는 골렘에게 저택 주변에 몬스터가 보이면 바로 섬멸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괜히 저택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정원을 훼손하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저택 주위를 돌며 순찰을 하도록 했다. 골렘은 내 명령을 인식하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골렘은 핵이 부서지지 않는 이상 다른 연료가 필요 없었다. 기본적으로 무생물인 돌덩어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놈이었기에 그 매개체만 무사하다면 계속 명령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적어도 바스티안 영지 주변에 저 골렘을 상대할 수 있을만한 몬스터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마 지난 던전 브레이커 때의 오우거 두 세 마리 정도는 데려와야 붙어볼만 하지 않을까?
저런 대형 골렘을 만든 것은 나도 처음이었기에 걸어가는 골렘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골렘의 핵으로 사용한 마석을 마탑에 팔았으면 금화 주머니 몇 개 정도는 거뜬했겠지. 나도 트라다 쿠스만의 창고에 마석들이 잔뜩 쌓여있는게 아니었다면 저런 골렘을 만드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마석 뿐만 아니라 창고에는 온갖 보물과 마도구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눈여겨보고 있는 것들이 몇 개 있었는데, 이번기회에 챙겨둬야겠다.
창고에 있는 물건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였다.
첫 번째로는 순간적으로 신체능력이나 마력을 증폭시켜주는 비약을 비롯한 포션들이었다. 엘릭서를 비롯한 고급 포션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포션들이 꽂혀있는 병 옆에는 각각 그 내용물과 효과에 대한 기록이 첨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용할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아이린은 이미 마나 포션을 마셨고, 다시 마나 포션을 먹인다고해도 별로 효과를 볼 수는 없었다.
이미 아이린은 자신의 그릇을 완성했으니 포션을 마셔봤자 오히려 혼란을 줄 뿐이겠지. 당분간은 쓸 일 없는 포션병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두 번째로는 본인의 능력을 올려주는 장신구와 장비들이었다. 감정을 해본 결과 마법사들에게 필요한 마나 회복능력을 올려주는 장비가 꽤나 많았다.
그 종류도 다양해서 팔찌, 목걸이, 반지 등 온갖 종류의 아티팩트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이 아티팩트들의 효과를 제대로 모르는 자매들은 가끔씩 아티팩트들을 닦을 뿐, 분류하지 못했다.
결국 이것들의 정리는 감정 능력이 있는 내 몫이었다.
마나 회복 능력을 올려주는 반지, 마법의 위력을 한 단계 올려주는 지팡이, 자신을 쥔 자의 근력을 일정량만큼 올려주는 검 등 아티팩트의 효과는 제각기 달랐다.
다만 아티팩트들 중에는 낯에 익은 물건이 꽤나 많았다.
과거 용병왕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방패, 수백 년 전 엘프 여왕이 인간과의 교류를 기념하며 선물했다던 신궁(神弓), 딱 봐도 심상치 않은 살기를 흘려내고 있는 마검까지.
그런 아티팩트들은 따로 분류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트라다 쿠스만이 손수 제작한 마도구들이었다.
욕탕에 넣어놓고 십 분 정도 지나면 물을 뜨겁게 끓게 만드는 돌, 몬스터들을 쫓아내는 피리 등 오직 트라다 쿠스만만이 만들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으니 상관 없지만,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무척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해보였다. 물론 이런 것을 시중에 풀 생각은 없었다.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 정도라면 모를까, 괜히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간 귀찮은 일에 휘말릴테니까. 성녀를 돕고, 황녀의 자살 미수를 막은 것 다음에는 대체 무슨일이 찾아올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정말로 찾아온다면 오기 전에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간신히 창고 정리를 마친 나는 눈여겨보던 아티팩트와 마도구를 몇 개씩 챙겨나왔다.
내가 써먹기에는 그랬지만 아직 성장중인 아이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좋을 것이다.
아티팩트는 마도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가 많았고, 내 지인들에게 한 개씩 나누어줘도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안젤리카에게는 마나 회복 속도를 올려주는 팔찌를, 제시카에게는 몸의 자연치유 속도를 올려주는 목걸이를, 앨리스에게는 불면증을 치료해줄 수 있는 아로마 향을 챙겼다.
물론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줄 것도 넉넉하게 챙겼다.
그렇게 챙긴 물건들을 아공간 주머니 안에 넣고 나왔다. 점심시간이라는 것을 알려주듯이 내 배에서 신호를 보냈다.
생각해보면 이때까지 먹은게 사과 한 알 뿐이니 배고픈게 당연했다. 이틀 내내 저녁에 고기만 먹었으니 간만에 다른게 먹고 싶었다. 하다못해 빵이나 생선같은 것이라도 없나.
하지만 내 기대가 무색하게도 부엌에는 샐러리와 옆에 놓인 과일들 뿐이었다. 이 저택에 사는 이들은 죄다 호문쿨루스 뿐이라는 점을 깜박했다.
당연히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도 없었고, 밀을 가공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
"모네. 혹시 낚싯대 있어?"
"아마 비품실에 하나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만... 낚시 가시게요?"
"그래. 사흘 연달아 고기만 먹으니 질려서 말이야."
여기서 기른 사과는 무척 달고 맛있었지만 허기를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이제와서 빵을 사올 수도 없으니 남은 방법은 생선이라도 잡아오는 수 밖에.
"그럼 릴리스와 아이린도 데려가시는게 어떠신지요? 두 사람 다 방금 일어나서 주인님을 찾고 다니더군요."
"알았어. 그럼 저녁 전에는 돌아올게."
릴리스와 아이린을 찾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비품실에서 약간은 녹슨 낚싯대를 닦고있자 저택을 돌아다니며 나를 찾던 두 사람이 달려왔다.
"오빠아아아!"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릴리스가 달려와서는 나를 끌어안았다.
방금 전 침대에서 뒹굴어댈 때처럼 머리가 헝클어져 있지는 않았다.
아이린도 그렇고 두 사람 다 아직 머리의 물기조차 마르지 않은걸보면 씻고 나오자마자 나를 찾아 뛰어다녔나보다.
아이린은 릴리스와 다르게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일 때문에 아직도 부끄러워하는걸까?
"오늘은 강에 갈테니까 두 사람 다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렴."
수도에서는 수영복이라고 해서 따로 물에서 놀 때 입는 옷이 있다고 했지만, 일반인들에게 그런 것은 사치였다.
나도 수영복이란걸 입은 모습을 본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속옷이랑 별반 차이 없는 수준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옷을 입힐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볼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내 말에 두 사람은 사이좋게 방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 동안 낚싯대를 챙기고 쓸만한 정원의 화단에서 꿈틀대는 지렁이 몇 마리를 미끼로 잡아서 주머니에 담았다.
낚시를 해본 것은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낚시꾼들이 흔히 말하듯이, 낚시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모험가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느긋하게 낚시를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치자 때마침 릴리스와 아이린도 옷을 갈아입고 돌아왔다.
아이린은 허벅지에 달라붙는 반바지에 흰색 셔츠, 릴리스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었다. 역시 두 사람은 닮았으면서도 다르단 말이지.
"그럼 출발하자."
나는 낚싯대를 등 뒤에 메고, 지렁이가 든 주머니를 옆구리에 찼다. 그리고는 아이린과 릴리스의 손을 양 손으로 맞잡고 걷기 시작했다.
어제 막 비가 그치며 여전히 날씨는 습했지만 두 소녀가 원하니 어쩔 수 없었다.
아이린은 내 손을 놓지 않을 생각인지 꼬옥 붙잡고 있었고, 릴리스는 맞잡은 손을 앞뒤로 방방 흔들어댔다.
"강에 놀러가는게 그렇게 좋아?"
릴리스가 내 집에서 머무를 때는 또래 애들과 같이 자주 놀러다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는 강가에 놀러가지 않은걸까?
"애들끼리 가면 위험하다고 못 갔어. 하여간 어른들은 제멋대로라니까."
아아. 그러고보니 아이린을 데리고 갔을 때도 플로라와 함께 갔었지.
게다가 지난번 홍수 때문에 물이 불어서 어린애들은 당분간 강에 접근하지 말라고 말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도 이쪽 강이 훨씬 깨끗하니까 볼 것도 많을걸."
실제로 숲 속을 지나는 강은 영지 안을 흐르는 강과 비교할 수 없었다.
숲 속의 강은 그야말로 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했으니까. 강의 물줄기 소리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폭포처럼 물이 쏟아지는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아공간 주머니에 든 돗자리를 꺼내 깔았다. 돗자리 위에 앉아 등에 지고 있던 낚싯대를 꺼냈다.
쇠막대기에 구멍을 뚫어 그곳에 실을 연결한 것 뿐인 투박한 낚싯대였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너희는 저 아래에서 놀고 있으렴."
하류에 있는 물고기들이 거슬러 올라올 일은 없을테니 내가 위에서 낚시를 하는게 맞겠지.
내 예상대로 강은 무척 깨끗했다. 꽤나 넓은 강은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강의 물은 당장 마셔도 될 정도로 깨끗했고, 자세히 보면 돌 주변을 헤엄치는 물고기들도 찾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수심이 깊어 릴리스의 허리까지 잠길 정도였다.
릴리스는 달려오자마자 신발을 벗고 강에 발을 담궈서 물장구를 치기시작했다.
"하아...시원해..."
몸을 부르르 떨며 정말로 즐거워하는 릴리스를 보니 데리고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릴리스와 아이린이 강이 넓어지기 시작하는 하류쪽에서 놀게 두고, 조금 더 올라가서 낚시를 할만한 자리를 찾았다.
마음 같아서는 폭포 위에 올라가서 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조금 위에 있는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챙겨온 낚싯대를 꺼내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렁이를 바늘에 꿰었다. 적당히 낚싯대를 들어올리고는 강가를 향해 던지자 목표로 삼았던 바위 옆에 무사히 안착했다.
물살이 흐르는 강가에서는 물고기들이 바위 밑에 숨어있는 경우가 많아 바위에 낚싯줄이 걸릴 각오를 하고서라도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아이들은 사이좋게 강가에 발을 담그고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투닥거리는 저 둘은 평소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의 가장 큰 접점이 나인만큼 나에 관한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 같다는 것은 너무 자의식 과잉일까?
그렇게 멍하니 낚싯대를 잡은 채 앉아있다보니 슬슬 입질이 왔다. 오랜만의 낚시라 허탕을 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낚싯대를 슬쩍슬쩍 잡아당기는걸 보면 꽤나 의심많은 녀석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나는 손끝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 그대로 낚싯대를 잡아당겼고, 강렬한 손맛과 함께 바늘에 내 손바닥만한 놈이 한 마리 끌려나왔다.
강에서 사는 놈들인만큼 이 정도 길이면 평균이었다.
'다른 자매들 몫까지 잔뜩 잡아야겠네.'
낚싯대를 회수하고는 챙겨온 대야에 강의 물을 퍼 담았다. 방금 잡은 생선을 대야에 던져주자 물을 튀기며 펄떡여댔다. 그렇게 다음 물고기를 낚기 위해 미끼를 바늘에 꿰려는데, 아랫쪽에서 아이린과 릴리스가 강에 들어와서는 서로에게 물을 튀겨대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보면 사이좋게 물장구를 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있는 나로서는 또 사소한 일로 다투고는 저렇게 싸우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예상대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튀기는 물의 양이 심상치 않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손으로 물을 튀기는 수준이었지만, 나중에는 양 손에 물을 가득 받아서는 서로의 얼굴을 향해 끼얹었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옷은 물로 젖기 시작했고, 급기야 머리카락까지 쫄딱 젖어서는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장난을 치던 두 사람은 그제서야 추웠는지 사이좋게 돌아왔다.
으슬으슬한 한기에 몸을 떠는 두 사람에게 내 외투를 걸쳐주었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내 외투를 끌어안고 차갑게 식은 몸을 달랬다. 두 사람이 돌아오기 전까지 열댓마리 정도 물고기를 잡았다.
나는 근처 숲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긁어모아 돗자리 옆에 불을 피웠다.
활활 타는 모닥불 옆에 쭈그려 앉은 두 사람은 마치 자매 같았다. 물론 이 말을 들었다간 두 사람 다 불같이 화를 내겠지만.
내 외투를 소중한듯이 꼭 붙잡고 모닥불로 차가워진 몸을 녹이는 두 사람은 꽤나 사이가 좋아 보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몸을 녹이는 동안 나는 낚시를 계속했다. 오랜만에 하는 낚시의 손맛에 매료된 나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세를 잡고 입질이 오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사실 모험가로 활동할 때는 노인네들이 강에서 낚시하는 것을 보고는 왜 저런 시간 낭비를 하고 있나 싶었는데, 낚시에는 이런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도중 몸을 다 녹였는지 어느새 내 곁에 온 릴리스가 대야에 가득 담긴 생선들을 보고 감탄했다.
"우와! 이렇게나 많이 잡았어?"
대야에 담긴 물고기들의 종류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개중에는 드물게 내 팔뚝만큼 긴 녀석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생선의 종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척 봐도 골드 피쉬와 마찬가지로 비싸 보이는 녀석이었다.
물론 이 녀석들을 팔아먹을 생각은 없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오늘 내가 여기 온 목적은 저녁식사에 쓸 생선을 준비하기 위해서니까. 이 녀석들은 한 마리도 남김없이 식탁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
"왜. 너도 낚시 한 번 해볼래?"
"아니. 낚시는 지루하잖아. 차라리 생선들이나 보고 있을래."
아무래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낚시는 릴리스의 성미에 맞지 않나보다. 릴리스는 생선들이 펄떡이며 대야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신기하다는 듯이 보고 있었고, 아이린은 릴리스가 그쪽에 한눈이 팔린틈을 타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가만히 내 옆에 앉아 함께 입질이 오기를 기다리던 아이린은 이제 홀로 내 외투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다만 외투 사이로 그녀의 속살이 비쳤다.
흠뻑 젖은 바지는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었고, 새하얀 셔츠 안에 받쳐 입은 핑크빛 브래지어가 그대로 드러났다. 정작 아이린은 자각이 없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으며 내게 몸을 슬쩍 기댔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아이린의 어리광을 받아주었겠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아이린의 쭉 뻗은 다리와 탄력있는 허벅지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무엇보다도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속옷 때문에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속으로 마법 주문을 외며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 때문인지 이때까지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입질을 몇 번이나 놓치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물고기를 관찰하던 릴리스가 나를 놀렸다.
"뭐야. 또 놓쳤어?"
릴리스는 짓궂게 웃으며 내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릴리스도 아이린과 다를 바 없이 쫄딱 젖어있었다. 특히 물의 수심이 꽤나 깊어서 그런지 릴리스는 완전히 원피스가 물을 먹어 몸에 달라붙었다.
본인은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노골적으로 가슴팍과 허벅지가 드러난 모습에 나는 결국 낚싯대를 바위에 기대어 놓고 릴리스를 불렀다.
릴리스의 원피스의 말려 올라간 옷자락을 잡고 쥐어짜자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앞쪽의 물을 짜낸 다음, 뒤로 돌아보라고 하자 얌전히 내 말대로 뒤로 돈 릴리스의 옷자락을 접어 올려서 짜려는 순간, 나는 사레가 들렸다.
"푸흡!!"
그 이유는 꽤나 말려올라간 뒷부분을 잡는 순간, 천조각 하나 없이 말끔한 릴리스의 둔부가 그대로 노출됐기 때문이다.
순간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싶어 다시 들춰봤지만, 그곳에는 변함없이 예쁜 사과 두 쪽 같은 엉덩이 뿐이었다.
내가 갑작스레 사레에 들리자 아이린과 릴리스가 나를 걱정해주었다.
아이린이 나를 걱정해주는 것이야 그렇다쳐도, 릴리스는 정말로 내가 왜 사레에 들렸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오빠? 갑자기 왜 그래!"
당당하기 짝이 없는 릴리스의 태도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간신히 정신줄을 잡은 나는 릴리스의 양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릴리스. 속옷은 왜 안 입은거야?"
"응? 그야 강가에 놀러간다고 했으니까 안 입은건데?"
강에 놀러가면 속옷을 입지않는다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다.
머리가 점점 아파오는 감각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강에 놀러가는거랑 속옷을 입지 않는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야 속옷이 물에 젖으면 찝찝하잖아."
왜 그런걸 묻냐고 말하는 표정인 릴리스를 보고 나는 그녀의 가치관이 나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릴리스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없고, 늘 저택에서 자매들과 지내다보니 남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인다는 수치심이 전무했다.
결국 나는 한참동안 릴리스를 붙잡고 속옷을 입어야하는 이유와 여자아이라면 함부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몸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릴리스는 납득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다음부터 고기를 구워주지 않겠다고 협박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엿다.
그 동안 아이린은 뭘 하고 있었냐면 릴리스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말에 완전히 얼굴이 붉어져서는 '변태'라는 단어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순수한 아이린에겐 자극이 좀 셌으려나.
하루에 속옷을 두 번식 갈아입는 아이린의 입장에서 릴리스는 말 그대로 변태나 다름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갔다. 대야에 담긴 생선들의 숫자는 얼추 스무 마리 정도 되어보였다.
인당 한 마리씩 먹기 위해 강가에 전격마법을 사용하고 떠오른 생선들을 건져갈까 싶었지만 애들에게 보여줄만한 광경이 아니었기에 그만뒀다.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여기다 샐러리를 곁들여 먹으면 한 끼 식사거리로는 충분하겠지.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해가 저물어서 어둑어둑 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모네는 흠뻑 젖은 릴리스와 아이린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의 뒷덜미를 붙잡고 욕탕으로 데려갔다.
가기 싫다며 버둥거리는 릴리스와 다르게 아이린은 어딘가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나는 그동안 부엌에서 양 팔을 걷어붙이고 잡아온 생선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칼로 비늘을 벗겨내고, 그 다음에는 배를 갈라 창자와 남아있는 핏물을 싹 빼냈다.
그리고는 흐르는 물에 속살을 가볍게 씻어냈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스무 마리도 넘는 생선을 일일이 손질하려니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손질을 끝낸 다음에는 불판에 기름을 가볍게 두르고, 생선을 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 역시 밖에서 오랫동안 있었던만큼 목욕이 간절했다.
찝찝한 채로 생선을 굽던 도중, 모네가 말끔해진 아이린과 릴리스를 데리고 돌아왔다.
비에 젖어 머리가 헝클어졌던 릴리스는 평소처럼 뽀송뽀송한 피부에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과시하고 있었다.
아이린은 뜨거운 욕탕에서 나온지 얼마 안 되서 그런지 얼굴에 홍조를 띄고 있었다.
어쩐지 평소보다 쭈뼛거리며 자꾸만 내 눈치를 보는 것이 신경쓰이긴 했지만, 정작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서는 모네의 등 뒤로 숨어버렸다.
혹시 내가 아이린을 기분 나쁘게 할만한 짓을 했나 떠올려봤지만 짐작 가는게 없었다.
아니, 하나 있긴 한가.
방금 전 릴리스의 둔부를 봐버렸다는 것.
하지만 그건 사고였고, 나 역시 보자마자 눈을 돌렸기에 저렇게 경계당하는 것은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