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Ch 39 -변태?- -->
아이린의 그런 태도에 가슴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릴리스의 둔부를 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늘 내게 미소를 지어주며 다가왔던 아이린이 저런 모습을 보이자 가슴 한 켠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모네에게 생선을 굽는 것을 맡기고 욕탕으로 향했다. 모네에게 생선 요리의 레시피는 모두 알려줬으니 별 문제 없이 해낼 수 있겠지.
욕탕에 온 나는 입고있던 외투와 바지를 벗어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 모네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인지 내가 씻고 나왔을 때 갈아입을 옷도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오늘로 이 욕탕도 마지막인가. 사흘 동안 저택에서 머무르면서 가장 즐겼던게 이 욕탕인데. 조금은 아쉬웠다.
내 집에 있는 욕실도 작지는 않았지만, 어지간한 귀족가의 욕탕보다 화려하고 넓은 이 곳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사자상 같은 것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었다.
조각의 명장에게 직접 주문제작을 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간신히 받을 수 있으니까.
뜨거운 욕탕에 몸을 담근 채 방금 전 아이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못볼 걸 본 것처럼 놀라서 숨어버리던 아이린.
"...하아."
차가운 수건을 이마에 올리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억울하긴 했지만 아이린도 조금 시간이 지나면 내 상황을 이해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 저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조금 놀랐기 때문이겠지. 금세 평소처럼 돌아와서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줄 것이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욕탕에서 몸을 씻고 나오자 서늘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수건으로 다시 한 번 몸을 닦은 다음,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던져넣었다.
모네가 챙겨준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식당으로 내려왔다. 이미 식사 준비를 마쳤는지 고소한 생선 냄새가 잔뜩 풍겨왔다.
비록 마리수가 조금 부족해 생선을 잘라 접시에 담아주었는데, 각기 다른 생선의 부위를 다양하게 받을 수 있어서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모네의 지시였는지 몰라도 그녀들은 먹음직스럽게 발라놓은 생선을 눈 앞에 두고도 가만히 앉아있었다. 내가 온 것을 확인한 모네는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을 권했다.
다른 접시보다도 눈에 띄게 많은 양이 담겨있는 것을 보니 신경을 써준 듯 했다.
내가 수저를 들고 생선을 한 점 찍어먹자 그제서야 다른 자매들도 수저를 들었다. 그들 중 몇 명은 모네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모네가 따로 교육을 한 모양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조금 부담스럽지만 모네의 행동을 내가 말릴 수도 없었다. 맏언니인 모네의 말을 번복시켰다간 그녀의 자존심이 깨질 수도 있으니까.
아, 호문쿨루스니 자존심같은 건 없으려나?
'아무리 호문쿨루스라고 해도 평소에 하는 행동을 보면 그냥 미녀들같단 말이지.'
그래도 나는 최대한 그녀들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자신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혹은 자신과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깔보고 멸시하는 이들을 많이 봐왔다.
그런 놈들은 하나같이 적이 많았고, 얼마가지 못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곤 했다.
내 스승 역시 늘 내게 겸손하고 자만하지 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는 말도 함께.
생선은 안쪽까지 잘 익혔는지 껍질은 바삭했고, 속살은 담백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쉬지않고 수저를 움직였고, 접시 위에 놓인 생선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릴리스는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의 몫을 다 해치우고는 다른 사람의 것까지 탐내고 있었다. 생긴건 요조숙녀처럼 생겨서는 먹보가 따로 없었다.
"야야. 괜히 다른 사람거 탐내지 말고 이리와."
은근슬쩍 옆 자리의 자매에게 찰싹 달라붙어 애교 공세를 퍼붓고 있던 릴리스는 그제서야 내 쪽을 쳐다봤다.
모네가 워낙 많이 담아주기도 했기에 남은 생선을 릴리스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특히 살이 두툼하고 기름기가 흐르는 부위를 본 릴리스의 눈이 빛났다.
허겁지겁 다시 생선을 먹어치우는 릴리스를 턱을 괸 채 쳐다봤다.
자세히 보면 식사예절 하나 지키지 않고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지만, 타고난 외모 때문인지 그런 모습조차도 어리광부리는 아이 같아서 귀여웠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하기 짝이 없군.
그런 릴리스에 반해 아이린은 입맛이 없는지 접시를 깨작거리며 좀처럼 먹질 않고 있었다.
"아이린. 혹시 입맛이 없니?"
처음 접시와 비교해서 양이 거의 줄지 않은 모습을 보고 묻자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았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오지랖을 떨 수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몸에 문제도 없었고, 아마 머릿속에 생각이 많이 들어서 그런게 아닐까?
"그래. 혹시라도 몸이 안 좋으면 언제든지 말해주렴."
"...네."
대답하는 아이린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나는 배를 마저 채우기 위해 부엌에 있던 과일을 챙겼다.
사과, 딸기, 오렌지 등 갓 따온 신선한 과일들을 가만히 둘러보던 나는 오랜만에 보는 딸기를 접시에 담았다.
봄도 아니고 여름의 끝물에 딸기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다른 과일들도 제철이 되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는데 벌써 다 익었던 것도 이상했다.
그렇게 딸기를 하나 집어 입 안에 넣고, 꼭지 부분을 떼어냈다.
딸기를 씹는 순간 터져 나오는 과즙의 달콤함과 묘한 쌉싸름함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과육을 씹을 때마다 흘러나오는 진한 향기에 나도 모르게 한 알을 더 집어먹었다.
그야말로 마약에 가까운 중독성에 결국 나는 접시에 담긴 딸기를 다 먹어버렸다. 그 귀하다는 겨울 산딸기도 먹어봤지만 이것과 비교하는게 미안할 정도였다.
그렇게 다 먹은 꼭지 부분을 접시에 담아 갖다 버리려는데, 실수로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려버렸다.
의자를 뒤로 빼고, 허리를 숙여 흘린걸 주우려고 하는데, 그 순간 탁자가 크게 들썩이며 빡!하고 어딘가에 들이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요란스런 소리에 일어나보니 벌겋게 부은 무릎과 다리를 부여잡은 채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아이린이 보였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피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평소에는 늘 어른스럽던 아이린도 이런 고통은 참지 못하겠는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다른 자매들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아이린은 갑자기 탁자에 무릎을 들이박았는지 궁금했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었다.
"아이린. 괜찮니?"
다급하게 아이린에게 다가가면서 스스로가 해놓고도 병신같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울먹이는 애한테 괜찮냐니. 내 멍청한 질문에 아이린은 그걸 또 고개를 끄덕이려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린을 그대로 안아들었다.
예전에 비해서는 체격이 커졌지만, 내게는 여전히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따라오겠다는 모네에게 괜찮다고 대답한 나는 아이린을 데리고 창고로 향했다.
아이린은 연신 울먹이면서도 최대한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었다.
"참지 마렴. 아프면 아프다고 해도 된단다."
나는 둔감해서 정말로 괜찮은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
그러니 아이린이 혼자서 끙끙 앓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줄테니까, 좀 더 내게 의지해줬으면 좋겠다.
다행히 아이린은 내 말을 듣고는 억누르던 신음을 참지 않고 흘렸다.
"...흐윽...하아...흐으윽..."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온 다음, 방의 전등을 켰다. 구석에 놓여있던 의자를 끌고와 그 위에 조심스레 아이린을 앉혔다.
아이린은 의자에 앉는 것조차 괴로워는지 고통 섞인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전등의 희미한 불빛에 비치는 아이린의 무릎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었다.
어제 내가 정리해놓은 포션 병을 살펴보던 나는 잠시 고민하다 요사한 보랏빛을 내뿜는 포션병을 꺼냈다.
포션들의 효과에는 제각기 다른 효과가 있었는데, 이건 그 중에서도 특별한 놈이었다.
포션이 닿는 부위의 감각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며, 몸의 상처를 순식간에 치유하며 새 살을 돋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엘릭서는 아니어도, 그 바로 아랫줄 정도는 되는 효능이었다.
특히 이 포션은 트라다 쿠스만이 손수 치유 마법을 걸어놓기까지 했다. 탁하지 않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포션의 빛이 그 증거였다.
어지간한 신관의 치유 마법보다도 효능이 뛰어났다.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가 피가 흘러나오던 부위는 금세 새 살이 돋았고, 시퍼런 피멍으로 부어있던 무릎은 평소처럼 새하얀 색으로 돌아왔다.
다리를 붙잡고 울던 아이린도 순식간에 고통이 멎자 깜짝 놀라서는 눈물이 고인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주머니에 든 손수건을 꺼내 그런 아이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 엉망이었지만 그래도 눈물을 그친 아이린을 보고 안도했다.
아이린은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그래도 방금 전처럼 억지로 웃는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그녀의 무릎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울음을 그치고 진정한 아이린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보인 모습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딱 봐도 얼굴에서 열이 나는 것이 여기까지 전해졌지만, 나는 모른척해주기로 했다.
"그럼... 일단은 여기까지..."
그 순간 밀폐된 지하실에서 원인 모를 바람이 불어왔다.
아이린은 씻고 돌아왔을 때부터 가벼운 원피스 차림이었고, 울면서 흐트러진 원피스가 바람에 펄럭이며 올라간 것은 어떻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평소 같았으면 아이린이 입고 있던 속옷이 드러나고 서로 어색한 분위기가 되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본 것은 속옷이 아닌 다른 무언가였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던 것과 아주 흡사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릴리스의 경우에는 뒤쪽이라 치부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나와 마주보고 앉아있던 아이린의 치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것일까.
그래. 놀랍게도 아이린은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순간 데자뷰를 느낀 나는 눈 앞에 있는게 릴리스인지 아이린인지 잠시 고민에 빠져야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이린에게 노출벽이 생긴걸까? 아니면 욕탕에서 씻고 나올 때 속옷을 입는 것을 깜박했나?
제발 마지막 생각이기를 빌었지만 눈 앞의 아이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떨고 있는 아이린을 보니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내가 떨어진 것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때 깜짝 놀라서 다리를 빼다 무릎을 탁자에 들이박았던 것.
의자에 앉을 때 엉덩이가 닿자 몸을 떨었던 것 등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들마저 조각을 맞춰나갔다.
하나같이 아이린의 고의성을 강조하는 증거가 속출했고, 나 역시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릴리스야 자각조차 없었기에 교육을 했지만 아이린이 그런 걸 모를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혼을 내야한다는 소린데...
'어떻게?'
살면서 이런 이유로 말문이 막힌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서서히 아이린의 요오오오망한 구석이 드러나게 되는데...!
2.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은 꼬박꼬박 확인하고 있으니 오타나 오류가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3. 사실 이번편을 쓰면서 너무 고민을 많이했습니다. 이때까지 이 소설에서 성역처럼 취급받던 아이린의 이런 변태같은 모습을 쓴다고 생각하니 엄청난 배덕감이...!
4. 아.이.린.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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