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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210/260)

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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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아이린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말만 하지 않고 있다 뿐이지 그녀도 사실은 엄청나게 동요하고 있었다.

잘 익은 토마토마냥 붉어진 얼굴을 보니 적어도 릴리스처럼 수치심이라는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이린도 요즘들어 욕실에서 씻고 나올 때면 수건만 두른 몸으로 유혹하는 듯한 시선을 보낸 적이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곳을 보여주지 않는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방금 전 릴리스의 일이 있었기에 쉽사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창고에서 계속 있기도 그랬기에 아이린을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아이린은 복도를 걷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문을 잠그고 아이린을 침대 위에 앉혔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무릎을 꿇은 자세로 정좌했다.

머릿속으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자 먼저 아이린을 꾸짖는 것 대신 달래듯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래서 속옷은 왜 안 입고 있던거니?"

물어보는 나도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리는데 대답하는 아이린은 어떨까.

그녀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했지만 나는 조금 더 기다려주었다.

아이린은 부끄러움을 참고 조심스레 진실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내 반응을 신경쓴다는 것을 알았기에 겉으로는 최대한 담담한 척 연기했다.

"사실은... 주인님의 릴리스의 그...엉덩이를 보시고 놀라시길래..."

"그게 왜?"

역시 낮에 있었던 일이 기폭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조금 질투가 나서... 저도 주인님한테 보여드리고 싶어져서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모르게..."

거기까지 말한 아이린은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낮에 있었던 릴리스와의 일 때문에 아이린의 질투심이 잘못된 방향으로 뻗어나간 듯 했다.

'그렇다고해서 속옷을 안 입는다는 결론은 아이린답지 않았지만.'

성실하고 어른스러운 아이린에게 이런 면이 있는줄은 처음 알았다.

아마 평소 투닥대던 릴리스가 상대였으니 홧김에 그녀를 따라하는 행동을 해서 내 관심을 끌려고 했던게 아닐까.

"그래도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모습은 절대 하면 안 돼. 나중에 아이린 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한테만 하렴."

"...그럼 주인님은 괜찮은건데..."

내 따끔한 훈계에 아이린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워낙 작은 목소리라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사실 지금 아이린 앞에서 태평한 척 하고 있는 나도 방금 전에는 정말 놀랐었다.

원피스가 들춰진 것은 아주 잠시였지만 그때 본 광경이 내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새하얀 배꼽 아래에 나 있던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요염한 보랏빛 음모가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자꾸만 그런쪽으로 생각이 들자 머리를 흔들며 잡념을 떨쳐냈다. 사실 변명하자면 내가 이러는데도 이유는 있었다.

지난번 마리안과 에디스에게 각각 목걸이와 팔찌를 선물한 이후, 아이린이 반지를 선물해달라고 했었다.

아이린이 이성이 반지를 선물하는 것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기에 나는 두근거릴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아이린도 내게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나를 놀려먹기 위해 반지를 요구한 것인지 가늠했다.

나이 서른 먹고 이런걸로 두근대는 것이 웃긴 일이라는걸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이때까지 만난 여자가 몇인데, 내 나이의 절반도 안 되는 애를 상대로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정말로 내가 미친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이미 눈 앞의 소녀는 성인과 다를 바 없는 몸을 가졌고, 정신적으로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성숙해져 있었다.

물론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은 어린애같은 구석이 있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귀여운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사실 아이린의 억눌려 있던 본성이 튀어나온게 아닐까 싶어서 조마조마했던 찰나였다. 내 마음의 안식처나 다름없던 아이린에게 변태스런 취미가 생기는 일은 바라지 않았다.

'결국 괜한 걱정이었지만.'

"그러고보니 무릎은 이제 괜찮니?"

겉으로 보기에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게 치료되었지만 혹시나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다.

"네. 주인님 덕분에 이제는 하나도 안 아파요. 헤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작게 주먹을 쥔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통통 두드려 보인 아이린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아 보이는 모습에 안심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결국 그 날은 아이린과 좀 더 담소를 나누다 난입한 릴리스와 함께 그녀를 자신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린은 돌아가기 싫어하는 눈빛이었지만 오늘도 같은 침대를 썼다간 내가 잠을 못 잘 것 같았기에 딱 잘라 거절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날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마지막 날의 아침에는 모네에게 골렘과 공터의 관리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아공간 주머니에 남아있던 고기를 주었다.

짐승을 사냥하는 것은 릴리스가 있으니 그렇다쳐도 그걸 도축할 사람이 없었기에 남아있던 고기를 탈탈 털어 주었다.

평소처럼 담담하게 감사하다고 대답한 모네도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고기에 맛을 들인 다른 자매들을 위해서라도 자주 찾아와야겠다.

내가 의외였던 것은 릴리스였다. 지난번처럼 나를 따라가겠다고 떼를 쓸 줄 알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자신은 저택에 남아있겠다고 했다.

말괄량이에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릴리스가 저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기에 오히려 내가 더 걱정됐다.

"정말 괜찮겠어?

"흥. 오빠는 날 어린애 취급하는거야?"

그야 평소에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는 어린애였으니까.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삼켰다.

"처음에는 나도 영지 밖을 돌아다니는게 좋았지만, 며칠 지내보니 금세 질려버렸는걸. 게다가 오빠는 매일같이 집에만 있고."

"그야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니까 집에만 있는건 당연한거지."

릴리스는 내 집에서 머무르는 동안 워드와 노는 것을 제외하면 할 일이 마땅히 없었다. 그나마 다른 애들과 함께 놀러다니거나 아이린과 투닥대는 것 정도일까.

"그러니까 나중에 오빠가 다른 곳에 여행을 가게되면 그때 데려가줘. 그 전까지는 언니들이랑 같이 있을래. 게다가 오빠가 만들어놓은 골렘이라는 것도 꽤나 재밌어보이고."

릴리스도 골렘에 대해 들었나. 확실히 릴리스가 보기에는 무섭다기 보다는 재밌는 장난감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한창 모험가로 활동할 때인 십 년 전에 릴리스를 만났더라면 그녀의 바람을 이뤄줄 수 있을텐데. 나는 릴리스에게 기약 없는 약속을 해줄 수 밖에 없었다.

"히히. 괜찮아. 이미 오백 년이나 기다렸는걸? 몇 년 정도 더 기다리는 건 문제도 아니야."

마치 내 속을 읽은 듯한 릴리스의 말에 놀라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평소처럼 꺄르륵 웃을 뿐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모네와 다른 자매들은 모두 나와 아이린이 돌아가는 것을 배웅했다.

응접실에 새겨놓은 마법진을 발동시키자 모네를 비롯한 자매들은 기품있게 허리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주인님.""

오직 릴리스만이 그녀다운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이린 역시 그런 릴리스와 마주보며 의미모를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친해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마지막 영창이 끝나는 순간 새하얀 빛이 나와 아이린의 몸을 휘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익숙한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며칠 동안 트라다 쿠스만의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지내다 돌아오니 어쩐지 내 집이 초라해 보였다.

저택에서 챙겨온 짐을 풀어 정리하는 동안 아이린에게 청소를 부탁했다. 며칠 동안 가게를 비웠기에 잔뜩 쌓인 먼지를 치우려면 한참 걸릴게 분명했다.

아이린은 닫혀있던 가게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것과 함께 걸레를 빨아 진열장에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며칠 동안 비가 온 덕분에 평소보다는 먼지가 적었다는 것이다.

진열장을 모두 닦은 다음에는 빗자루로 바닥을 쓸었다. 나 역시 챙겨온 서적들을 분류별로 정리해 책장에 꽂은 다음 빗자루로 방바닥을 쓸었다.

그렇게 한창 대청소를 하던 도중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안녕. 아이린? 루디 씨는 안에 계시니?"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제시카였다. 당연하게도 제시카의 곁에는 그녀의 언니 안젤리카도 함께였다.

제시카는 넉살좋게 아이린에게 말을 걸었고, 아이린은 그런 두 사람을 가게 안으로 안내했다.

아직 청소가 덜 끝나서 평소보단 난잡했지만 두 사람 다 그런걸 신경쓰지는 않았다.

나는 들고있던 빗자루와 쓰레받이를 구석에 치워놓고 손을 씻었다.

"급한 용무라도 있으십니까?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만."

전에 가게 창문에 붙여놓았듯이 오늘까지는 휴업이었다.

분명 두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있을텐데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은 급한 다른 일이 있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아직 장마가 그친지 얼마 안되서 그런지 제시카와 안젤리카 모두 평상복차림이었다.

아직 땅이 채 굳지도 않았는데 벌써 모험을 나가는 사람은 모아놓은 돈이 한 푼도 없는 오늘만 사는 놈들 뿐이었다.

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안젤리카가 치마에 새하얀 셔츠를 입으니 색달라 보였다.

특히 몸 전체를 덮는 로브를 입고 있을때도 감추지 못하던 여성스러움이 더욱 부각되었다.

물론 동생인 제시카도 꾸준한 운동으로 단련된 몸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젤리카의 육덕스러운 몸이 더욱 끌렸다.

반면 제시카는 펑퍼짐한 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잘 빠진 엉덩이와 셔츠 아래로 배꼽이 슬쩍 보였다.

지난번에 내가 몸가짐을 조심하라고 분명 말했을텐데도 이런 옷차림이라니. 경계심이 없어도 너무나도 없었다.

만약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저런 옷차림이라면 자신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오해받기 딱 좋았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우선은 용건을 듣기로 했다.

"급한 일은 아니에요. 사실 저희도 전해달라고 부탁받은 것 뿐이거든요."

"부탁이라뇨?"

"사실 며칠 전에 루디 씨 가게 앞을 지나가다가 한 아저씨가 가게 앞에서 서성거리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거든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루디 씨에게 '앨리스'님의 말씀을 전해야하는데 자리를 비우셨다고 하시길래 내용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대신 전해드린다고 했어요."

나는 평소 가게를 찾아오던 바스티안 가문의 집사를 떠올렸다.

나름대로 멋드러지게 늙은 노신사조차 제시카에게는 아저씨에 불과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다들 즐거운 추석 보내셨나요. 저는 추석 내내 이번편을 붙잡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버렸답니다... 으아아...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글을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결국에는 완전히 갈아엎어버렸답니다. ㅠㅠ.

2. 때문에 의도치않게 며칠이나 휴재를 해버리고...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꾸벅)

3. 대신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연참을 할 예정이니 그걸로 너그러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핫...

4. 다들 즐거운 추석되셨기를 바라며 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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