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2화 (212/260)

212화

<-- Ch 40 -가주(家主)- -->

걸을 때마다 묵직하게 울려퍼지는 발소리에는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그는 내 뒤에 섰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에 일흔이 넘었다고는 믿겨지지 않는 근육질의 몸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입고 있는 셔츠를 찢을 기세로 근육이 꿈틀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스티안 가문의 가주이자 영지의 주인인 남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루디라고 합니다."

"흠. 나는 제이크 드 바스티안이라고 하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바스티안 가문의 가주를 맡고있지."

옆으로 쓸어넘긴 백발과 하얀 수염은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날카로운 그의 눈빛은 소드 마스터의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악수를 위해 내민 그의 손은 흉터 투성이였는데, 손을 내밀어 맞잡자 묵직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만약 평범한 사람이 상대였다면 그대로 손이 부서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악력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눈살 찌푸리는 것을 보고도 그는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이것 참. 상상 이상으로 재밌는 친구였구만."

그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귀가 쩌렁쩌렁 울렸다.

다른 메이드들은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일찌감찌 양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우선 자리에 앉게. 딸아이는 조금 있다 내려올테니 그동안 남자들의 대화를 나눠보자고."

그렇게 말하는 가주의 눈은 호승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내 맞은편의 상석에 앉았다.

오른손을 들어올리자 옆에 대기해 있던 메이드가 그의 목에 냅킨을 걸어주며 본격적인 식사의 준비를 마쳤다. 오늘 나를 맡게된 메이드 역시 냅킨을 내 목에 걸어주었다.

"비록 차린건 없지만 사양말고 들게나."

옛 기억을 되살리며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들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예법은 헬레나가 직접 가르쳐준 덕분에 다른 귀족과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예전에 연회에 참석했을 때도 정장을 입고 얌전히 서 있으면 귀족가의 자제인줄 알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물론 일개 모험가라는 사실을 알고는 다들 화를 내며 돌아가버렸지만.

"호오. 혹시 이런 예절을 따로 배운 적이 있는가?"

"예전 동료가 가르쳐줬습니다."

"좋은 동료를 뒀구만 그래."

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며 느긋하게 말했다.

나는 스테이크를 조금 밀어놓고 에피타이저부터 찾았다. 이 정도로 많은 음식을 보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었다.

이렇게나 다양한 메뉴를 준비한 걸 보면 요리장이 꽤나 솜씨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향은 일단 합격점이고, 맛은...

스푼으로 스프를 한 입 떠서 먹어보자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뭘 넣었는지 몰라도 자극적인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우리 주방장 솜씨가 꽤나 괜찮지? 이래봬도 수도에서도 손꼽히는 식당을 운영하던 녀석이었다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이런 변방의 영지 주방장으로 데려왔는지가 궁금했지만 괜한 질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제국의 검이라 불리우는 남자니 내가 모르는 인맥이 있었겠지.

스프를 먹은 다음에는 옆에 놓여있던 빵을 집어들었다. 방금 막 구워낸 따끈따끈한 빵이었다.

바삭바삭한 식감과 함께 연한 치즈향이 풍겨왔다. 내 입맛에는 조금 느끼했지만 충분히 맛있었다. 다만 빵은 평소 크루거의 가게에서도 사 먹었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동네 가게인 주제에 귀족가 주방장이랑 비견되는 제빵 솜씨라니. 그 아저씨도 정체가 궁금하단 말이지.'

적어도 다른 싸구려 빵집이랑 같은 값을 받고 팔만한 빵은 절대 아니었다.

"왜 그러나? 빵은 입맛에 안 맞는겐가?"

"아뇨. 맛있습니다. 단지 평소에 먹던 것에 비해 조금 느끼해서 놀랐을 뿐입니다."

돈이 많은 가정일수록 더 많은 향신료나 재료를 넣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퍽퍽한 빵과 감자만 먹는 평민과 고급스런 만찬을 즐기는 귀족들의 식습관은 완전히 달랐다.

모험가로 활동할때 건조식량을 밥처럼 먹었던 나 역시 처음 가본 귀족들의 연회에서 가장 놀랐던게 이 부분이었다.

"그래도 자네는 이런걸 꽤나 많이 먹어봤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안 그런가?"

"뭘 말씀하시고 싶은겁니까?"

"자네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건 이미 알고 있어. 딸아이를 치료했을 때부터 이렇게 직접 만나보고 싶었지만 드디어 만나게 됐구만."

그는 묵직한 시선으로 나를 한 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자네는 내 딸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얌전히 이야기를 듣다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그대로 뿜을 뻔했다.

뿜기 직전에 내가 지금 영주의 앞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직전에 간신히 참았지만 그 반동으로 사레에 들렸다.

"쿨럭! 콜록! 콜록!"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기침을 해대는 나를 쳐다보는 영주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장난이라며 아까처럼 호탕하게 웃어대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진심이었나?

옆에 놓인 물잔에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됐다.

"...무슨 뜻입니까?"

나도 모르게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기에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영주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라네. 자네가 내 딸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렇다네. 혹시라도 사위가 될 사람이라면 나도 알아둘 필요가 있으니까."

사위라는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평민인 제가 어떻게 영애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과한 걱정이십니다."

"글쎄. 적어도 내 딸은 자네에게 마음이 있는걸로 보였는데 말이야."

내가 슬쩍 빠지려 했지만 영주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러니 솔직한 자네 생각을 들려주면 좋겠군. 자네에 대한 판단은 그 뒤에 하도록하지."

어느새 수저를 놓은 그는 마치 야수와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백에 다른 메이드들은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있었다.

"좋은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지의 주민들을 정말로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노력하시는게 느껴지니까요.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일겁니다."

"이성적으로는 어떤가?"

"아름다운 분이지만 제가 어찌 앨리스님을 넘보겠습니까? 나이차도 나고, 저는 일개 평민이잖습니까."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영주는 잔에 가득 담긴 와인을 단숨에 비웠다.

어차피 소드마스터쯤 되면 어지간한 술로는 취하지도 않기에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연거푸 세 잔이나 마셔댄 영주는 와인병이 빈 것을 확인하고는 메이드에게 새 와인을 가져오게 했다.

"자네도 알겠지만 앨리스는 영지를 물려받을 수 없다네. 그래서 다른 귀족가의 차남이나 삼남과 관계를 맺는 수 밖에 없지."

지난번에 앨리스에게도 들었던 말이었다. 가문을 물려받는 것은 당연히 남자다.

하지만 바스티안 가문에는 앨리스를 제외한 자식이 없으니 외부에서 남자를 데려와야하는 형편이었다.

물론 다른 귀족들도 이 사실을 알테니 바보가 아니고서야 장남을 보낼리가 없다.

자기 가문을 물려받을 장남이 아닌 차남이나 삼남을 보내 바스티안 영지를 집어삼키려 들겠지.

물론 그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었다. 사실 이쪽 방법이 훨씬 간편하고 쉬웠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그렇지만, 새로운 부인을 들이실 생각은 없으신겁니까?"

그래. 조금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새로운 정실을 들여 아들을 낳으면 된다.

여전히 팔팔해 보이는 영주라면 몇 달 안에 새로운 아이를 가질 수 있겠지.

"미안하지만 나는 아내를 잃으며 더 이상 새로운 여자를 품지 않기로 약속했다네."

문란한 귀족의 성생활을 익히 알고 있는 내게 영주의 말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가장 낮은 계급인 준남작도 첩을 두셋씩 거느리는게 보통인데 죽은 아내와의 정절을 지키는 영주라니.

그가 살아생전 얼마나 아내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앨리스에게는 미안하게 생각하네. 못난 아비 때문에 가문을 물려받아야만하는 처지가 되버렸으니."

씁쓸하게 자조하던 그는 메이드가 새로 들고온 와인을 건네받았다. 마개를 뽑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짙은 포도향이 퍼져나왔다.

얼마나 독한 놈인지 피처럼 붉은 와인을 잔에 가득 채운 그는 내게 고갯짓했다. 나는 빈 잔을 내밀었고, 그는 내 잔에도 와인을 가득 따라 주었다.

"비록 가문은 물려받아야겠지만, 나는 앨리스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졌으면 좋겠다네. 그래서 자네를 이렇게 부른거고."

"앨리스 영애가 평민 남편을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다른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겁니다."

당장 지난번 그레이스 공작가도 그렇고, 호시탐탐 바스티안 영지를 노리는 귀족들은 꽤나 있었다.

"큭큭. 그래봤자 그 놈들이 뭘 할 수 있는가? 중앙에서는 이런 변방의 영지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혈통만 따지는 그놈들도 몇 년 있으면 잠잠해질걸세."

영주는 정말로 그들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검 하나로 황실 기사단장까지 올라갔던 사람이었다. 황족이나 공작들을 매일같이 봤던 양반이라 그런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가장 위협적이었던 그레이스 공작가 역시 내 도움으로 완전히 쫓아내버렸으니 바스티안 영지에 협박을 할 수 있는 간 큰 귀족은 없었다.

내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또각거리는 걸음소리와 함께 앨리스가 식당에 걸어들어왔다.

그녀가 평소 내 가게를 찾아올 때와는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우아하게 걷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설원의 공주를 연상시켰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손짓과 눈빛은 매혹적이기 짝이 없었고, 순백색 머리카락은 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였다.

기품 넘치는 그녀의 표정과 태도에서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앨리스에게 홀려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모르게 평소보다 기합이 들어간 앨리스를 넋 놓고 쳐다봤다.

앨리스는 평소 잘 꾸미고 다니지 않았다. 메이드들이 해주는 최소한의 화장만을 하고, 장신구도 거의 하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본판이 예쁜만큼 그녀의 미모가 어디가진 않았지만.

하지만 지금 가슴골이 움푹 파인 요염한 드레스를 입고 달콤한 향수까지 뿌린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영주가 그런 나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나는 영주가 파 놓은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으으... 드디어 바쁜 월화수를 넘기고 목요일이 됐습니다. 오늘은 공강이니 저녁이나 밤쯤에 한 편 더 올라갈 예정입니다.

2.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설정 오류나 오타는 댓글로 남겨주시면 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3. 쿠폰은 작가의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