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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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아. 조금 늦었구나."
"아버지가 늦게 내려오라고 하셨으면서 무슨 소리세요?"
앨리스는 지금의 상황이 탐탁지 않은지 영주를 한 번 쏘아보고는 내 옆의 의자를 끌어앉았다. 당연히 아버지 곁에 앉을 줄 알았던 나는 조금 놀랐다.
"혹시 루디 씨한테 이상한 소리라도 한 건 아니죠?"
"그럴리가. 그저 남자들끼리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란다."
앨리스는 영주의 대답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명석한 아이니 영주가 나를 부른 이유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앨리스가 아버지를 말리려는 것은 더 이상 내게 빚을 지고 싶지 않다는 이유겠지.
앨리스는 처음 나를 만났을 때 무리한 부탁을 했고, 나는 그걸 단칼에 쳐냈었다. 앨리스는 그 후로 최대한 내 편의를 봐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 역시 은혜를 잊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갚으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호감을 품었던 것이고.
'물론 첫만남은 최악이었지만, 그때는 그녀도 절박했으니까.'
오늘 영주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나자 앨리스가 어떤 심정으로 나를 찾아왔었는지 실감이 났다. 가문을 송두리째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달려왔던 것이겠지.
앨리스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하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혹시 아버지가 이상한 소리를 하셨더라도 신경쓰지마세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내가 와인을 홀짝이며 웃어보이자 앨리스는 그제서야 너무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얼굴에서 열이 나기라도 하는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부치는 그녀는 노골적으로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방금 전 공간을 휘어잡았던 여왕같은 압박감은 이미 사라졌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아직 스킨쉽에 서투른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비록 맞은편에 앉은 영주가 기분나쁘게 히죽댔지만 눈 앞의 앨리스는 내가 이때까지 봐온 그녀의 모습중 가장 아름다웠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아름다우시군요."
이것 봐. 다른 귀족들이라면 평범하게 하는 가벼운 칭찬조차 앨리스는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서는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병상에 누워 있어서 그런지 연애 경험의 부재가 여기서 드러났다.
바스티안 가문이 변방의 영지인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수도에 있는 앨리스 또래의 영애라면 매일같이 다과회나 연회에 참가할테고, 그곳에서의 주된 화제는 당연히 연애였다.
그에 반해 앨리스는 저택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드물기에 다른 남자를 만나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이렇게 속이 빤히 보이는 칭찬에도 내성이 없었다.
"그럴 생각이 없다고 한 것 치고는 꽤나 사이가 좋지 않은가."
"놀려먹는 재미는 있으니까요."
앨리스와 마주보고 있던 고개를 돌리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앨리스는 방금 전의 내 말이 신경쓰이는지 스프를 떠 먹으면서도 자꾸만 내 쪽을 힐끔거렸다.
"끌끌. 그래도 아직 시간은 한참 남았으니 생각이 바뀌면 언제라도 이야기해 주게. 자네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어."
"과분한 기대를 실망시켜드릴까봐 두렵군요."
"그건 자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하여튼 한 마디도 지려들질 않았다.
단순히 검에만 평생을 바친 전투광인줄 알았는데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다행히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식사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눈치를 보던 앨리스도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를 내 옆으로 옮겨서 권했고, 나는 기꺼이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영주가 끼어들었다.
"이미 저녁도 늦었는데 오늘 하루는 자고 가는게 어떤가?"
"죄송하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있어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흠... 그러고보니 친척의 아이를 맡고 있다고 했던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영주를 본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라도 영주가 아이린에게 관심을 가지면 골치가 아팠다.
다행히 앨리스도 아이린의 정체까진 말하지 않은 것 같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마족의 이미지는 몹시 좋지 않았다.
특히 기사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멸해야할 존재중 하나였다.
앨리스의 아버지인만큼 상황을 설명하면 이해해줄 수도 있겠지만, 괜한 약점을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식사가 슬슬 마무리 지어졌다. 여전히 식탁 위에는 음식들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애초에 세 명이서 모두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아마 남은 것은 메이드나 주방의 요리사들이 먹어치우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대신 다음에 또 오게나. 그 때는 대련이라도 한 번 해보자고."
"소드마스터께서 일반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시려는겁니까?"
"자네가 일반인이라면 어떻게든 소드 오러를 일으켜 보려는 기사 지망생들은 죄다 머저리겠군."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눈빛을 교환했다.
"...알겠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다음에 또 찾아오도록하죠."
영주는 내 대답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식당을 나가기 직전, 몸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나도 아직 제대로 감사 인사를 못했군. 딸아이를 치료 해준 것과 도와준 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고맙게 생각한다네. 설령 자네가 내 제안을 거절한다 해도 자네를 영지에서 쫓아낸다거나 하는 속 좁은 짓은 하지 않을거야. 기사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고개를 숙여 예의를 표한 영주는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한 가문의 가주가 고개를 숙이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적어도 바스티안 영주는 내게 예의를 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거겠지.
'보답을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네.'
전에는 남들이 뭐라고하든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받으면 묘한 고양감이 들었다.
나쁜 현상은 아니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앨리스가 내 팔을 덥썩 잡았다. 앨리스의 목소리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 바래다 드릴게요."
여자가 남자를, 그것도 귀족 영애가 손수 바래다 준다는 영광을 거절할 정도로 나는 간덩이가 크지 않았다.
호위가 필요하냐는 메이드의 물음에 앨리스는 필요없다고 대답하고는 나를 데리고 저택을 나섰다.
정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우리를 힐끔 쳐다봤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못본 것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걷자 앨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드디어 둘만 남게 됐네요."
만약 다른 여자가 그런 말을 했다면 명백한 유혹으로 받아들였겠지만 상대는 앨리스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빠르게 걸어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어다니는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가만히 계십시오."
내가 손수건을 내밀자 부끄러운지 한 걸음 물러나는 앨리스였지만 결국에는 내게 잡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자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앨리스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눈 떠도 됩니다."
앨리스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미 어둠이 짙게 내린 거리라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아까보다 붉어져 있을것이다.
"...그, 그래요?"
"그러게 왜 이렇게 따라나오셨습니까. 급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나중에 가게에 찾아와서 하셔도 됐을텐데요."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었는걸요. 스스로도 염치없다고 생각하지만 루디 씨에게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나는 그녀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늦췄다. 앨리스 역시 조금 거칠어졌던 숨소리가 평소의 것으로 돌아왔다.
"저도 앨리스님에게 몇 번이나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까."
"고작 그런걸로 제가 입은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제 목숨을 구해주신 것부터, 저희 가문이 위험에 빠졌을 때마다 도와주셨잖아요."
몇 번이나 은혜를 입어도 앨리스는 결코 그것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인간들 중에서는 여러 번 은혜를 입으면 그걸 어떻게든 갚으려 하는 사람이 있고, 어느새 그것에 적응해 그게 당연한 권리인 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앨리스는 전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고, 내가 그녀를 싫어할 수가 없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내 능력을 알면서도 무턱대고 기대려 하지 않는다.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그녀를 어떻게 싫어하겠는가.
길거리에 설치된 희미한 조명의 빛이 보였다. 이미 늦은 밤의 거리에는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주점에서 나와 주정을 부리는 놈이 한두 명 정도는 있을법한데, 오늘의 밤거리는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말씀은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이 이상 루디 씨에게 빚을 질 수는 없는...읍?!"
"그렇다면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성의를 보여주시면 되겠군요."
주변의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는 그녀의 말을 자르며 입을 맞췄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저지르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밤거리의 마력과 매혹적인 드레스를 입고있는 앨리스에게 풍기는 향기가 야릇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와인을 마셨기 때문일까, 앨리스의 입술에서는 달콤한 포도향이 났다.
"츄웁..."
그러고보니 앨리스와 이런 짓을 하는게 얼마만이더라.
적어도 한 달은 넘은 것 같았다. 에디스와 마리안이 있는 동안은 앨리스의 얼굴을 볼 기회도 없었고, 최근에는 그녀가 잡무를 처리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빴으니까.
오랜만의 키스에 앨리스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어느새 구석진 건물의 사이로 찾아들어간 우리는 좀 더 농밀한 키스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아... 안 돼요... 이런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했다간..."
아직까진 이성이 남아있는 앨리스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 멈출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몸매를 더욱 부각시키는 드레스에 손을 올렸다.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입술 사이에 혀를 밀어넣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을 더듬던 내 손은 어느새 가슴팍 사이로 들어가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었다.
나 역시 영주에게 어울려주며 독한 와인을 몇 잔이나 마셨기에 기분좋게 취해있던 참이었다.
마나를 운용해 취기를 날려보낼까 싶었지만 가끔씩은 이런 기분을 만끽하고 싶다는 생각에 그대로 행위를 이어나갔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여자의 생가슴에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을 주물러댔다.
에디스와 마리안이 떠난 뒤에는 나름대로 금욕을 하고 있었고, 유일하게 릴리스와 관계를 맺은게 보름 동안 내가 한 섹스의 전부였다.
릴리스는 빨래판이라 만질게 전혀 없었지만 앨리스는 다르다.
한 손에 가득 잡히는 풍만한 젖가슴은 주무르는 것만으로도 물건이 빳빳해졌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오랜만에 야릇한 씬을 쓰려하다보니 이 시간이 되서야 업로드를 하게 됐습니다... 일상 파트였다면 이 시간에 두 편은 적었을텐데... 흑흑.
2. 개인적으로 흥분되는 시츄에이션입니다. 술에 취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남녀라... 밤이 깊어져서 자꾸만 헛소리가 나오네요. 물론 농담입니다.
3. 글이 늦게 올라온 것에 대해 다시 사과드리며 다음화에서 뵙겠습니다..(꾸벅.)
p.s. 당연한 말이지만 다음편은 h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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