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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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모험가들에게 포션을 팔고, 부족한 재고를 채워넣으며 한 숨 돌렸다.
하필이면 지금이 놈들의 번식기라 그런지 모험가들도 평소보다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최대한 동료를 만들어놓기 위해 몬스터들은 번식기에 집단 난교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성행위를 하는 몬스터들은 평소보다 습격하기 쉬웠고, 평소에는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몬스터 부락의 습격도 한 번쯤 시도 해볼만한 것이다.
조금 있으면 겨울이라 몬스터의 가죽값이 점점 오르고 있었기에 지금 한 몫 잡아둬야 겨울에 마구간 신세를 지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모험가들도 평소보다 단단히 준비를 했다.
덕분에 가게의 매출은 평소의 배를 훌쩍 뛰어넘은 상태였다.
'쉬는동안 재고를 넉넉하게 만들어두길 잘했지.'
물론 포션을 많이 팔아봤자 오우거 한 마리를 잡는 것만 못했지만 말이다. 내가 다른 포션 상점들처럼 폭리를 취하려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나는 최소한의 수고비를 제외하고는 거의 원가에 포션을 제공했다.
초짜 모험가들에게는 비싼 가격이겠지만 그 효과를 본 모험가들은 반드시 내 가게를 다시 찾아올 수 밖에 없었다.
"아이린. 부엌 찬장에 있는 간식이라도 꺼내먹으며 쉬고 있으렴."
"주인님은요?"
"나는 창고에서 작업을 해야지. 네게 반지를 선물하기로 약속했잖니."
내 말에 아이린의 뺨이 홍조를 띠었다. 괜히 너무 많은 기대를 했다가 실망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반지를 만들려고 해도 아직은 정해놓은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재료를 사용해서, 어떤 무늬를 새길 것인지도 하나하나 정해야했다. 창고의 입구에 배치된 전등을 키자 어두운 창고의 안쪽까지 빛이 스며들었다.
마석을 사용해서 빛을 발하기 때문에 기름이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물건이었다.
'어디보자...'
가장 먼저 광물을 보관하는 박스를 찾았다. 지난번에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만드는 바람에 보석은 양이 꽤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도 반지 하나 만드는데는 충분하지.'
문제는 어떤 것을 사용하는가였다.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같은 보석들은 너무 눈에 띄었다. 괜히 값비싼 보석 반지를 하고 다녔다가 질 나쁜 놈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으니 그건 패스.
은이나 금으로 만들어진 반지가 무난하겠지만...
'그건 연인들이 프로포즈할 때 자주 사용하는거란 말이지.'
귀족이 아닌 평민들은 프로포즈에 은반지를 선물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순은이 아닌 은이 조금 섞인 것에 불과하지만 은반지는 그들에게 있어서 순결한 사랑을 의미했다.
결국 은과 금도 기각이었다. 다른 괜찮은 광물이 없나 뒤적거리던 나는 아이린에게 어울리는 한 보석을 찾아냈다.
안쪽이 보일듯말듯 불투명한 우윳빛 색깔의 보석은 내가 손으로 들고 움직이자 안쪽에서 은은한 보랏빛을 뿜어냈다.
'문스톤.'
달빛을 머금은 보석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보석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티가 잘 나지 않는 보석이기도 했다. 보석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에 끌린 나는 이걸로 아이린의 반지를 만들어주기로 결심했다.
나는 평소 사용하는 작업대에 문스톤을 올려놓고 가장 먼저 반지의 크기를 생각했다.
'어느 손가락에 맞춰서 만들어야 할까.'
반지를 끼는 것 역시 손가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엄지는 신념을, 검지는 우정을, 중지는 화합을, 약지는 사랑을, 마지막으로 새끼 손가락은 약속과 소원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끼고있는 반지는 약지였다. 결혼반지가 아닌이상 평민들은 반지를 낄 일도 없었고, 귀족의 자제들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반지를 끼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에게 자주 보이는 손에 끼는 장신구인만큼 신중하게 결정해야했다.
'약지만 빼고 말이지.'
그랬다간 아이린이 약지에 반지를 끼고 있는 것을 본 모험가들이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댈지도 모른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린에게 어느 손가락에 끼고 싶냐고 묻는 것이겠지만...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단 말이지.'
이런 것에 한해서 내 직감은 아주 높은 확률로 정답이었다.
결국 조금 더 고민을 하기로 결론을 내리고는 작업대를 정리했다. 그래도 대략적인 구상을 끝냈으니 작업하는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가게를 나오니 마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곧이어 찾아온 모험가들의 신발은 흙이 잔뜩 묻어있었고, 갑옷은 몬스터들의 체액과 피로 질척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웃으며 포션을 팔았다.
아이린도 역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릴 법도한데 웃는 얼굴로 그들을 응대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더럽고 천박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모험가에게 있어서는 훈장이나 다름 없었다.
그만큼 열심히 땀흘려 돈을 벌었다는 뜻이니까.
만약 그들이 몬스터들의 숫자를 줄여놓지 않았다면 지난번 레드 혼처럼 몬스터들이 도로를 점거하거나 숲에 들어간 약초꾼들을 습격할 수도 있었다.
상점가의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떨거지들에 비하면 모험가들은 훨씬 성실했다.
어느 정도 손님이 빠져나가자 나는 안면이 있는 남자에게 요즘 특별한 일은 없는지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겪은 일과 들은 정보를 말해주었다.
오늘 자신의 파티는 고블린 부락을 토벌했다는 것과, 영지 전속 길드인 나이트 울프에서 대규모로 오크 토벌 인원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 등 여러모로 쓸만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나이트 울프는 이때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몬스터들의 번식기인 지금 대규모 토벌을 해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오크 정도면 인정받을 수 있겠네.'
인간의 절반 정도 밖에 안 되는 체구의 고블린에 비해 오크는 신체적으로 훨씬 우월했다.
덩치에서 나오는 강한 근력과 지치지 않는 체력은 숙련된 모험가 파티 정도는 되야 상대가 가능했다.
그런 오크들의 부락을 통째로 토벌하는 것은 좀처럼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고보니 나이트 울프는 수인족들이 많았지.'
길드원의 절반 이상이 수인족이었다. 인간도 분명 있었지만 길드 마스터와 부마스터는 모두 수인족이었던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모험가들이 떠나고 남은 가게 를 청소하려고 빗자루를 꺼내 흙투성이가 된 바닥을 쓸려하는 참에, 창 밖으로 쫑긋 솟은 여우귀가 보였다. 자기 딴에는 잘 숨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이린도 창 밖에서 쫑긋거리는 귀를 발견하고는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고 있던 빗자루를 놓고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자 벽에 찰싹 붙어 앉아있던 여우귀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뿐만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에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남자도 있었다.
입고있는 로브와 외투에 나이트 울프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두 사람은 구면이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디아나야!"
자신을 디아나라고 소개한 소녀는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살짝 접혔다 펴졌기를 반복하는 귀는 한 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였다.
분명 사야의 귀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부드럽지 않을까.
"그래. 디아나. 내 가게에는 무슨일로 찾아온거야?"
일반적인 수인족은 원래 존대를 하지 않기에 나는 그녀의 반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지 아이린도 가게를 나와 내 옆에 섰다.
"당신 엄청 강해! 이번 오크 토벌에 같이 참가하자!"
뭔가 했더니 쓸데없는 권유였다.
"거절하마."
"왜?"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디아나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모험가를 은퇴했거든. 굳이 오크를 잡으러 갈 생각은 없어."
애초에 오크 토벌은 나이트 울프 길드의 역할이다. 그런데 갑자기 날 왜 찾아온거지?
"...하아. 디아나. 그렇게 말하면 누가 같이 가주겠냐고."
결국 벽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도 디아나와 함께 있던 남자였다. 이름이... 할터였던가.
"죄송합니다. 디아나는 말주변이 없어서요."
할터는 대신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괜찮다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가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오크 토벌에 참가할 생각은 없었지만 할터의 예의바른 태도를 보니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생각이었다.
디아나와 할터는 내 호의를 받아들였고, 탁자에 앉자 아이린은 차를 내오겠다며 부엌으로 갔다. 아마 내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한게 아닐까 싶었다.
"흠흠. 루디 씨도 저희 길드가 오크 토벌을 하기로 했다는 것은 들으셨지요?"
할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가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일에 외부인인 나를 끼워서 얻을 이득이 그들에게 있을까.
디아나는 수인족이라 내 강함을 꿰뚫어본 모양이지만 나이트 울프 길드의 힘만으로도 오크 부락 정도는 충분히 토벌이 가능할터였다.
"오크 토벌은 저희 길드원 전원이 참여하지만 그중에서도 파티를 짜서 행동하게 됩니다. 다만 이미 파티를 구성하고 있는 다른 파티에 비해 저희 파티는 디아나와 저 뿐이라 말이죠."
"잘은 모르지만 다른 모험가들 중에서 용병을 구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당장 모험가 길드 앞에는 파티를 짜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 남아돈다. 그들 중 실력이 괜찮은 이를 뽑아서 데려가면 될텐데?
"저도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디아나가 루디 씨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서... 하핫."
할터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그는 디아나의 보모 역할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디아나는 나를 지나가면서 한 번 봤을 뿐인데 왜 자신의 파티원으로 받아들이려는걸까?
"디아나. 너는 왜 나랑 같이 파티를 짜고 싶은거야?"
"그야 당신이 강하니까! 그리고 이건 비밀이지만... 길드 마스터가 가끔씩 당신 이야기를 했거든.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꼭 보고 싶었어."
나이트 울프의 길드마스터가 나를?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걸까?
보아하니 할터도 이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너희 길드 마스터의 이름이 뭔데?"
"데린. 전에 있던 곳에서는 다들 핏빛 늑대 데린이라고 불렀어."
데린.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나름대로 기억력은 좋은편이라 자부하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할 정도면 정말로 별 것 아닌 관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나중에 한 번 만나보고싶네."
혹시 길드 이름이 나이트 울프인 이유도 길드 마스터가 늑대여서 그런거였나?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아이고, 조금 늦었습니다! 원래는 저녁에 올리려고 했는데 깜박 조는 바람에 눈 떠보니 지금이네요. ㅠㅠ.
2. 사실 보름 전부터 글이 막히고, 구상이 잘 안되는 소위 '글럼프'가 왔었는데, 이제서야 글럼프를 벗어난 기분입니다. 더 재밌는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