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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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도 나는 오크 토벌에 참가할 생각은 딱히 없어."
내 대답에 디아나는 볼을 부풀렸지만, 할터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었다.
"네 사정은 알겠지만, 그게 내가 널 도와줘야 하는 이유는 아니잖아?"
나에 대해 말했다는 '데린'이라는 나이트 울프의 길드 마스터에 대해서는 조금 신경쓰였지만 그건 나중에 알아봐도 상관없을 것이다.
나이트 울프 길드가 영지에 정착한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가 내게 접촉하지 않았다는건, 적어도 적의를 품고 있는건 아니겠지.
"미안하지만 모험가 길드에서 괜찮은 녀석을 구해서 갔다오라고. 그래도 이야기를 들었으니 포션 정도는 몇 병 챙겨줄게."
입술을 깨물고 분한 얼굴을 한 디아나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 할터가 선수를 쳤다.
"알겠습니다. 루디 씨가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
"읍읍!!"
그는 소리치려는 디아나의 입을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디아나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의 손에 벌건 자국이 남아있는 것을 보니 꽤나 세게 깨문 모양이다.
누가 수인족 아니랄까봐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디아나의 모습에 할터는 입을 다물었다. 안쓰럽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자 할터는 멋쩍게 웃으며 헛기침을 했다.
나는 근처에 놓여있던 하급 포션을 집어 할터에게 던졌다. 그는 재주좋게 손을 뻗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포션을 받아냈다.
"그걸로 치료하십시오. 제가 직접 이야기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본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니 이해해주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수인족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요."
디아나가 이러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내가 사야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상황이었으니까.
수인족은 처음 만난 상대에게는 경계를 품지만 친해진 사람에게는 자신의 가족만큼 신뢰를 가진다. 그 때문에 수인족에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은혜를 입히라는 말이 있었다.
수인족에게 원한을 사면 평생을 두려움에 떨지만, 은혜를 입히면 평생을 함께할 든든한 조력자를 얻는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내가 약한 놈이었다면 그녀가 나한테 이럴 일도 없겠지.'
강자를 숭배하는 수인족이기에 그녀가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비록 방식은 잘못됐지만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사야와 겹쳐 보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디아나를 친한 동생 대하듯이 대하고 있었다.
"그럼 디아나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 납득시켜줄게. 그럼 불만 없겠지?"
수인족들을 '납득시키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상대보다 자신이 강하단 것을 증명하는 것.
수인족들과의 대련은 단순무식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내 말에 디아나는 그제서야 으르렁거리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엉덩이에 달려있는 복슬복슬해 보이는 여우 꼬리도 살랑거리고 있었다.
한 번 만져보고 싶단 말이지. 사야는 수인 중에서도 견(犬)족이라 저런 풍성한 꼬리가 없었다.
물론 꼬리를 대신해서 귀를 잔뜩 만져댔지만 말이다.
마침 손님들이 없는 시간대니 지금 나갔다와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럼 지금 나가볼까?"
영지 안에서 전투를 벌였다간 당장 경비대가 출동할 것이다.
마침 아이린이 차를 끓여왔기에 차만 마시고 나가기로 했다. 아이린은 내가 나갔다 온다는 말에 아쉬워했지만 저녁엔 함께 외식이라도 하러 나가자는 말에 금세 표정을 풀었다.
디아나는 곧 있을 대련이 기대되는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덤빌듯이 투지로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눈빛에 나는 미소로 화답했다.
오직 우리 사이에 낀 할터만이 굳은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가게를 잘 부탁하마."
그렇게 가게를 나가려는 순간 셔츠 끝자락을 아이린에게 붙잡혔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할터와 디아나 앞에서는 좀 부끄러운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아이린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고 나서야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셔츠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하여튼 이상한 부분에서 집착이 심하다니까.
뒤를 돌아보자 디아나와 할터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할터의 표정은 마치 범죄자를 보는듯한 표정이었기에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왜 그러고들 있습니까? 해가 떨어지면 대련도 힘들테니 어서가죠."
길을 걷다 성문에 도착하자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우리에게 무슨 일로 나가는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약초 채집을 위해 나가는 것이고 이 둘은 내 호위라고 둘러댔다.
나와 안면이 있는 그들은 흔쾌히 성문을 열어주었다. 할터와 디아나가 나이트 울프 소속이라는 것도 신분 증명에 한몫을 했다.
"그럼 조심해서 나갔다 오십시오. 알고 계시겠지만 몬스터들이 가장 들끓는 때니까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겁니다."
그렇게 성을 나와 남쪽 숲의 입구로 향했다.
남쪽 숲으로 향한 이유는 숲에 사는 몬스터들의 수가 적어 모험가들도 잘 찾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땅히 건질 것이 없어 약초꾼도, 모험가도 잘 찾지 않는 곳이라 숲의 입구에 도착할때까지 사람을 단 한 명도 마주치지 않았다. 걷는 동안 디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할터와 간단한 잡담을 나누었을 뿐이다.
"나이트 울프에는 어쩌다 들어가셨습니까?"
"원래 저는 수도에서 모험가로 활동했었습니다. 그러다 수인족 친구를 몇명 사귀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파티를 짜서 활동하다가 자연스럽게 그 친구들이 속한 나이트 울프에 들어온거죠."
할터가 말하는 그 '친구들'은 디아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꾸준히 함께했던 동료들과 함께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들이 죽었거나 배신당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모험가들에게 이런 사정은 드문 일도 아니었기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마 할터도 디아나도 원래 함께하던 파티원들이 없어져서 함께하게 된 모양이다.
어느새 도착한 남쪽 숲의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입고있던 외투를 벗어 할터에게 맡기고, 편한 옷차림으로 적당히 몸을 풀었다.
"할터 씨가 심판을 봐주십시오. 규칙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는 입히지 않고, 항복을 선언하면 즉시 멈추는걸로."
내 말에 디아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유로워 보이는 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나이트 울프 소속의 할터가 이번 대련의 보증인이 되는 것으로 대련을 시작합니다. 규칙은 방금 루디 씨가 말씀하셨던대로 서로에게 치명상은 입히지 않고, 항복을 선언하는 순간 공격은 즉시 멈춰야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디아나에게 할터의 말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미 그녀는 나를 향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
"...시작."
그리고 할터가 대련의 시작을 선언하는 것과 동시에 디아나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지팡이를 손에 쥐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 지팡이가 신경 쓰였다. 보통의 수인족들은 격투가나 검사인데, 디아나는 지팡이를 들고다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아나는 지팡이를 잡는 것과 동시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법과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에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근처의 마나가 요동치는 흐름에 나는 그제서야 디아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보는건 처음이군.'
마법사가 체내의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사용한다면, 자연이 품고 있는 마나를 이용하는 '주술'이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할 수 없고, 자연과의 마나 감응도가 높은 엘프나 수인족 정도만이 가능했다.
아무래도 디아나는 그런 주술을 익힌 '샤먼'였던 모양이다. 그들은 마법사와 달리 체내의 마나가 소진될 걱정도 없다.
나도 주술에 대해서는 아는게 별로 없었다. 샤먼이란 직업이 흔치 않은데다가, 아무래도 주술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니 그럴 수 밖에.
가끔 몬스터들 중에 고블린이나 오크 중에 주술사 놈들이 섞여있을 때가 있다.
몬스터들의 정신을 고양시켜 강제로 전의를 끓어올리거나, 독을 뿌리는 등 성가시게 하는 놈이었다.
그래서 몬스터 부락을 습격할 때 가장 먼저 표적으로 삼는 녀석이기도 했다.
디아나의 지팡이에 마나가 응집되는 것과 함께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독안개와는 아직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피부가 따끔한 것을 보면 확실히 강했다.
맨몸으로 받아내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고생을 사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온 몸에 마나를 두르며 독이 내 몸으로 침투하지 못하도록 밀어냈다.
태연하게 독안개 사이를 걸어오는 나를 본 디아나는 당황하면서도 곧바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맞아줄 생각은 없다.
손가락을 튕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화의 빛."
원래는 공격 주문이 아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무척 쓸모 있었다. 내 손가락에서 뻗어져나온 새하얀 빛줄기가 독안개를 걷어냈다.
아니, 단순히 걷어내는 것 뿐만 아니라 디아나 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자신의 주술에 대한 내성은 없는지 디아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다가오는 독안개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독안개를 피해 한참을 물러난 디아나였지만 나보다 감각이 예민한 수인족이라 그런지 안색이 안 좋아진게 눈에 띄게 보였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전의를 불태우는 것을 보니 역시 수인족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감탄만 할 생각은 없었다.
디아나가 다시 영창을 할 틈을 주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거리 안에 상대가 다가오면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디아나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지팡이를 집어던졌다.
날라오는 지팡이를 가볍게 밀쳐냈지만, 지팡이가 시야를 가리는 순간, 디아나는 그대로 나를 향해 도약했다.
작은 체구 덕인지 마치 나비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속도는 빠르지만, 속임수가 뻔해.'
물건을 던져 시선을 끌고, 달려드는 것은 싸움꾼들의 정석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어중이 떠중이 놈들이 상대였다면 먹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은 사람이었다.
나는 지팡이를 쳐내면서도 시선을 디아나에게서 돌리지 않았다.
샤먼이라고 해도 타고난 신체능력이 좋은지 디아나는 내 배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그녀의 주먹을 한 손으로 받아내며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갑작스레 무너진 무게중심을 잡지 못한 디아나는 반동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 나가떨어지는 모습은 조금 불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으아아... 오랜만입니다. 독자 여러분. 시험 기간이라 2주나 쉬어버렸네요. 오늘을 기점으로 모든 시험이 끝났으니 다시 평소처럼 연재가 될 예정입니다.
2. 기다려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따로 공지 못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시험기간에는 글을 안 쓰기로 부모님과 약속하는 바람에 ㅠㅠ.
3. 사실 처음에는 일주일 정도로 잡고 있었는데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2주나 쉬어버렸네요. 대신 비축분도 좀 쌓아뒀고, 스토리도 한 번 정리했으니 이제는 쭉쭉 연재 진도를 빼겠습니다.
4.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