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 Ch 42 -그의 비밀- -->
꼴사납게 바닥에 자빠진 디아나는 온 몸이 흙투성이였다.
이정도면 됐겠지 싶어 손을 털며 대련을 끝내려고 하는데 바닥에 누워있던 디아나가 벌떡 일어섰다.
무릎의 살이 조금 까지고, 이마에서는 피가 살짝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 불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련의 승패를 선언하려던 할터도 그런 디아나의 모습에 열었던 입을 닫았다.
디아나도 방금 전의 전투로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 것은, 그녀가 멍청해서가 아니었다.
강자와 겨룰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으니까 이번에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모험가에게 있어서 자신보다 강자와 싸우는 것은 자신의 죽음 직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디아나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강자와의 전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겠지. 그녀는 자존심 같은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은 틀림없는 장점이었다.
저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 이상 결코 쉽게 목숨을 잃지 않는다.
'어쩔 수 없네.'
포기하려는 얼굴이 아니었기에 나는 디아나의 공격을 몇 번이나 더 받아주었다. 저렇게 힘을 갈망하는 것을 보니 선배 모험가로서 마음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적당히 손속을 두고 그녀의 허점을 찌르는 반격을 했고, 디아나는 곧바로 다른 방식으로 덤벼들어왔다. 속도와 힘은 충분하지만, 기술이 부족해 단조롭고 뻔한 공격이었다.
물론 몬스터를 상대로는 충분하겠지만, 자신보다 강한 인간을 만나면 이 약점은 치명적으로 작용하겠지.
디아나는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같았다.
그녀가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면 얼마나 성장할지 기대될 정도였다.
나 역시 간만에 땀을 흘리며 움직이자 옛날 생각도 나서 좋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대련을 하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자, 할터는 그제서야 대련을 종료했다.
결과는 두말할 것도 없이 나의 승리.
하지만 패배한 디아나는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가 가르쳐준 것이 그녀에게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디아나의 파티를 거절했겠지만, 그녀와 대련을 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디아나는 조금만 길을 잡아주면 훌륭한 모험가가 될 것이다.
샤먼으로서의 능력은 내 관할 밖이지만 근접 전투에 있어서는 조언을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아이린도 실전에서 마법을 연습해야했으니,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하면 괜찮겠지.
"할터 씨. 죄송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네?"
"이번 오크 토벌에 협력하도록 하죠.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나이트 울프 길드 소속도 아닌 내가 이들과 파티를 짜서 활동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간 포션 가게 주인이 모험가로 활동한다는 소문이 퍼질 수도 있다.
"... 그거야 문제없습니다만.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할터는 내 말이 진심인지 조심스레 떠 보고 있었다.
"가벼운 호의니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할터 씨는 C랭크 모험가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이트 울프에 소속된 이들은 대부분 C랭크 이상이다.
C랭크 정도되면 나름 베테랑 모험가 취급을 받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기준이다. 내가 보기에는 잘 쳐줘봤자 디아나와 동급. 혹은 그 아래의 실력이었다.
그래도 꾸준히 단련을 하는지 몸의 밸런스는 좋지만 평소 대검을 사용하는지 오른쪽 팔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검을 강하게 움켜쥐어야하는 대검의 특성상 팔의 근육이 받쳐주지 않으면 휘두르는게 불가능하다.
주먹을 사용하는 권법가의 경우 양팔의 근육이 균등하고, 단검을 사용하면 팔 대신 손아귀의 힘이 강해진다.
전사 하나에 샤먼 하나인가. 디아나는 근접 전투도 가능하니 지켜줄 필요는 없겠네. 나는 어디까지나 디아나의 성장과 아이린의 훈련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오크를 몇 마리를 잡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할터가 이 점을 이해해주면 좋겠네.
내 생각을 대충 전하자 할터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두 명이서 사냥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네 명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할터와 내가 이야기 나누는 것을 기다리다 못한 디아나가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오빠. 또 대련하자. 응?"
"벌써 저녁이니까 대련은 다음에 하자. 그보다 흙투성이인 채로 붙지마."
그녀의 머리를 눌러 밀어내려 햇지만 그녀는 내 허벅지를 양 팔로 끌어안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싫어! 오빠처럼 강한 사람이랑 대련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구. 예전에는 단장도 가끔씩 대련해줬는데 요새는 전혀 해주질 않는걸."
"단장이라는 녀석이 나보다 강한 것 같아?"
"...으음. 아니. 단장은 분명 강하지만 오빠만큼은 아니야. 게다가 오빠는 나랑 할 때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잖아."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니까. 그보다 단장이란 녀석은 디아나보다 얼마나 강한건지 호기심이 생겼다.
'나중에 만나면 한 번 겨뤄보고 싶네.'
수인족은 대련 상대로는 최고였다. 다쳐도 금방 회복되며, 체력도 엄청나고, 무엇보다 대련에서 패배하고 앙심을 품는 인간과 다르게 수인족은 한 수 배웠다며 기뻐한다.
물론 그만큼 호승심이 강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패배한 것으로 꽁해 있지는 않는다.
내 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디아나를 데리고 성으로 돌아왔다. 경비들은 흙투성이인 디아나를 보고 조금 놀랐지만 발을 헛디뎌서 굴렀다는 내 설명에 통과시켜주었다.
"내일 또 찾아갈래."
"내일은 일이 있으니 안 돼. 며칠 뒤에나 찾아오라고."
"...칫."
결국 할터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투덜대는 디아나의 목덜미를 끌고 사라져갔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나를 쳐다보는 눈빛을 보니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
"...간만에 재밌었네."
이렇게 몸을 움직인 것은 던전 브레이크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 조용히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이 근질근질거렸으니까.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린이 차려놓은 저녁을 먹었다.
아이린의 요리 솜씨는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늘어났는데, 요즘에는 돈을 받고 팔아도 될 정도로 성장했다.
아이린이 내 몫으로 준비해준 스테이크를 자르며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그녀와 이야기했다.
아이린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듣다가, 디아나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움찔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눈매가 조금 사나워진 것 같은데. 다행히 아이린은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오크 토벌을 할 때 그 둘이랑 같이 숲에 갈 수도 있으니 준비 해두렴."
"그런데 주인님은... 그 디아나라는 애한테 관심이 있으신건가요?"
초조한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린은 무척 귀여웠다. 혹시 질투하는건가?
"그냥 같은 모험가로서 가르치고 싶은 것 뿐이야. 다른 감정은 일절 없으니까 걱정 할 필요 없단다."
내 확답에 아이린은 그제서야 표정을 풀었다. 손을 뻗어 아이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나는 넌지시 질문했다.
"요즘에는 별다른 일은 없니?"
내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아이린의 급성장 후 친구들을 못 사귀면 어떡할지였다.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는지 아이린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종종 내 가게에 데리고 오기도 했다.
손님이 없을 때 찾아온 소녀들에게 나는 찬장에 있는 다과와 레몬티를 대접했다.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다들 그렇듯이, 대화의 주제는 연애에 관해서였다.
소녀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이름은 바크였다. 바크 녀석. 완전히 인기 폭발이구만.
브리튼 상단의 부단주로 일을 배우고 있는 바크는 종종 내 가게에 놀러오는 쾌남이었다. 시원시원한 성격과 소녀들에게 친절한 매너있는 녀석이라 그런지 인기가 많았다.
상단주의 아들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집안까지도 완벽했다. 외모, 집안, 성격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일등 신랑감이었다.
'정작 녀석은 플로라한테 차인 이후로 완전히 일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그렇게 소녀들이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아이린에게도 질문이 돌아왔다.
"아이린. 넌 마음에 드는 남자애 없어?"
"맞아. 아이린은 한 번도 말해준 적 없는걸."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소녀들의 시선이 아이린에게 집중됐다. 저건 나도 조금 궁금한걸.
다른 의도가 있는게 아니라 순수하게 아이린의 보호자로서 궁금한거였다. 그래도 티를 내지 않고 진열장 정리에 집중한 것처럼 나는 작업을 계속했다.
아이린은 내가 듣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자꾸만 이쪽을 쳐다봤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이린의 김 빠지는 대답에 옆에 앉은 그녀들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흐응~ 지난번엔 상냥한 남자가 좋다면서?"
"맞아.맞아. 연상이 좋다고도 했었는걸."
"아이린은 평소 루디 씨랑 같이 지내니까. 남자를 볼 때 눈이 높아지는건 당연한걸지도."
나는 평범한 아저씨였지만 의외로 동네 여자애들한테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골 영지라 그런지 남자애들은 장난꾸러기가 많았으니까.
연상의 남자를 좋아하는 소녀들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에 평판을 열심히 끌어올려놓은 보람이 있군.
기분이 좋아진 나는 찬장에 넣어뒀던 조각 케이크를 각각 접시에 담아 들고갔다.
절대로 내 칭찬을 해서 주는게 아니라 아이린의 친구라서 내주는 것이었다.
케이크는 값비싼만큼 그녀들도 자주 먹지 못하는 디저트였다. 그녀들은 내가 들고오는 케이크와 홍차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게보면 영락없이 애라니까.
"와아! 아저씨 최고!"
"아이린은 이런걸 매일 먹다니... 정말 부럽다니까."
"감사합니다!"
해맑게 웃는 소녀들의 미소를 보니 나도 절로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아버지들이 딸 바보가 되는걸지도.
"앞으로도 아이린과 잘 지내주렴."
그녀들은 이미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먹고 있었다. 한 조각 먹었을 때의 그 황홀한 표정은 얼마나 케이크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자들이 괜히 단 것에 환장하는게 아니라니까. 그렇게 케이크를 먹던 소녀들의 이야기 화제는 계속 돌다가 내게 향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결혼 안 하는거에요?"
"맞아요. 다른 아주머니들도 루디 씨 정도 되는 분이 왜 홀로 지내시는지 궁금해하시는걸요."
"루디 씨도 언니들한테 꽤 인기많잖아요."
서른 살이 넘게 먹고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내가 영지에서 거의 유일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내가 없는 것은 다른 문제가 있다고 의심받을 수 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지난화 코멘트는 모두 확인?답니다! 오타나 오류는 시간이 되는대로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다음에는 반드시 휴재가 길어질 것 같으면 미리 공지를 올리겠습니닷!
2. 기본적으로 저는 뱀파이어, 서큐버스 같은 이종족을 가장 좋아합니다만, 수인족도 좋아합니다! 히로인으로서 개성있어서 매력적인 것 같아요!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재주기는 최대한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