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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 (222/260)

2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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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을 돌아 내려가자 오크들의 적나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로의 욕망을 탐하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에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터와 디아나는 조금 떨어진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놈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쉬지 않고 역겨운 신음을 질러댔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절벽 위에서 빛이 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오크 부락을 향해 달려갔다.

푸른 빛은 아이린이 마법을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신호를 보내주기로 했을 때 약속한 것이었다.

오크들은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는지 교미를 하는 것에 정신이 없었다. 경비를 서고 있던 놈들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난교를 벌이고 있는 동족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놈들이 우리의 접근을 감지했을리가 만무하다. 나는 단숨에 오크놈의 목을 비틀어 죽였고, 할터도 오크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오크는 회복력이 좋아 한 번에 숨통을 끊어야했다.

그리고 우리가 오크 경비병들을 제압하는 순간,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울타리 안에서 난교를 벌이고 있던 오크들이 단체로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습격했다는 것을 깨닫고 경계의 비명을 지른 것이라 생각했지만, 놈들의 얼굴은 마치 끔찍한 것을 본 것처럼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원래 계획과는 조금 달라진 상황에 나는 출구에 서서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할터와 디아나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경비병들의 시체를 뒤로 한 채 출구에서 전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울타리 안을 살펴보던 나는 익숙한 마력의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오크 놈들이 발작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아이린의 정신 파괴 마법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소 마법도 아니고, 이렇게 광역으로 정신 계열 마법을 사용하다니...'

정신 계열 마법은 직접 그 상대의 정신과 접촉해야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입장에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한다. 그걸 한 두 마리도 아니고 수십 마리에게 걸었다는건... 대단한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린의 마법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차서 비명을 지르던 오크들은 눈이 빨갛게 충혈되더니 방금 전까지 난교를 벌이던 동족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갑작스런 동료의 공격에 얻어맞은 놈은 크게 울부짖었고, 주변에 있던 다른 오크들도 이상한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곧이어 오크 부락은 아이린의 정신 마법에 걸린 놈들과 걸리지 않은 놈들로 나뉘었다. 돌변한 동족을 말리기 위해 몇 놈이 나섰지만 광폭화된 놈들의 주먹질에 나가떨어졌다.

결국 편을 가르고 자신들끼리 치고박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몬스터들이 영역 싸움을 하는 일은 가끔 있어도, 이렇게 동족을 죽일듯이 싸워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디아나도 이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물론 샤먼인 그녀도 몬스터들에게 광폭화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단지 그 뿐이다. 방금 전까지 몸을 겹치던 동료를 적대하도록 정신을 조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직 아이린이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고개를 들어 절벽 위를 쳐다보자 눈을 질끈감고 계속해서 영창을 하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 보였다. 오크들에게 들키지는 않았으니 괜찮겠지. 주변을 둘러봐도 활이나 투척 무기를 들고 있는 오크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다가 안쪽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할터와 디아나에게 손짓했다. 울타리 안에는 바닥에 피가 튀긴 자국과 함께 쓰러진 오크들이 잔뜩 있었다.

처음에는 오십마리 가까이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그 절반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남은 녀석들도 몸이 성치 않은지 몸의 군데군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가게를 찾아오는 모험가들에게 오늘 있었던 아이린의 활약을 말해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녀의 발을 핥아서라도 파티원으로 영입하려고들겠지?

'그래봤자 안 보내줄거지만.'

아이린에게 모험가라는 배고프고 위험한 직업을 시킬 생각은 요만큼도 없다. 이 정도 실력이면 귀족가 소속의 마법사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재력과 명예를 과시할 때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는다. 유명한 검사나 마법사들이 귀족가에 식객으로 머무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제서야 오크 놈들은 이렇게 된 것이 우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놈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나와 디아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중무장을 한 할터에 비해 경장인 이쪽이 만만해보인 모양인데, 보는 눈이 어지간히도 없었다.

나는 달려오는 오크놈의 턱을 주먹으로 갈기며 걷어찼다. 뒤에 따라오던 놈은 나자빠지는 동료를 받아냈고, 나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빙결 마법을 영창해 만들어낸 얼음 화살로 두 놈의 심장을 나란히 꿰뚫었다.

저쪽도 상황은 비슷했다. 할터가 최대한 디아나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아주며, 디아나는 주술을 이용해 그를 지원했다. 혹시나 옆으로 돌아 달려드는 놈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대로 목을 베어버렸다.

불과 10초도 안 되는 시간에 다섯 마리가 넘는 동료가 죽자 그제서야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깨달은 오크들은 도주를 꾀했다. 하지만 이미 출구는 우리가 점거한 상황이었고, 놈들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응?"

그렇게 남은 잔반을 처리하는 느낌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가는데, 가장 뒤에 서 있던 오크 한 마리가 동굴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 녀석을 본 다른 오크들도 하나 둘씩 눈치를 보다가 동굴을 향해 뛰었다.

하지만 그 순간 동굴이 있는 절벽 위에서 수많은 불화살이 떨어지며 그들의 몸을 관통했다. 제아무리 재생력이 좋은 오크라고 해도 중상을 입은 상태로 불화살을 맞고 살 수는 없었다.

"꾸웨에에엑!!"

"끼아아악!!"

노릇노릇하게 살이 익는 냄새와 함께 놈들은 새까만 통구이가 되었다. 운 좋게 불화살을 피한 몇 놈은 할터와 디아나가 마무리지었다. 전의를 상실한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은 닭모가지를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이제 남은 것은 저 동굴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다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디아나와 할터에게 허락을 구하고 절벽 위에 있는 아이린을 데리러갔다. 아이린이 사용한 마법은 하나같이 대단한 것이었다.

집단 정신 조종 마법에 나중에는 광역 원소 마법까지. 다른 마법사가 본다면 기립박수를 치겠지. 하지만 달리 말하면 아이린이 그만큼 무리를 했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방금 전에 멧돼지를 만났을 때 짐짝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 더욱 무리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절벽에 돌아갔을 때 아이린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주인님... 오셨어요?"

"그래. 정말 대단했단다. 열심히 했구나."

아이린은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그녀는 내 칭찬에 안심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떡하죠. 저 몸에 힘이 잘 안들어가서..."

아무래도 정신을 한계까지 쥐어짜다가 긴장이 풀리며 힘이 빠진듯했다. 방금 전에 마나가 확 빠져나가는 감각이 아직 남아있는지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걱정말고 업히렴. 피곤하면 무리하지말고 자도 된단다."

아이린에게서 느껴지는 마나는 방금 전과 질적으로 달랐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정신력을 쥐어짜내며 또 한 번 성장한 모양이다. 아마 다음번에는 훨씬 쉽게 이런 마법을 사용하겠지.

"감사합니다...주인니임..."

아이린은 내 등에 업히자마자 그대로 기절했다. 아이린을 업고 내려오자 할터가 오크의 시체에서 마석을 찾아내고 있었다. 심장 부근에 들어있는 마석은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작았지만 몬스터 토벌의 증거로 쓸 수 있었다.

"대충 이 정도면 된 것 같군요."

할터가 피를 묻은 나이프를 천에 닦으며 말했다. 나는 그에게 챙겨온 수통을 건넸고, 할터는 감사를 표하며 수통의 물로 손을 헹궜다. 그동안 디아나는 동굴 안의 망을 보고 있었다.

"왜 그래?"

동굴 안은 빛이 들지 않아 깊은 곳까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감각에 걸리는게 있기라도 한걸까.

"... 지독한 피냄새가 나. 동굴 안쪽에 위험한 녀석이 있을지도 몰라."

수인족의 직감은 허투루 넘길 수 없다. 디아나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분명 다른 몬스터가 있겠지.

'그러고보니 놈들도 바로 도망치지 않았었지.'

퇴로가 막혔을 때, 녀석들은 동굴 안으로 도망치는 것을 망설였다. 동굴 안에 오크조차도 껄끄러워할만한 존재가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할터 씨?"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었기에 둘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실 저는 이쯤에서 돌아가고 싶습니다. 오크들의 토벌은 아이린 양의 마법 덕분에 손쉽게 끝났고,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할터의 대답은 이성적이었다. 동굴 안에 있는게 어떤 몬스터인지도 모르는데 무리해서 들어갈 필요는 없다. 평범한 모험가라면 성공적인 토벌을 자축하며 할터처럼 발걸음을 돌리겠지.

"나는 들어갈거야. 안에 있는 녀석이랑 싸워보고 싶어."

하지만 디아나도, 나도 평범한 모험가는 아니었다. 방금 전에 오크를 상대하며 감질나게 싸우는 바람에 손이 근질거렸던 참이었다.

"위험한 녀석이라면서?"

"그러니까 더 싸우고 싶은거지. 오빠는 안 그래?"

"...그러게."

디아나는 그런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태도였다.

"할터 씨는 아이린과 함께 입구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혹시나 몬스터가 뛰쳐나오면 아이린을 데리고 바로 도망치셔도 됩니다."

나는 챙겨온 모포를 깔고, 그 위에 아이린을 눕혔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린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알겠습니다. 아이린은 제가 지키고 있을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할터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가슴팍을 두드렸다. 나와 디아나는 챙겨온 짐을 모두 풀고, 최대한 가벼운 차림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고작 쉰 걸음 정도 밖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밝은 빛이여. 길을 인도하라."

짤막한 영창과 함께 생겨난 은은한 빛을 내뿜는 구가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진하게 풍겨오는 피냄새에 얼굴을 찌푸렸다. 수십 년 동안 모험가로 구르며 내 감각은 피 냄새로 종족을 구별할 수 있었다.

이 동굴에서 풍기는 피냄새는 인간의 것이 압도적으로 진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은 것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크르륵...쿠룩..."

한참을 더 들어가자 기분나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앞장서서 나아가던 구가 비추는 곳에 끔찍한 것이 발견됐다. 사지가 잘린 채 내장을 흩뿌리고 죽어있는 오크의 모습이었다.

"...방금 전에 도망쳤던 놈이네."

아이린의 마법이 쇄도하기 직전, 유일하게 살아서 동굴 안으로 도망쳤던 놈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다들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푹 쉬면서 체력을 보충했답니다.

2. 쿠폰 주신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적겠습니다!

3. 루디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노력한 아이린! 나중에 돌아갔을 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룰 예정입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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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루디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노력한 아이린! 나중에 돌아갔을 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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