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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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의 복부는 마치 크게 한 입 베어먹은 것처럼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마 지금 들려오는 숨소리의 주인이 한 짓이겠지. 숨소리가 이렇게 동굴에 울려서 들릴 정도라면 덩치도 상당할게 분명했다.
디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눈을 반짝이며 전투 준비를 했다. 아마 그녀 혼자서 상대하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괜찮다. 여차하면 디아나가 실패했을 때 내가 나서면 되니까.
이때를 위해서 가방에 넣어왔던 장검도 챙겼다. 마법은 손맛이 없고, 아무래도 다른 무기보다는 가장 오래 다뤘던 검이 깔끔하게 베는 맛이 있을 것 같아서 이걸로 골랐다.
"준비됐어. 디아나?"
"당연하지."
나와 디아나는 무참히 살해당한 오크의 시체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빠져나오자 거대한 공동이 나왔다.
공동의 구석에는 거대한 덩치의 몬스터가 몸을 웅크려 앉아 있었다.
평범한 오크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키와 집 한 채에 버금가는 덩치였다. 놈은 인기척을 느꼈는지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려 일어섰고, 그제서야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은 다른 오크들과 다르게 초록색 피부가 아닌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놈의 입가에는 검붉은 핏자국과 함께 방금 오크의 것으로 보이는 살점이 붙어 있었다.
"...크르륵...쿠룩..."
송곳니 사이로 기분 나쁘게 침을 질질 흘리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육중한 덩치 때문인지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공동에 소리가 울렸다.
피부색과 덩치를 제외하고는 다른 오크들과 다른 점이 없었다. 아마 단순히 오크의 아종이 아닐까. 더 큰 덩치와 힘을 얻은 대신 지능을 빼앗긴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풀린 눈으로 이쪽으로 걸어오는 놈의 손에는 내 키만한 곤봉이 쥐어져 있었다.
척 봐도 저걸 얻어맞았다간 아픈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떡할래. 디아나?"
"내가 먼저 싸울게."
그렇게 말하는 디아나는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디아나가 저 녀석을 이길 가능성은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저렇게 달려오는 놈을 상대로는 주술을 사용할 틈도 없었고, 순전히 근접 전투 실력으로만 싸워야하는데, 압도적인 체급 차이를 뒤집을 수 있는 기술이 디아나에게는 없었다.
'소드 오러를 사용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딱히 소드 오러가 아니더라도 체내의 마나를 다룰 수 있다면 디아나의 승리를 점쳤을 것이다. 제아무리 질긴 가죽이라도 마나를 씌운 날카로운 손톱이라면 단번에 찢어발길테니까.
하지만 디아나는 체내의 마나를 전혀 다루지 못했다.
체내의 마나를 이끌어내는 마법사가 아니라 주변의 마나를 사용하는 샤먼이라 그런지 마나를 제대로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듯했다.
디아나는 지팡이를 내게 던지고는 블랙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블랙 오크는 쥐고 있던 곤봉을 휘둘러 디아나를 제압하려 들었지만 디아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곤봉을 피했다.
확실히 수인족이라 그런지 타고난 전투 센스는 뛰어났다. 순간적으로 디아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당황한 오크가 몸을 돌리며 디아나를 찾았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미 놈의 다리를 손톱으로 베어냈다.
검붉은 실선이 몇 개 그어졌고, 핏물이 튀겼다.
"크르르륵!!"
다리가 따끔한지 녀석은 몸을 떨며 격렬하게 곤봉을 휘둘렀다. 물론 디아나가 그런 눈먼 공격에 맞을리가 없었다.
분명 여기까지는 좋다. 디아나가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연달아서 블랙 오크의 몸 곳곳에 상처를 냈다.
하지만 압도적인 체급 앞에선 한계가 있었다
디아나가 낸 상처는 모두 얕았다. 심지어 녀석은 일반 오크보다 재생력도 좋은지 금세 피가 멎었고, 디아나의 공격에 분노한 듯 했다.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하느라 체력을 소모한 디아나는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곤봉을 피하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그래도 디아나는 피하지 못하는 것을 직감하고는 양 팔을 교차시켜 공격을 받아냈다. 곤봉과 몸이 부딪치는 순간 그녀의 몸이 몇 번이나 돌며 날아가다 공동의 벽에 쳐박혔다.
다행히 부딪치기 전에 양 손으로 머리를 방어하고 몸을 웅크린 덕분에 피해는 최소화했지만, 더 이상 싸우기는 힘들어 보였다.
분명 디아나의 전투 센스는 뛰어났다. 하지만 결정타가 없는 이상 결코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다.
블랙오크는 바닥에 쓰러진 디아나를 잡아먹기 위해 걸어갔다. 물론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조약돌 하나를 주워 놈의 머리를 겨냥했다.
손아귀에 마나를 주입하고, 오크의 이마를 목표로 집어던졌다. 마나를 담아서 그런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돌은 오크의 이마에 명중했다.
놈은 이마가 움푹 파이며 박힌 돌에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꿰에에에엑!!"
꼴사납게 비명을 지르며 이마에 박힌 돌을 빼낸 놈은 돌이 날라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덤비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완전히 눈이 뒤집어진 놈은 광분해서 내게 달려왔다. 이런 몬스터와 겨루는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최대한 느긋하게 즐기고 싶었다. 검집에 넣어뒀던 검을 뽑고, 나 역시 자리에서 뛰쳐나갔다.
블랙 오크는 나를 짓뭉개버릴 생각인지 곤봉을 내 위로 내려찍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검에 마나를 불어넣는 것과 함께 그대로 곤봉을 검으로 베어버렸다.
곤봉에 실린 묵직한 힘에 검이 잠시 경직됐지만 소드 오러가 괜히 있는게 아니었다. 단숨에 곤봉이 반토막나며 손잡이 부분만을 잡고있던 블랙 오크는 그걸 집어던져버렸다.
자신의 무기가 순식간에 파괴되자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내게 품은 적의를 더욱 불태우는 모습에 나는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저래야 죽이는 맛이 있지. 혹시라도 꼴사납게 도망갔으면 싸우는 맛이 반감되서 실망했을 것이다.
방금 전의 선공은 양보해줬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몸에 마나를 두르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순식간에 다가온 나를 본 녀석이 주먹을 휘둘렀지만 가볍게 피하고 놈의 주먹위로 뛰어올랐다.
다시 한 번 도약해 놈의 팔을 밟고 뛰어오른 나는 놈의 목덜미에 칼을 꽂았다. 아슬아슬하게 높이가 닿지 않아 목덜미를 스치는 것에 그쳤지만 소드 오러의 위력은 방금 전 디아나의 공격과 비교하는게 실례일 정도로 엄청났다.
스친 것에 불과했지만 벌어진 상처에서 엄청난 피분수가 뿜어져나왔다.
녀석은 한 손으로 목덜미를 부여잡고 솟구치는 핏줄기를 막으려 했지만 나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역시 몬스터는 인간에 비해 기술이 부족했다. 드물게 전투에 조예가 있는 몬스터도 있었지만 그런 고위 몬스터는 쉽게 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타고난 근력과 신체적인 조건을 바탕으로 인간을 상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몬스터가 인간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서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블랙 오크의 팔뚝이 갈라졌다. 힘을 잃고 추락하는 자신의 손을 본 녀석은 고통으로 가득찬 괴성을 질렀다.
"크아아악!!"
깔끔하게 절단된 팔을 부여잡고 씩씩대던 놈은 이번에는 발을 들어 나를 짓밟으려했다. 하여튼 학습능력이 없는 놈이었다.
이래서야 오우거만도 못하지 않은가. 오크의 아종이길래 조금 기대를 했지만,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내 머리위로 내려찍히는 발을 검으로 난도질했다.
순식간에 해체된 살덩이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팔을 한 짝 잃은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다리마저 잃어버린 블랙 오크였다.
한쪽 다리와 팔을 잃고 중심을 잡지못한 블랙 오크가 뒤로 쓰러졌다.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일어나려는 모습에서 삶에 대한 갈망이 느껴졌지만 이미 흥이 식어버렸다.
어느새 일어났는지 먼지 투성이의 디아나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역시. 오빠는 대단하네."
디아나는 블랙 오크의 잘게 썰린 다리와 깔끔하게 절단된 팔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글쎄. 이 녀석이 너무 약한거지."
"...일부러 그러는거지? 그럼 이 녀석한테 당한 나는 뭐가 되는거야?"
입을 샐쭉하게 내민 디아나가 삐진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제대로 된 기술 하나만 익히고 있었다면 네가 이겼을거다."
결정타를 입힐 수 있는 기술 하나만 있어도 쓸 수 있는 전술이 훨씬 늘어난다. 디아나는 지금 자신의 뛰어난 신체능력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런걸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데."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제아무리 회복력이 좋다고 해도 팔과 다리가 통째로 날아간 이상 과다출혈로 죽을게 뻔했지만, 혹시 모르니 블랙 오크의 목을 베어냈다.
녀석은 끝까지 남은 한 손으로 반항했지만 몸이 멀쩡할 때도 상대가 안 됐던 녀석이었다. 의미 없는 잠깐의 발악이 끝나고, 놈의 목을 베어냈다.
몬스터 중에서도 수가 적은 아종이니 시체를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잘라낸 블랙 오크의 머리를 자루에 담았다.
꽤나 묵직했기에 등 뒤로 자루를 메고, 꺼냈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원래 블랙 오크가 있던 자리에 가보니 오크와 인간 두개골과 뼈들이 뒤섞인 것으로 보이는 뼈무덤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은 것인지. 혹시나 인간들의 유품이나 신분증이 남아있지 않을까 싶어 뒤적여 봤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질 않았다.
"부축해줄까?"
디아나는 허리춤에 챙겨뒀던 포션을 벌컥벌컥 마셔대더니 이제 좀 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벽에 부딪치긴 했지만 등이 조금 욱씬거리는 것 빼고는 문제 없어."
확실히 디아나는 공격을 받자마자 최선의 방어를 취했고, 충격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했다. 어설프게 피하려 들었다간 지금쯤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이런 전투 센스는 타고나지 않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예민한 본능의 감각은 여벌의 목숨과 다름없으니까.
'조금 정도는 도와줘도 괜찮겠지.'
그냥 체내의 마나에 대한 감각을 조금 키워주는 정도라면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디아나에게 필요한 것은 결정타였다. 그걸 위해서는 마나를 이용한 공격이 필수적이었고.
"그럼 슬슬 나가자."
오크 부락을 토벌한 것에 더해 아종까지 잡았다고 보고하면 둘의 실적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젠장. 결국 나만 재미를 못 봤군. 제대로 손맛을 보기도 전에 끝나버리는 바람에 몰려오는 욕구불만에 주먹을 쥐었다폈다.
'가는 길에 보이는 몬스터라도 사냥할까.'
그러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간만의 전투에 기대하고 검까지 챙겨왔지만, 결국 남은 것은 실망뿐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를 만족시킬만한 오우거같은 몬스터는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영지 옆에 던전이 생겼을 때 만났던 재키가 그리워졌다. 그런 손에 땀을 쥐게하는 전투가 아니더라도 조금 멧집이 있는 녀석이 좋은데 말이다.
디아나와 함께 동굴 입구로 돌아와서 할터와 아이린을 찾았다.
그런데 동굴에서 나온 우리가 마주한 것은 상상과는 다른 광경이었다.
할터는 대검을 들고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고, 아이린은 그런 할터의 뒤에 숨어있었다.
그의 어깨와 다리에 난 상처를 보고 몬스터의 습격이라도 있었나 싶었지만 동굴을 포위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까 숲에 들어올때 봤던 수인족들이었다.
놈들은 자기들끼리 떠들어대며 할터를 조롱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된 손맛을 보지 못했다고 신이 보내준 선물인 모양이다. 그래. 어쩌면 오크보다 수인족이 내구도가 좋을 수도 있겠지.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월화수는 강의가 몰려있는 관계로 연재가 드물어 질 수도 있습니다. 대신 주말에 그 보충을 하거나, 비축분을 쌓도록 노력할테니 조금만 봐주세요. ㅠㅠ.
2.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나 오류는 댓글로 남겨주시면 최대한 빨리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3. 다들 좋은 하루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