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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화 (225/260)

2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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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해서 축 늘어진 콜튼을 대충 바닥에 집어던졌다. 어차피 자연치유력도 좋은 놈이니 저대로 내버려둬도 죽지는 않는다.

"그래. 이제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된 것 같네. 안 그래?"

각자 창, 활, 단도를 꺼내들고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 모험가라면 모름지기 이래야지. 적이 코앞에 있는데도 장난스럽게 굴던 방금 전의 모습은 단체로 몰살당해도 할 말이 없는 태도였다.

'그럴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만인지 병신인지 분간도 안 가네.'

"...뭐가 목적이야?"

아까 콜튼을 놀리던 제니아라는 소녀가 활을 겨눈채 물었다.

"목적이라니. 그건 내가 묻고 싶은건데 말이지. 너희가 나와 내 일행의 목숨을 노렸고, 이건 정당방위에 불과한걸."

모험가들 사이에서 먼저 공격한 상대를 살려두는 일은 거의 없었다. 고작해야 기절시킨 것 정도면 무척 관대한 처분이었다.

"그러니 한 번 들어나보자고. 너희는 왜 디아나를 노리는거지?"

디아나가 어디가서 원한을 사고 다닐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 그 년이 먼저 우리보고 약하다고 했어. 인간에게 붙어먹는 주제에, 내가 파티를 권유해줬는데도 그딴 소리나 해대고!"

제니아의 목소리에는 열등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디아나 성격상 말을 돌려서 하지는 않았을테고, 면전에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나쁠법도 하다.

"근데 사실이잖아?"

"...뭐?"

"만약 디아나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네가 그 자리에서 결투를 걸어서 증명했겠지. 그게 안되니까 이렇게 같잖은 패거리나 데리고 습격하는거 아니야?"

수인족들은 결투를 좋아한다. 누가 더 강한지 증명하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에 자존심이 걸린 결투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니아는 그런 디아나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디아나보다 약하니까 당연한 일이다. 샤먼으로서의 주술과, 타고난 전투센스는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것이다. 방금 전에도 콜튼의 속도는 디아나보다 빨랐지만, 둘이 붙었다면 디아나가 이겼을 것이다.

디아나가 블랙 오크에게 진 것은 상대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주술을 쓰지 않고, 근접 전투만으로도 디아나가 콜튼을 압도했을 것이다. 콜튼 녀석은 내게 목을 붙잡히는 순간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반면 디아나는 내 공격에 반응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자신이 공격을 할 때도 망설이지 않고, 블랙 오크에게 공격받을 때도 빠르게 피하지 못한다는 판단을 내리고 방어를 택했다.

"닥쳐! 인간 주제에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거야!"

제니아가 고함을 내질렀다. 당기고있는 활시위에 힘이 들어간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말이지."

드물게 이런 녀석들이 있긴 했다. 수인족들이 인간보다 우월한 육체를 가졌으니, 더 나은 종족이라는 괴상한 선민사상을 가진 놈들 말이다. 물론 그런놈들은 몇 년 가지 못하고 죄다 사라졌다.

멍청한 놈이 신념을 가지면 명을 재촉할 뿐이다.

"그래. 너희가 먼저 공격한 것을 할터와 디아나에게 사과한다면 어느 정도는 참작해줄 생각이 있는데. 어때?"

물론 어디까지나 참작일 뿐이다. 이번 기회에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했을 때, 자신들도 목숨을 걸어야한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그들의 몸에 새겨줄 생각이다.

죽도록 맞아보면 새삼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니까. 참고로 이건 내 스승의 지론이었다.

내가 고문에 가까운 마법 연습에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으려 드니까 죽도록 두들겨팼었지.

내 너그러운 제안을 제니아는 단칼에 거절했다.

"내가 그년한테 머리를 숙일 것 같아?!"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되는군. 사실 나는 제니아가 이렇게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괜히 사과를 하겠다고 태도를 바꿨다면 마음놓고 두들겨 팰 수가 없으니까 말이지.

제니아는 대답과 동시에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자기 딴에는 기습이라고 한 모양인데, 눈알을 굴리는게 여기까지 보였다는 것을 모르겠지. 옆으로 가볍게 도약하며 화살을 피했다.

"젠장!"

"일단 붙어!"

제니아가 새 화살을 시위에 거는 동안, 남은 두 명이 내게 무기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창을 든 녀석은 리치가 길다는 점을 이용해서 내 신경을 분산시키려 들었다.

나름대로 괜찮은 판단이었다. 조금만 더 힘이 실려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으윽?!"

그가 휘두르던 창의 자루를 손으로 낚아챘다. 마나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내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창째로 끌려왔다. 평소에 체력단련을 하지 않는지 손아귀 힘이 형편없었다.

리치가 길다는 장점은 사라지고, 가까이 다가왔을 때 대응이 어렵다는 단점만이 남아있었다. 손에 힘을 줘서 창을 자루째 부숴버리자 그 파편이 잔뜩 튀었다. 무기마저 잃어버리자 완전히 두려움에 질린 그의 얼굴에 주먹을 갈겼다.

코뼈가 부서졌는지 기괴하게 꺾인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살려달라는 그의 비명소리가 듣기 싫었기에 그의 가슴팍에 워커를 신은 발을 올렸다. 징이 박힌 워커가 닿자 그는 더욱 크게 울부짖었다.

제발 살려달라고, 다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애원했다.

'그게 아니지.'

지금 그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다. 다시는 이러지 않는게 아니라, 어차피 처음부터 이러면 안 되는 거였어.

같잖은 실력으로,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같잖은 짓거리를 벌였다. 덕분에 나는 지금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분풀이로 워커를 신은 발로 그의 가슴팍을 내려찍었다.

"커헉!"

숨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안 죽으니까 엄살 부리지마. 어차피 너희도 디아나한테 이 정도는 하려고 했을거아냐."

이들은 디아나를 죽이고, 은폐하려했으니 내가 훨씬 더 자비로운 편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들을 살려서 돌려보낼테니까.

"제발... 크윽...!"

그는 내 다리를 잡고 필사적으로 생명을 구걸했다. 신기한 일이다. 약해빠진 주제에 남의 뒤통수나 치면서 살아가는 놈이 삶을 구걸하다니. 나 같았으면 진작에 혀를 깨물었을텐데.

실력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 대체 그에게 남아있는게 뭐가있을까.

"시끄럽네."

워커의 뒤꿈치로 그의 배를 후벼파듯이 짓눌렀다. 내장이 끊어지는 고통에 그는 입을 벌린 채 새된 신음을 토해냈다. 그렇게 잠깐 있으니 결국 고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기절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명 뿐이었다. 제니아는 내가 이 녀석을 짓밟는 동안 화살을 쏴댔지만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노림수가 얄팍했다. 양 손에 단도를 든 남자는 기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흠칫거리며 한참을 물러났다.

동료가 둘이나 당하고나자 슬슬 겁이나는지 그들은 나와 거리를 벌리며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방금 전에는 죽일 기세로 소리치더니, 이제는 도망가게?"

내가 비꼬자 제니아는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닥쳐! 우리 길드 마스터한테 말하면 너같은 놈쯤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할 줄 아는게 하나도 없나보군. 세 살 먹은 애새끼도 너보단 독립적일 것 같은데 말이야."

내 조롱하는 목소리에 제니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고작해야 나를 노려보는 것 정도였다. 그녀에겐 순식간에 동료가 두 명이나 제압된 것을 보고도 덤빌 용기가 없었다.

'재미없네.'

디아나처럼 투지를 불태우며 덤비는 것도 아니고, 전투 실력이 뛰어나서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더 이상 이러고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검집에 넣어뒀던 검을 꺼냈다. 제니아는 곧바로 화살을 꺼내 내게 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인족답게 날랜 몸으로 나뭇가지 위를 뛰어다니면서 화살을 쏴댔다. 미약하게나마 마나가 실린 화살들은 방금 전보다는 위협적이었다. 때문에 꺼낸 장검으로 화살을 쳐냈다.

날아오는 화살을 검면으로 팅겨내는 짓은 범인에겐 절대 불가능한 짓이었지만, 내게는 어린애 손모가지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검에 맞고 튕겨나가는 화살을 본 제니아의 표정이 썩어들어갔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결국 제니아는 얼마 못 가서 썩은 나뭇가지에 잘못 뛰었다가 가지가 부러졌다.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놓치고, 추락하는 와중에 나름대로 낙법을 펼쳤지만 그걸 놓칠 내가 아니었다. 제니아가 자세를 잡고 일어났을 때, 나는 바닥에 착지하며 그녀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하여튼 귀찮게 하기는."

"이걸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다는걸 잊은건 아니겠지? 길드 마스터만 데리고오면...!"

그리고보니 단도를 들고있던 녀석이 있었지. 제니아를 쫓기 시작하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길래 신경을 껐었다. 아무래도 제니아는 그 녀석이 길드 마스터를 데리고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려는 모양이다.

"그래. 이런건 확실히 해두는게 좋겠지."

나는 검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올리고, 영창을 중얼거렸다.

"추적의 빛은 그 상대를 결코 놓치지 않는다."

내 머리 위에 나타난 새하얀 마법진에 튀어나온 빛줄기들이 숲속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십 초도 되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자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럼 이제 안심하고 느긋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겠네. 그렇지?"

제니아가 도망쳐준 덕분에 지금 이곳은 아까 싸우던 동굴 앞이 아니라 숲 한가운데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아이린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모험가 놈들 중에서는 어린아이와 여자는 때리거나 죽이지 않는다는 철칙을 가진 녀석도 있었다. 하지만 제니아에게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진정한 평등주의자였다.

내게 이빨을 드러낸 상대가 어리든, 늙었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남김없이 때려죽였다. 제니아가 지금부터 겪을일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내게 여자를 고문하는 취미가 있어서 이런게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나를 죽이려 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돌려주는 것 뿐이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표독스런 눈을 하고 있는 제니아를 길들일 필요가 있었다.

손바닥으로 그녀의 뺨을 갈겼다. 나름 힘을 실어서 그런지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제니아의 얼굴이 돌아갔다.

"죽이진 않다고 말해서 그걸 믿고 개기는 모양인데, 죽이지 않아도 네년 입에서 제발 죽여달라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어줄 방법은 차고넘쳐. 이번 기회에 그걸 제대로 배워두라고."

하다못해 방금 전의 창잡이처럼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면 이렇게까진 안했을텐데 말이다. 애초에 그녀가 자초한 일이었다.

제니아는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고 두려운듯이 내게서 도망치려 들었지만, 의미 없는 발악에 불과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본래는 일요일 저녁에 올리려 했지만, 오늘 소나기와 함께 번개가 엄청나게 치더니 저희 동네 주변에 대대적으로 정전이 나버렸습니다... 결국 쓰던 글이 통째로 날라가고, 그걸 다시 적고 퇴고하니 지금이네요.ㅠㅠ.

2. 내일 강의를 듣고 과제가 없다면 연재를 노력해보겠습니다만, 월요일과 화요일은 아무래도 가장 바쁘다보니 연재가 힘들 것 같습니다. ㅠㅠ.

3. 아이린을 위협했으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대가를 치뤄야죠. 루디는 이때까지 과거의 표현으로만 잔혹한 모습이 드러났었는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예전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입니다. 아이린이 없었을 때의 루디가 무슨 짓을 할지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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