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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227/260)

2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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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로 돌아오자 입구에 서 있는 할터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양 손에 머리끄댕이를 하나씩 잡고 돌아왔다.

하나는 온 몸에 피멍이 들어있는 제니아였고, 나머지 하나는 도망치다 내 마법화살에 얻어맞고 쓰러진 남자였다. 우연히 돌아오는 길에 발견했기에 끌고왔다.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두 사람의 꼴을 본 할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마 계속해서 쏟아지는 빗줄기가 피냄새를 숨겨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관없지만, 아이린에게만큼은 두려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아이린에게는 자상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남고 싶었다.

나는 이때까지 내가 했던 짓을 부끄럽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내가 죽인놈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고, 나는 그들에게 정당한 죗값을 치루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이린이 그 말을 듣고 나를 무서워하게 되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다행히 아이린과 디아나는 동굴 안쪽에서 쉬고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피곤해 보이길래 동굴 안쪽에서 쉬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둘 다 이런 일이 처음이니 마음고생이 심했겠지요."

동굴 입구 옆에는 아까 내가 정리했던 나머지 두 명이 밧줄에 묶여있었다. 할터는 가방에서 흰 수건을 하나 꺼내주었고, 나는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비에 젖은 외투를 벗고, 바짓단을 접어 물을 짜냈다.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젖은 차림으로 계속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꽤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셔서 두 사람도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렇습니까."

아이린에게 괜히 함께오자고 했나 후회가 됐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데려오지 않는건데. 분명 오크 부락을 정리할 때까지만해도 아이린에게 좋은 경험이 됐을거라 믿었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루디 씨?"

나도 모르게 살기 어린 눈으로 기절한 제니아를 노려봤다. 이게 다 저년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사라졌던 살의가 다시 끓어올랐다.

"후우. 왜 그러십니까."

그래도 아이린과 디아나가 있는 동굴에서 칼부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숨을 고르며 입고있던 셔츠를 벗어서 물을 짜냈다.

"아무래도 비가 이렇게 오다보니, 이곳에서 야영을 해야할지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돌아가야할지 고민중이었습니다."

내게 결정 의사를 맡기겠다는 듯한 할터의 말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곳에서 묵고, 새벽 일찍 돌아가도록 하죠."

나와 할터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디아나와 아이린같이 어린 여자애들은 비를 조금만 맞아도 감기에 걸리기 쉽상이었다. 게다가 짐덩이가 넷이나 딸려 있으니 오늘 안에 숲을 나가 영지까지 돌아가는 것도 요원한 일이었다.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복귀하고, 돌아가서 푹 쉬는 편이 체력회복에도 도움이 될 터다.

"그러실 것 같아서 장작으로 쓸만한 나뭇가지들을 모아놨습니다."

할터는 뒤에 쌓여있는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준비성이 철저한 남자였다.

"제가 저들을 감시할테니 안에 들어가서 조금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할터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며 나는 마법으로 장작더미에 가볍게 불씨를 피워냈다. 할터는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젖지 않은 장작을 불씨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런 날씨에 모닥불도 없이 잠들었다간 객사하기 좋았다. 불길에 젖은 옷을 잠시 말린 다음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란히 벽에 기대어 졸고 있는 아이린과 디아나를 찾았다.

조용히 다가간 나는 두 사람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고, 희미하게 눈을 뜬 둘은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내게 와락 안겨들었다.

"주인님!"

"오빠!"

아이린은 디아나 앞이라는 것도 잊고는 나를 주인님이라 불렀다. 물론 디아나도 그런걸 신경쓸 여유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할터 앞에서는 그러지 않도록 말해둬야겠지.

두 사람은 사이좋게 내 품에 안겨 펑펑 울기 시작했다. 특히 디아나는 숨이 넘어갈 기세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연발했다. 나는 양 팔로 둘을 끌어안았다.

"아이린. 많이 무서웠겠구나. 진작에 도와주러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주인님이 최선을 다하셨다는 건 알고 있는걸요. 그래도... 너무 무서워서..."

아이린은 감정이 북받쳤는지 말하다 울음을 터뜨리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벼댔다. 지금만큼은 아이린의 심정이 이해됐기에 나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달랬다.

이번에는 고장난 태엽인형마냥 죄송하다는 말만 하는 디아나였다. 그녀는 울먹이며 오늘 습격을 당한 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물론 디아나가 제니아에게 약하다고 말한 것은 수인족들에게 있어서 결투 신청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동료들까지 데리고 와서 습격을 하는 것은 분명한 제니아의 잘못이었다.

애초에 디아나는 제니아에게 적의를 가지고 그런 말을한게 아니라, 정말로 제니아가 약해빠졌기 때문에 그런말을 한거겠지. 강해지려고 노력은 안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들한테 손 벌릴 궁리부터 하는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정말 죄송해요..."

방금 전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는 되는 블랙 오크에게 덤빌 때도 당당했던 얼굴은 죄책감 때문에 눈물이 번져 있었다.

"괜찮아. 디아나 네가 잘못한게 아니야.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이걸로 괜찮아."

오히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그들의 계획은 성공했을테고, 디아나는 아마 끔찍한 일을 당했을테니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달래주자 잠시 후에 울음이 멎었다.

실컷 울고 완전히 탈진한 두 사람을 안아서 모닥불 가까이에 내려다놓았다. 이럴 줄 알고 챙겨왔던 가방에서 냄비를 꺼내 물에 육포와 소금을 조금씩 넣고 끓였다.

고기 스튜라고 하기에는 맛이 형편없었지만 따뜻한 국물을 먹는 것만으로 허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아이린과 디아나는 처음 한 입 먹고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결국에는 스튜를 모두 먹었다.

따뜻한 걸 먹고, 모닥불 옆에 앉아있으니 슬슬 졸음이 몰려오는지 디아나와 아이린의 눈꺼풀이 감겼고, 챙겨온 모포를 꺼내 두 사람에게 덮어주었다.

시간마다 장작을 넣어주며 불을 지키던 나는 할터에게 눈이라도 붙일 것을 권유했다.

"할터 씨도 피곤하실텐데 먼저 주무십시오."

"그래도 불침번은..."

"제가 새벽에 깨우겠습니다.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체력 소모도 심하셨을텐데, 내일 돌아갈 때를 위해서라도 체력을 보충해야죠."

내 말에 할터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여분의 모포를 덮고 모닥불 옆으로 가서 잠을 청했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깨워달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나뭇가지를 잡고 불씨 안을 적당히 휘젓고 있자 동굴 입구에서 신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들어있는 셋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났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가보자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밧줄에 묶인 몸을 비틀며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남자가 있었다.

이 녀석이 창잡이였던가?

"풀리지 않게 단단히 묶여있으니 포기해."

"크윽..."

내 말에도 그는 한참을 낑낑거렸다. 그의 앞에 주저앉아서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너희는 무슨 생각으로 제니아를 따라온거냐?"

제니아가 디아나에게 모욕을 당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였다. 아무리 수인족이 멍청한 종족이라고는 해도 제니아의 말만 듣고 디아나를 죽이는 것에 동참하는 것은 과했다.

"내가 그걸 말해줄거라 생각하나?"

그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나를 향해 침을 내뱉었다. 내 발치에 떨어진 침을 보며 나는 잠시 고민했다.

고민은 짧았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이 꽉 무는게 좋을거야."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실수로라도 혀 씹어서 죽으면 억울할거 아냐.

"꾸엑!!"

놈의 얼굴을 주먹으로 몇 번 정도 갈겨주자 사실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너희는 길드원들 중에서도 소수인 수인족 우월주의자고, 길드 마스터가 인간과 같이 다니는 디아나를 아끼는게 평소에 마음에 안 들어서 제니아에게 협조했다. 라는건가?"

내 요약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말이 좀 짧다?"

"마, 맞습니다..."

다시 주먹을 들어올리자 곧바로 꼬리를 내리는게 정말로 솔직한 녀석이었다. 아무튼 디아나의 길드는 수인족과 인간이 섞여있는만큼 나름의 파벌도 있는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제니아와 이들이 속한게 '수인 우월주의'를 믿는 파벌이고, 나이트 울프의 길드 마스터를 비롯한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종족 평등주의'를 믿는다고한다.

"하다못해 수인이 더 우월하다고 믿으면 실력이라도 좋던가. 이딴 형편없는 실력을 가지고 그런 소리를 해?"

장난스럽게 주먹을 쥐는 시늉을 하자 그는 완전히 움츠러들었다. 방금 전의 폭행의 후유증인지 나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질 못했다.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바짝 엎드려 살아야지 명을 재촉하지 않고 가늘게 길게 살 수 있다.

오늘 그들의 상대가 자비롭기 짝이 없는 내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지옥에서 내가 먼저 보낸 범죄자들과 신나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일이다.

원래는 나중에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생길거라 생각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내일 이 녀석들을 끌고 돌아가는 길에, 나이트 울프의 길드마스터도 한 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개인 성향이 뚜렷한 수인족들을 뭉친 길드를 만든 것도 모자라, 수인족과 인간을 화합하려 하다니.

'앨리스의 말대로라면 분명 나를 알고 있는 녀석인데 말이지.'

디아나가 말한 '데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 중 짐작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흔한 이름이 아닐 뿐더러, 내가 알고 있는 수인족들은 수도에 터를 잡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만나봐야 알 수 있는건가?"

더 이상 눈 앞의 남자에게 흥미가 사라진 나는 자리로 돌아와 모닥불에 장작을 밀어넣으며 밤을 보냈다. 할터에게는 새벽에 깨우겠다고 했지만,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목숨 걸고 아이린을 지켜줬을 뿐더러, 나쯤 되면 마나를 몸에 두르면 며칠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정신을 멀쩡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도 할터가 앞장서야할텐데 피로가 남아있어서 좋을일은 없다.

그렇게 홀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의 해가 떠올랐다. 기절해있던 포로들도 새벽이 지나가는 동안 하나둘씩 눈을 떴고, 아침에는 모두 정신을 차렸다.

물론 그들이 깨어났든 말든, 우리는 여유롭게 복귀 준비를 했다.

어제 먹고 남은 건조식량으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짐을 챙겨서 할터, 디아나, 아이린, 나 순서대로 출발했다.

참고로 포로들은 나란히 밧줄에 묶어서 내가 끌고가는 중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다들 하루만 참으시면 주말입니다! 불금을 위해 달려보자고요!

2. 아직 일이 끝난건 아닙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주인공이 아이린을 제대로 달래줘야죠. 물론 둘이서 말입니다. 헤헷.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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