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 -->
예전에 내가 간신히 정신 계열 마법에 저항하기 위한 수련을 마쳤을 때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면 설령 용언을 듣더라도 어느 정도는 저항할 수 있을게다'라고 말이다.
그때 호기심이 생긴 나는 '용언'이 뭐냐고 물었고, 그때 '언령'이라는 것에 대해 처음 들었다.
물론 용언이니 언령이니하는 것들은 고대의 용과 전사들이나 쓰던 것들이었기에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드래고니안이라면 본 적이 있지만 그녀도 용언을 사용하지는 못했었다.
할터는 데린의 언령 때문인지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방에서 나갔다.
할터가 나가는 것을확인한 데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린과 내 맞은편의 자리에 앉았다.
사나운 눈매와 자르지 않은 장발 때문에 야수같은 이미지였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생각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지금 할터를 내보낸 것 역시 나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란 것이었다.
그저 데린도 나와 마찬가지로 말재주가 없기에 그걸 설명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아이린은 나와 생각이 다른지 데린을 마치 몬스터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불편한 대치상황은 루카가 차를 끓여올때까지 계속됐다. 돌아온 루카는 이 상황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일단은 각자의 앞에 찻잔을 하나씩 두고는 데린의 옆에 앉았다.
"나중에 한 번 찾아뵈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어쩐지 두 사람은 과묵한 오빠와 잔소리하는 여동생 같은 이미지였다. 루카가 내온 차를 홀짝이며 루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우선 이번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그 녀석들은 전원 길드에서 추방하고, 바스티안 영지의 법대로 처벌할 생각이에요."
호오. 사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자기 길드원을 챙기는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단호한 처사였다.
외부인의 입장에서보면 이렇게 처리하는게 당연하지만, 같은 길드원들에게 있어서는 그래도 한솥밥을 먹던 식구를 너무 매몰차게 쫓아내는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길드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가족같이 끈끈한 유대니까. 나도 나이트 울프 길드에게는 딱히 감정이 없었기에 적당한 수준의 처벌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이미 흠씬 두들겨패준걸로 화는 어느 정도 풀렸으니까.'
특히 제니아는 아이린을 놀라게 한 죄로 적어도 반 년은 모험가로 활동할 수 없도록 몸을 아작내놨다. 저렇게 만신창이가 되서 돌아온 것을 보였으니 한동안은 얼굴을 들고 돌아다니기 힘들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일단은 길드원이잖습니까."
다른 길드원들과의 결속이 약해지거나 믿음이 흔들릴 수도 있다. 루카는 그걸 알고 있는걸까?
"만약 루디 씨가 상대가 아니었다면 저희도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봤겠지만, 은인의 목숨을 위협한 사람을 감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다시 한 번 길드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점 사과드릴게요."
루카와 데린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과묵하게 앉아있던 데린이 저런 모습을 보이자 더욱 그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진심어린 사과도 받았기에 나도 꽤 기분이 풀렸고, 아이린도 경계심을 거두어들였다.
"두 분의 진심은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 그만 고개를 드셔도 됩니다. 그보다는 다른 걸 물어보고 싶은데요."
"말을 놓아주세요. 루디 씨는 저희의 은인이니까요."
루카의 말에 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루카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 그럼 물어볼게. 너희는 나를 진작에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만, 내 기억에는 너희를 만난 적이 없거든. 혹시 어디서 만났는지 알 수 있을까?"
수인족들에게 있어서 '은혜'라는 것은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예전 파티원인 '사야'와 '세이빌'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적이 없었다.
"아아... 확실히 루디 씨는 기억하지 못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애들이 많기도 했고, 지금과 달리 그때는 어렸으니까요."
그렇게말한 루카는 잠시 고민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내게 부탁했다.
"죄, 죄송하지만 잠깐만 뒤로 돌아보고 있어 주시겠어요?"
"응?"
"아무리 저라도 정면에서 보이는건 부끄럽거든요. 부탁이에요."
대체 뭘 할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루카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아이린과 함께 뒤를 돌아서 벽에 걸린 무구들을 감상하고 있자, 잠시 후에 루카가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돌아보셔도 되요..."
고개를 돌리자 드러난 모습에 나도 모르게 할 말을 잃었다. 루카는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 헐벗은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행히 드러낸건 등쪽이었다.
새하얀 피부의 매끈한 등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그녀의 등 가운데에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 너무 뚫어져라 보지 말아주세요..."
"윽!"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에 정신이 돌아왔다.
옆을 보니 방금 내 허벅지를 꼬집은 아이린이 볼을 부풀리며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거의 다 지워져서 일부가 남아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루카의 등에 새겨져 있는 것은 분명한 '노예'의 각인이었다.
다행히 아이린에게는 그런게 없지만, 대규모로 노예를 취급하는 곳에서는 편리하게 관리하기 위해 노예에게 복종의 각인을 새겨넣는다.
상대가 누구라 하든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악질적인 각인인데, 저걸 보고나서야 루카와 데린을 어디서 만났는지 짐작이 갔다.
"레이븐 노예시장."
기억의 한구석에 쳐박혀있던 사건이 떠올랐다. 그 때 당시에는 아직 미친개로서의 성격이 남아있을 때라, 꽤나 화끈하게 날뛰었다.
'죽고싶군.'
루카와 데린이 그때의 내 모습을 봤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움에 몸서리를쳤다.
오직 아이린만이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고, 주섬주섬 셔츠를 다시 입은 루카가 그때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육 년 정도 전의 일이에요. 네. 선대 황제는 수인족에 대한 탄압을 심하게 하는 바람에 한창 수인족을 붙잡아 노예로 만드는 일이 빈번했어요. 저와 데린도 그들에게 잡히는 바람에 레이븐 노예시장에 갇혔었고요."
데린과 루카는 그곳에서 만났다고 한다. 좁은 철창에 수인족들을 몰아놓고, 최소한의 식량만을 배급받으며 그들을 사갈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수인족들이 노예로 팔려가서 사람 취급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짐꾼이나 하면 다행일까, 가학적인 악취미를 가진 상인이나 귀족들이 사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두들겨 맞는게 일상이었다.
"그렇게 한구석에 웅크려서 팔려나가기 싫다고 울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더라고요."
당연하게도 그 폭발음의 주인공은 나였다. 젠장. 남의 입으로 내가 했던 짓을 들으려니 엄청나게 부끄럽군.
"저희가 갇혀있던 감옥을 지키고 있던 관리자들도 깜짝 놀라서는 헐레벌떡 도망갔고, 무슨 일인지 몰랐던 저희는 제발 문을 열어달라고 외쳤죠. 그렇게 조금 더 기다리니 루디 씨가 나타나서 저희를 구원해주셨어요. 단신으로 노예시장의 경비와 직원들을 죄다 박살냈던거였죠."
루카는 마치 신을 경배하듯이 과장된 몸짓까지 하며 말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내가 레이븐 노예시장에 쳐들어간 날 밤, 나는 사야의 어리광으로 그녀와 함께 거리의 야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간식도 사먹고,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 구경도 하면서 휴일을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사야가 사라져 있었다.
알고보니 노예상이 부리는 조직에서 사야가 모험가란 사실도 모르고 납치한 것이었다.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할 때의 경험을 살려 놈들의 흔적을 쫓았고, 새벽이 되어서야 레이븐 노예시장이란 곳으로 사야가 끌려갔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완전히 눈이 뒤집혔던 나는 레이븐 노예시장에 도착하자마자 폭발 마법을 갈겼고, 갑자기 일어난 화제에 당황하는 경비와 직원들을 모조리 쳐죽였다.
다행히 사야가 일을 당하기 전에 구해낼 수 있었고, 어차피 사고를 친 것 그냥 이곳에 있는 노예들을 모두 풀어주기로 했던 것이었다.
갇혀있는 수인족들에게 동질감을 느낀 사야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런 귀찮은 일은 하지도 않았겠지만, 결국에는 갇혀있던 모든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다.
노예들에게 각인을 새긴 마법사가 죽었는지 각인은 더 이상 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수백 명이 넘는 노예들이 도망쳐나왔다. 루카와 데린은 그들 중 하나였다.
"그때 도망쳐나온 친구들 몇 명과 함께 길드를 만들었고, 그게 바로 나이트 울프랍니다."
그때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소리치던 어린애들이 커서 B랭크 길드를 이끄는 수뇌부가 됐다니. 새삼 세월이 흐른게 느껴졌다.
"그럼 너와 데린 말고도 내가 구해준 녀석이 길드에 몇 명 더 있다는 소리야?"
"네. 지금은 몬스터 토벌 때문에 다들 밖에 나가 있지만 저녁이 되면 돌아올거에요. 그 애들도 루디 씨를 만나면 좋아할거에요."
루카가 방긋 웃으며 말했지만 잘 실감이 나질 않았다. 사실 루카에게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때의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거기 있던 수인족이 한둘도 아니고, 사야를 구하러갔다가 깽판을 쳤다는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저희가 바스티안 영지에 내려온 것도 반쯤 루디 씨 때문인걸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수인족은 입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으니까요. 저희 길드가 어느 정도 힘이 생기고나서 루디 씨에게 길드 마스터 자리를 맡아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어요."
확실히 나이트 울프 정도의 길드 마스터라면 명예로울 뿐만 아니라 권력을 가질 수 있다. 적어도 이런 영지 내에서는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려와보니 루디 씨는 더 이상 모험가로 활동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길래 일부러 접촉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던거에요."
가끔씩 거리에 나갔을 때 느껴지는 시선은 이 녀석들이었나.
"내 마음을 헤아려줘서 고맙다. 네 말대로 나는 이제 나서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거든. 그러니 딱히 은혜를 갚는다거나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
그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지내면서 부족한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도움받을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자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데린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는 강대한 마력이 담겨있었다.
"저희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은 온전히 당신 덕분입니다. 평생에 걸쳐도 갚지 못할 은혜를 외면할 수는 없으니 부담갖지 마십시오."
아니. 그런 말이 더 부담을 준다고.
루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데린의 등을 주먹으로 두들겨댔지만 데린은 여전히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아. 그래.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탁 좀 할게. 일단은 그런걸로하자."
"죄송해요. 루디 씨. 데린도 원래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언령을 익힌 뒤로는..."
확실히 말을 할 때마다 저런 마력이 담기면 제대로 대화를 하기도 힘들겠지. 자신이 원해서 과묵해진 것은 아니라는걸까.
'조금 연구해보고 싶네.'
미지에 대한 탐구는 모든 마법사들의 로망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거기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편에 나온 사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설명이 추가될 것 같습니다!
2. 질투하는 아이린 귀여워어...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3. 토끼귀 수인족도 정말 귀여운데 말이죠.
쿠폰은 작가의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