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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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만 돌아가볼게."
용건이 끝났으니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아이린 역시 피곤한지 어느새 내 팔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
"벌써 돌아가시게요?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돌아간다는 말에 루카는 아쉬워하며 식사를 권유했지만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좀 피곤해서. 쉬고 내일 다시 찾아올게."
"알겠어요.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다시 찾아오겠다는 대답에 루카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길드 정문까지 배웅해주었다. 잠든 아이린이 깨지 않도록 등에 업고 집무실을 나왔다.
길드의 부마스터인 루카가 직접 정문까지 배웅을 하러나오자 그걸 본 다른 녀석들이 힐끔힐끔거렸다. 생각해보니 디아나와 할터에게도 인사를 해야하는데.
'내일 다시 찾아왔을 때 하면 되겠지.'
설령 내일 못 만나더라도 두 사람 성격상 나를 한 번쯤은 찾아올 것이다.
새벽 일찍 행군을 한 덕분에 슬슬 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한동안 야영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더욱 쉽게 지쳤다.
거리는 이제 막 영업을 시작하는 가게와 바닥에 돗자리를 깔며 자리를 잡는 장사꾼들로 붐볐다. 그들 중 일부는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웃음으로 화답하며 느긋하게 담소를 나눴겠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기에 인사만 하고 빠르게 지나쳤다.
집에 도착할 때 즈음, 아이린이 잠에서 깼는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으응...주인님...?"
손등으로 눈가를 부비며 나를 찾는 아이린은 마치 아기고양이 같았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단다. 씻고나서 푹 자렴."
내 목소리를 듣고는 안심한 그녀는 내 등을 꼭 끌어안았다.
"네에..."
당장이라도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야영으로 더러워진 차림으로 잠들었다간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집에 도착하고 꾸벅꾸벅 졸고있는 아이린을 깨웠다.
하지만 잠이 덜 깼는지 자꾸만 눈을 감으려하는 아이린이었다. 잠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아이린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욕실로 데려갔다.
대야에 물을 가득 받고, 아이린이 얼굴을 숙이게 하고는 대야의 차가운 물을 손으로 퍼서 그녀의 얼굴을 씻겨주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아이린이 눈을 떴다.
"으앗?!"
"피곤한건 알지만 조금만 참으렴."
손에 거품을 내서 아이린의 얼굴에 문지르고, 다시 대야에 받아놨던 물로 얼굴을 헹궜다. 세수를 끝내고 수건으로 아이린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내게 씻겨진 것이 부끄러운지 아이린은 좀처럼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런것 가지고 뭘. 나머지는 혼자 씻을 수 있지?"
"네."
아이린은 밤동안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욕실을 나와 문을 닫고는 아이린의 방으로 들어가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평소에는 아이린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기 위해 그녀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에 주문제작한 옷장에는 나와 함께 골랐던 옷과 아이린이 혼자 산 옷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씩 아이린에게 용돈을 주는데, 아이린은 처음에는 이 돈을 저축하려 했지만 나는 스스로를 꾸미거나 음식을 사먹는데 쓰라고 확실하게 못박았다.
최근에는 서점에서 책을 사 읽거나, 옷을 사 입는 취미가 생긴 것 같다.
옆을 보니 처음에는 텅 비어있던 책장이 소설책으로 가득차 있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마법사와 공주의 로맨스', '나는 당신의 노예'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연애소설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다. 물론 그 뿐만 아니라 마법 공부를 할 때 필요한 서적들도 있었다.
이런 책들이 아이린의 취향인가 싶어 잠시 책을 꺼내 훑어보다가 욕실쪽에서 물소리가 들리자 괜스레 움찔해서 책을 제자리에 꽂아놓고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에는 청순한 느낌의 원피스도 있고, 어딘가 요염해 보이는 네글리제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지난번에 아이린이 입었던 순백색 네글리제를 한 벌 꺼냈다.
그 다음에는 서랍을 하나하나 열어보며 속옷이 담긴 서랍을 찾았다.
"......"
서랍에는 브래지어와 팬티가 잔뜩 들어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구석 한 켠에 있는 속옷 한 쌍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속옷'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는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로 천 면적이 적은 검은색 브래지어와 팬티. 누가봐도 남자를 유혹할 때나 사용할법한 속옷이었다. 심지어 팬티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어 안쪽이 노골적으로 비쳐보일 것 같았다.
머리를 망치로 한 대 두들겨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멍하니 있던 나는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아이린도 이제 다 컸으니 저런걸 살 수도 있지. 어쩌면 실수로 산걸지도 몰라. 어떤건지 궁금해서 사봤지만 설마 저런 것인줄은 몰랐던거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아까의 속옷은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무난한 핑크색 브래지어와 팬티를 집어 아까 챙겼던 순백색 네글리제와 함께 들고나갔다.
챙겨온 속옷과 옷을 욕실 앞에 내려놓았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최대한 무시하면서 두어 번 노크를 하고 말했다.
"갈아입을 옷은 욕실 앞에 두마."
"네. 감사합니다."
빗자루를 챙겨와서 바닥을 쓸었다. 하지만 청소를 하는 내내 방금 전의 그 음란한 속옷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점점 더 망상은 가지를 뻗어나가 야한 속옷을 입은 아이린의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욕실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물기가 조금 남아있는 가녀린 팔이 뻗어나와 문 앞에 놓인 옷을 가져갔다.
그제서야 철렁였던 가슴이 비로소 진정됐다. 하마터면 이상한 상상을하고있는 모습을 아이린에게 들킬 뻔 했다.
'요즘 욕구불만인가?'
확실히 최근에는 여자와 몸을 겹칠 여유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이린을 상대로 욕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차라리 어디가서 한 발 빼고 오는게...
"저기... 주인님."
내가 고민하는 사이 아이린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왜 그러니?"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혼자 자기 조금 무서워서 그런데... 함께 잘 수 있을까요?"
아이린의 애원하는 눈빛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어제 여러 명에게 포위 당해 공격받는 경험은 여자아이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일이다. 어쩌면 트라우마가 되서 악몽을 꿀지도 모른다.
변명할 수 없는 내 실책이었기에 나는 아이린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래. 같이 자 주마. 나도 씻고 들어갈테니 먼저 방에 가 있으렴."
내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린은 기뻐하며 서둘러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보다 더욱 성숙해진 다 큰 처녀와 한 침대에서 잠든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래도 아이린은 나를 믿고 있을테니 어쩔 수 없지.'
만약 아버지처럼 따랐던 내가 아이린을 덮쳤다간 그녀가 느낄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겠지. 내가 아이린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결국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몸을 씻고 나왔다. 씻는 동안에도 혹시나 내가 절제심을 잃고 아이린을 덮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한 머릿속의 잡념을 뿌리치려 했다.
그렇게 욕실에서 씻고 나와 방으로 돌아가자, 미리 침대 한 켠에 자리잡고 앉아있는 아이린이 있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잠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새삼 그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실감났다.
아이린은 첫날밤의 새신부마냥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불을 끌어당겼고, 나는 그런 아이린의 옆에 아무렇지 않은 척 누웠다. 분명 전에는 둘이서 눕기에 충분한 크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붙지 않고서는 누울 수 없을 정도로 좁게 느껴졌다.
코앞에 다가온 아이린의 얼굴은 엘프나 요정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몸이 성장을 거듭하면서 풍기는 분위기부터 달라졌다. 분명 평소에 입는 잠옷과 다른게 없었는데도 요염하게 느껴졌다.
아이린은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쪽으로 돌아누웠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 허리에 양팔을 감으며 끌어안았다. 평소와 다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몸을 밀착시켰다.
나를 꼭 끌어안은 아이린이 몸을 부빌 때마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이 문질러졌다.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운 감촉에 슬쩍 시선을 내리자 가슴골 사이로 보이는 새하얀 살결에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 내가 챙겨준 속옷은 어디갔는지 네글리제 안쪽으로 가슴이 비쳐보였다. 설마 아랫쪽도 입지 않은건 아니겠지?
발칙한 아이린의 유혹에도 나는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하는지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이린은 이제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냄새를 맡아댔다. 평소의 순진한 미소를 대신해서 요염한 눈빛을 한 아이린의 붉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평소처럼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방금 씻을 때 사용한 비누 향기가 났다.
아이린이 비록 성인식은 치르지 않았지만 외견으로는 성인과 다를 바 없었다. 잘록한 허리와 꽤나 커진 가슴, 거기다 보는 눈이 호강할 정도로 매끈한 각선미까지.
요즘 동네 청년들이 아이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아직 고백을 한 녀석은 없는 것 같지만 아이린과 함께 거리를 돌아다니면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은 이성에게 절대적인 매력과 호감을 품게 만드는 '서큐버스'다웠다.
붉게 빛나는 아이린의 눈동자를 쳐다볼수록 점점 이성의 끈이 희미해졌다. 속살이 언뜻언뜻 보이는 자세로 혀로 도톰한 입술을 핥는 그녀를 보니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
정신을 차렸을 때의 나는 그녀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만약 일 초만 늦었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겠지.
"주인님...?"
나를 간절하게 부르는 아이린의 목소리에 그녀가 뭘 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왜 내가 아까부터 평정심을 잃었는지도.
평소에는 숨기고 있던 아이린의 어깻죽지에 달려 있는 날개가 튀어나와 있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도 그렇고, 그녀의 머리 위에 솟아있는 뿔도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아이린은 자신이 서큐버스라는 사실을 드러내는걸 싫어해서 평소에는 늘 숨기고 있었는데, 지금은 서큐버스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위장이 풀렸다.
희미한 정신을 붙잡고 마나를 사용해 몸에 남아있는 마력의 기운을 밀어냈다. 그 작업을 끝내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상상 이상으로 마나를 소모하는 바람에 몸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아이린이 저런 유혹을 하는 순간 거절했겠지만, 방금 전의 나는 그녀에게 홀린 것처럼 저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린이 서큐버스로서의 능력을 각성한 것인지, 그녀의 내면에 잠재된 본능이 일깨워진 것인지는 몰라도 방금 전 아이린이 내게 사용한 마법은 서큐버스들이 사용하는 유혹 마법과 같은 종류였다.
내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린의 몸이 크게 움츠러들었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꼬리도 좌우로 줄기차게 흔들리며 그녀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는 작가에게 힘이 됩니다!
1. 사실 이번 편을 쓰면서 며칠이나 머리를 쥐어뜯었습니다. 분명 이번 챕터를 기점으로 아이린과 주인공의 관계가 변하게될텐데, 어정쩡하게 썼다간 완결까지 내내 시원찮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2. 그래서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면서 짜놨던 스토리와 설정을 재검토했습니다. 아이린은 이 작품을 쓰기 전부터 제가 계속 구상해왔던, 몇 년 전부터 제 머릿속에 들어 있던 캐릭터라 절대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거든요.
3. 생각해보면 메인 히로인이 230편이 될때까지 이 정도로 관계에 진전이 없었다는게 신기할 정도지만, 원래 뜸을 들일수록 재밌는 법이죠. 이 부분은 애교로 봐주시면 좋겟습니다. 헤헷.
4. 새로운 아이린 커미션을 신청해서 일러스트를 받고 싶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글 업로드 주기가 뜸해지는 바람에 오히려 더 힘들어졌네요. 시험기간만 지나가면 정말 하루종일 글만 쓸 수 있을텐데...
5. 그래도 이번 챕터는 최대한 매일 연재를 목표로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써보겠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오타는 댓글로 알려주시면 확인하는대로 수정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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