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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화 (232/260)

2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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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린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었다. 아이린의 몸이 민감한 것인지, 이런 스킨쉽이 처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앞으로는 조금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얼굴을 보여주면 나도 참기 힘들단 말이지.'

아이린을 이성으로 생각하는 순간부터 내가 쳐놨던 벽은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무엇보다 아이린도 더 이상 내게 다가오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노골적인 애정 행각에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방을 나오니 부엌 탁자 위에 냄비가 놓여있는게 보였다. 냄비 옆에는 두 사람 몫의 식기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먼저 일어난 아이린이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깨우러 왔던걸까. 냄비 뚜껑을 열어보자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스튜가 가득 담겨 있었다.

스푼으로 한 번 맛을 보니 꽤나 신경써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를 휘어잡으려면 위장부터'라고 했던가.

요즘 들어서는 아이린이 집안의 가사를 도맡아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물론, 빨래와 청소까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서서 했다.

덕분에 나는 한결 수월하게 포션 제작과 마법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아이린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으으..."

스튜를 그릇에 나눠 담고있자 아이린이 쭈뼛거리며 걸어나왔다. 아직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걸으면서도 조금 비틀거렸다. 탁자 옆에있는 의자를 꺼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아까는 미안했어. 나도 장난이 심했네."

"아니에요. 오히려 주인님의 그런 짓궂은 면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은 진심으로 보였다. 어쩌면 귀와 꼬리라는 성감대를 동시에 자극당해서 그쪽에 눈을 뜬 걸지도.

아이린이 차린 스튜와 찬장에 남아있던 빵과 우유로 아침 식사를 마쳤다. 다 먹은 식기를 정리하고 슬슬 영업 준비를 했다. 어제 하루를 통째로 날렸기에 평소보다 성실하게 일해야했다.

창고에서 들고온 포션들을 빈 진열장에 채워넣고, 먼지가 쌓인 바닥을 빗자루로 쓸었다. 내가 청소를 하는 동안 아이린은 부엌에서 설거지를 맡았다.

반나절이 넘게 잔 덕분인지 컨디션은 최고였다. 야영의 피로 따위는 날아간지 오래였다. 얼추 청소를 끝내고 앉아있자 슬슬 하루를 시작하려는 모험가들이 가게를 찾았다.

설거지를 끝낸 아이린도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첫 손님이 찾아오자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아이린은 언제 봐도 참 활기차구나. 잘 지냈니?"

"네. 오늘은 어떤걸 사러 오셨나요?

그렇게 손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아이린은 그가 찾는 포션을 가지러 창고로 향했다. 그가 찾는 물건은 리자드맨이 서식하는 늪지대의 독초나 마취향에 저항할 수 있는 해독제였다.

평소에는 잘 팔리지 않는 포션이라 꺼내놓지 않았기에 창고에서 직접 찾아와야했다.

"저 해독제를 찾다니. 늪지대에 갈 일이라도 있나 보군요?"

"그래. 옆의 그레이스 공작가에 있는 마탑에서 늪지대에서 자생하는 약초를 가져오면 한 포기당 1골드라는 거금을 내걸었거든."

호오. 확실히 돈이 많은 마탑답게 파격적인 보수였다. 평소에 모험가들에게 팔아먹는 값비싼 아티팩트와 스크롤들로 번 돈을 이렇게 쓰는거겠지.

"부디 좋은 소식 있기를 바라죠."

"고맙군. 그런데 혹시 아이린에게 무슨 일 있었나?"

머릿속으로 어제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다.

"...아뇨? 그런건 왜 물어보십니까?"

"어쩐지 지난번에 만났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이야. 전보다 좀 더 어른스러워졌다고 해야하나?"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기분탓일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아이린에게 신경 좀 써주게. 저렇게 착한 아이가 또 어딨겠나."

잠시 후 돌아온 아이린에게 해독제를 건네받은 그는 감사인사를 하고 나갔다. 손님을 배웅한 아이린은 장부를 펼쳐 방금 판매한 포션의 이름과 수량을 기록했다. 그런 아이린을 쳐다보고 있자 시선을 느낀 아이린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주인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첫 손님의 뒤를 이어 모험가들이 잔뜩 몰려왔다. 평소처럼 하급 포션을 사러온 모험가도 있고, 처음 찾아왔던 그처럼 마탑의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해독제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찾아오는 손님들마다 똑같은 소리를 했는데, 아이린이 조금 변한 것 같지 않냐는 말이었다. 좀 더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 평소보다 더 활기차다.

각자 다른 말이었지만 하나같이 긍정적인 의미였기에 나는 그런 것 같다고 맞장구쳤다.

아침에 몰린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청소를 하고, 재고를 채워넣었겠지만 오늘은 달리 할 일이 있었다. 아이린에게 선물해주기로 했던 반지의 작업을 마쳐야했다.

"그럼 아이린. 부탁할게."

"물론이에요. 주인님."

창고에 돌아온 나는 램프에 불을 켜고 마지막으로 작업하고 내버려둔 반지를 살폈다. 손수건으로 반지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다시 장비를 챙겨 섬세하게 보석을 세공하기 시작했다.

문스톤은 강도가 높지 않아 조금만 힘을 주면 손쉽게 바스라진다. 물론 일반인이 아닌 마나를 사용했을 때의 기준이지만 여러모로 세공하기는 까다로운 보석이었다.

그래도 이걸 받고 기뻐할 아이린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만. 점점 처음 구상했던 형태를 갖춰가는 반지와 함께 나는 준비한 마법술식을 주입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반지가 보이지 않게 하는 위장 마법.

착용자의 컨디션을 조절해주는 보조 마법.

마지막으로...

'이건 비밀로 해두자.'

나중에 아이린의 마법 실력이 조금 더 성장한다면 그 때는 스스로 눈치채겠지. 저 세 가지 마법을 주입하는데 걸린 시간이 세공하는데 걸린 시간보다 길었다.

단순한 보석에 마법을 주입해 아티팩트로 만드는 작업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래도 푹 자고 일어난 덕분인지 여유롭게 마나를 흘려넣으면서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작업이 끝날 때 즈음에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저녁을 준비하며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모험가들에게 장사를 준비했겠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었다.

'슬슬 나가봐야겠네.'

나가기 전에 완성된 반지를 램프의 불빛에 비춰보았다. 아이린의 머리카락 색깔과 닮은 연보랏빛 보석이 반짝였다. 완성된 반지를 작은 함에 넣고 주머니에 챙겼다.

창고를 나오니 진열장을 정리하고 있던 아이린이 뒤를 돌아봤다.

"주인님. 작업은 끝나셨어요?"

"그래. 그보다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을 생각인데. 괜찮니?"

아이린은 어제 루카와 대화하는 내내 피로 때문에 졸고 있었기에 오늘 루카에게 찾아가기로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네. 어디로 가실 생각이세요?"

"어제 갔던 나이트 울프 길드에서 만찬에 초대했어. 내가 씻고 나올 동안 외출 준비하렴."

사방이 막힌 창고 안에서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내 몸은 땀범벅이 되어있었다. 내 방에서 갈아입을 속옷을 챙겼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 벗은 옷을 빨래통에 담아두었다.

욕실에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차가운 물로 헹궜다. 거칠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벅벅 문지르며 거품을 내고, 온 몸을 깨끗이했다. 혹시나 아이린에게 땀냄새 난다고 지적받을까봐 그런게 절대 아니다.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아까 내가 빨래통에 던져넣었던 옷들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부지런한 아이린이 벌써 빨랫감으로 분류한걸까.

아이린의 방문이 닫혀있는 걸 보니 아직 준비가 한창인 것 같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여유롭게 탁자에 앉아 아이린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이린은 오 분 정도 지나고 얼굴에 희미한 홍조를 띄운 채 나왔다.

평소보다 그녀의 몸에서 열기가 느껴져서 감기에 걸린건가 싶었다.

"아이린. 괜찮니? 몸이 안 좋으면 무리할 필요 없단다."

"괜찮아요. 오랜만에 주인님과 함께 외식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해서 그래요."

확실히 이마에 손을 올려봐도 열이 나지는 않았다. 집을 나서자 슬슬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겨울인만큼 전보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훨씬 빨라졌다.

겨울이라.

겨울은 대부분의 몬스터와 동물들이 동면을 택하는 시기다. 모험가들의 입장에서는 비수기나 다름 없는 시기다. 드물게 몬스터들이 동면하는 곳을 찾으며 쑤시고 다니는 모험가들도 있긴하다.

그런 놈들은 대부분 쏟아지는 눈에 길을 잃고 동사하거나, 분노한 몬스터들의 식량 비축분이 되곤한다.

자연스레 모험가들이 가게를 찾을 일도 줄어든다.

'이번 겨울에는 여행이라도 갔다올까.'

작년에는 나 홀로 가게를 지켰기에 상관 없었지만, 지금은 아이린을 위해서라도 여러 곳을 구경시켜주고 싶었다.

만약 여행을 간다면 어떤 곳이 좋을까.

예전에 내가 돌아다녔던 곳을 떠올리며 여행 계획을 짜는 동안, 내 손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시선을 돌리니 아이린이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아이린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서로 손을 잡고 거리를 걸어다니는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특히 아이린은 영지 내에서 유명인사였기에 거리에 서 있던 남자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곧 고개를 돌렸지만, 모르는 놈들은 나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아이린이 조금 더 크면 얼마나 추파를 받을지 벌써부터 짐작됐다.

"...아이린. 혹시 다른 남자들한테 고백받은 적 있니?"

"네. 여섯 명 정도한테 고백받았어요."

역시 그런가. 확실히 급성장 이후로 아이린의 외모는 시골 소녀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게다가 모두에게 상냥하고 착하기까지하니 남자들이 뻑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건 어쩔 수 없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주인님뿐이니까요. 고백한 분들에게도 죄송하지만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절했는걸요."

아이린은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질투심으로 끓어올랐던 피가 가라앉고, 턱 막혔던 숨통이 뚫렸다.

"그래도 저는 주인님이 질투해주셔서 기뻐요."

"그래?"

"저도 주인님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닐 때마다 똑같은 기분을 몇 번이나 느꼈는걸요. 물론 주인님이 그만큼 매력적인 남자란 뜻이겠지만요."

싱긋 웃은 아이린은 내 팔과 팔짱을 끼며 더욱 가까이 달라붙었다. 정말이지 남자의 기분을 들었다놨다하는 요녀가 따로 없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다들 즐거운 주말 되셨나요? 벌써 12월 중순이 되어가며 한창 쌀쌀한 날씨가 되는데, 모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2. 앞으로는 시도때도 없이 아이린과 주인공의 애정행각이 나올 예정이니 기대해주세요!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은 늘 확인하고 있으니 오타나 개선점은 알려주시면 바로바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4. 그리고 후원 쿠폰과 원고료 쿠폰 주신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에 보답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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