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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화 (233/260)

233화

<-- Ch 47 -만찬회- -->

아이린과 대화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나이트 울프의 길드 하우스에 도착했다. 다행히 루카가 길드원들에게 미리 언질을 줬는지, 문을 두 번 노크하자 나온 수인 소녀가 길드 안쪽으로 안내해주었다.

"그런데 두 분은 길드 마스터와 잘 아는 사이신가요? 마스터가 손님을 초대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예전에 그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이 영지에서 재회하게 되서 식사를 대접받게 됐습니다."

내 말에 납득했는지 소녀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소녀를 따라 도착한 만찬장에는 데린과 루카를 포함해 총 여덟 명의 수인족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고양이, 개, 여우, 늑대 등 각양각색의 수인족들이 앉아서 우리를 반겼다. 여기까지 우리를 안내해준 소녀는 '즐거운 만찬 되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물러났다.

그렇게 소녀가 만찬장의 문을 닫고 나가자 자리에 앉아있던 수인족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수인족답게 평소 단련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을 몸짓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어제 인사를 나눈 데린과 루카를 제외한 그들은 내게 다가와 악수를 건넸다.

"드디어 인사를 드리는군요. 저는 키엘이라고 합니다. 루디 씨가 구해주신 덕분에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세린이라고 해요! 저는 루디씨가 저를 구해주셨던 날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었답니다! 불길을 뚫고 저를 구하러 와주신 루디 씨의 모습은 정말..."

"제이미라고 합니다. 혹시라도 힘쓸 일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목숨을 바쳐서라도 돕겠습니다."

다들 내 손을 맞잡고 그런 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잠시 소란이 일어났지만 데린이 식탁을 가볍게 한 번 두드리는 것으로 조용해졌다. 그 뒤에는 루카가 대화를 이끌었다.

"맞아요. 자세한 이야기는 식사하면서 나누자고요.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루카의 명령에 다른 수인족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제자리에 착석했다. 나와 아이린은 빈 자리에 앉았다. 아이린도 부담스러웠던 것은 마찬가지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들 알다시피 루디 씨는 저희가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게 도와주신 은인이에요. 그리고 이 자리는 저희의 감사를 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고요."

루카가 박수를 한 번 치자 만찬장의 문이 열리며 아까 우리를 안내해준 소녀와는 다른 수인족이 상자가 가득 담긴 카트를 밀고왔다.

"그래서 식전에 간단한 선물 증정식을 하기로 했어요."

카트에 실린 상자들은 크기가 전부 제각각이었다. 내 손바닥만한 상자도 있는가하면, 내 키보다 큰 상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았다.

사야와 세이빌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수인족들은 선물 고르는 센스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게 꼭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 법이다. 그래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소녀는 옆까지 카트를 밀고와서 담겨있던 상자들을 차례대로 내 앞에 내려놨다. 모든 상자를 꺼낸 그녀는 다시 카트를 밀며 유유히 돌아갔다.

설마 이런 이벤트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했다.

그래도 다들 나를 위해서 준비해준 선물인만큼 기꺼운 마음으로 개봉하기로 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끈을 풀고 포장을 뜯어냈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다름아닌 책이었다.

꽤나 오래 전의 서적인지 닳은 티가났다. 책의 제목 부분에 적혀 있는 글자는 제국어가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년 전에나 사용됐을 고대어였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문자를, 그것도 휘갈겨쓴 글씨를 알아보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

"'태초의 마나에 대한 탐구'인가."

척 봐도 심상치 않은 제목이었다. 책장을 넘기니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있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슬쩍 목차를 훑어보니 마나의 근원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이유까지 꽤나 심도있게 기록해놓았다.

마나에 대한 고대인의 견해는 좀처럼 얻을 수 있는게 아니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본다면 눈독을 들이기에 충분했다. 마나를 다른 관점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사용법이나 시야의 폭이 확 넓어지니까.

이 책은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었다.

"이 책을 선물해준건 누구야?"

"접니다."

손을 든 남자는 아까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대던 견인족이었다.

"고마워. 마법 연구에 잘 쓰도록할게."

"아닙니다. 어차피 저는 고대어를 못읽으니 쓸모도 없고, 루디 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첫 선물상자의 개봉을 끝내고 빠르게 다음 상자를 열었다. 앞으로도 상자는 일곱개나 더 남아있었다.

거침없이 포장을 뜯어내고 꺼낸 두 번째 상자의 내용물은 안경이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들고 살펴보고있자 루카가 손을 들었다.

"그, 그건 제 선물이에요! 책이나 서류를 읽을 때 훨씬 바른 속도로 읽는걸 보정해주는 아티팩트에요!"

루카의 말대로 안경을 쓴 다음 아까 받은 책을 펼치자 확실히 그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수많은 활자들이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읽어졌다. 오히려 전보다 머릿속에 생생하게 정보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아티팩트도 있는건가. 책을 즐겨 읽는 내 입장에서는 정말 고마운 선물이었다.

"이렇게 좋은걸 선물받으면 조금 부담스러운데."

"괜찮아요! 이때까지는 제가 사용했었지만, 루디 씨를 위해서라면 그런 것쯤은 얼마든지..."

그렇게 소리치는 루카의 쫑긋 솟은 토끼귀가 마구 흔들렸다. 그보다 원래 루카가 쓰던거였단 말이지. 안경을 벗어 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자 옆구리가 따끔했다.

옆을 보니 아이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검지손가락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귀여운 질투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들고있던 안경을 탁자 위에 내려놨다.

그 후로도 선물 개봉식은 계속됐다. 연금술의 재료로 사용되는 오우거의 심장, 무기를 만들 때 필수적인 미스릴, 엘릭서의 재료 중 하나인 하룬 꽃 등 하나같이 몇십 골드까지도 호가하는 값비싼 것들이었다.

물론 중간에 이상한 선물이 하나 끼여있긴 했다. 그 상자를 처음 열었을 때는 눈을 의심했다.

안에 들어있던 선물의 정체가 다름아닌 여성의 팬티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선물을 잘못 담은걸까 싶었지만 육감적인 붉은색의 팬티를 들고있는 나를 보고 한 소녀가 해맑게 소리쳤다.

"그건 제 선물이랍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속옷인데, 루디 씨에게 선물로 드릴게요!"

이 팬티의 주인은 아까 눈을 반짝이며 달라붙던 여우 수인족 소녀였다. 이름이 분명 세린이라고 했지. 세린의 고백과 동시에 만찬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루카는 세린에게 화를 냈다.

"세린! 루디 씨한테 팬... 속옷을 선물하다니! 정신 나간거 아니야?! 누가 여우 아니랄까봐!"

"뭐 어때? 루카. 루디 씨한테 내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인걸?"

태연하게 루카의 말을 받아친 세린은 나를 향해 윙크했다. 내 손에 들려있는 팬티는 아슬아슬 할정도로 적은 천면적뿐만 아니라 붉은색과 검은색이 섞여 퇴폐미를 물씬 품어내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아끼는 것이라는 말도 신경쓰였다.

이미 몇 번이나 입은 속옷을 선물하다니. 어지간한 변태 커플도 그런 짓은 안할거라고.

손에 쥐고있는 팬티를 어떻게 처리해야하나 고민하던 도중, 아이린의 차가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나 역시 피해자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아이린에게는 아무런 변명도 되지 않겠지.

결국 그 팬티는 세린에게 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다른 수인족들이 재미있는 헤프닝으로 넘긴 반면, 루카는 아직도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상자는 내 손바닥만한 크기의 푸른색 상자였다. 이게 마지막이니 유일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데린의 선물이겠지.

과연 어떤 선물일까. 호기심에 상자를 들어보자 안에 뭐가 들어있긴한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가벼웠다.

데린을 한 번 쳐다봤지만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길드원들도 데린의 선물이 궁금했는지 시선이 쏠렸다.

조심조심 끈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

내 엄지손가락만한 포션병 하나가 전부였다. 병 안에 들어있는 액체는 물처럼 투명한 색이었다. 별다른 향도 나지 않는걸보면 약품은 아닌듯했다.

"데린. 이게 뭔지 물어봐도 될까?"

데린의 성격상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걸 선물했을 것 같지는 않다. 데린은 나와 길드원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과묵한 입을 열었다.

"요정 여왕의 눈물입니다."

언령의 힘이 담긴 그의 목소리가 만찬장 안에 울려퍼졌다.

그 대답과 함께 길드원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요정 여왕이라면 나도 한 번 만나본 적이 있다. 숲 외곽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요정을 다른 요정들에게 데려다주고, 여왕에게 보답으로 아티팩트를 선물받았다.

병에 담겨있는 액체를 주의깊게 관찰했다. 약하게 병에 마나를 주입하자 병 안의 액체가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 서적에서 읽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이런건 어떻게 구한거야?"

요정의 눈물은 상급 마법의 촉매가 되거나 값비싼 포션을 만들 때의 재료로 사용된다.

그 중에서도 요정 여왕의 눈물은 한 방울만으로도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고, 늙은이를 회춘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귀한 재료였다.

"요정 여왕의 부탁을 받아 의뢰를 수행하고 보답으로 받은 물건입니다."

데린이 어떤 의뢰를 수행했는지는 모르지만 요정 여왕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고보니 요정은 인간을 싫어하고 수인족과 엘프를 좋아한다고 했었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예 매매가 활발했던만큼 요정들도 그 표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엘프와 더불어 요정은 그 아름다운 외모로 수요가 많았다.

가학적인 귀족들 중에는 요정의 날개를 뜯으면서 괴롭히는 놈도 있다고 들었다.

자연스레 요정들은 자신의 친구들을 잡아가는 인간을 미워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길 잃은 요정을 데리고 갔을 때도 완전 경계받았었지.

"아무튼 정말 고마워. 잘 쓸게."

요정 여왕의 눈물이라니. 어디에 쓰더라도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보물이다.

그렇게 모든 선물을 확인하고, 나는 요정 여왕의 눈물이 담긴 병을 주머니 안에 챙기고 나머지 선물들은 탁자 옆에 정리했다.

곧이어 루카가 박수를 한 번 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인족 두 명이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두 명이 미는 카트에는 애피타이저라고 할 수 있는 수프와 훈제 연어가 담겨 있었다.

야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음식 구성을 보고 역시 수인족답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대부분의 수인족들은 육식에 가깝다. 그나마 잡식을 하는 수인족이라면...

맞은편에 앉아있는 루카와 눈이 마주쳤다. 루카는 접시를 세팅하는 수인족 소년 소녀를 불러 귓속말을 했다. 그들은 나와 아이린에게 와서는 정중히 물었다.

"혹시 샐러드가 필요하십니까?"

"응. 준비해줄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앞으로 나올 메인 요리도 틀림없이 고기 요리일게 분명했기에 지금이라도 샐러드를 맛보고 싶었다. 아이린과 나는 스프를 맛보며 샐러드가 오기를 기다렸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아이린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지 하루도 안 되서 온갖 여자들에게 추파를 받는 루디... 아이린은 루디를 꽉 붙잡고 있어야겠네요. 안 그랬다간 어떤 여자가 루디를 채갈지 모르니까요. 후후.

2. 수인족중에서는 여우와 토끼를 가장 좋아합니다. 여우는 요염한 구미호 같은 느낌의 히로인이라 좋고, 토끼는... 음...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요?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매일 연재를 목표로 꾸준히 글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p.s 자료 조사를 하다가 '에피타이저'가 아니라 '애피타이저'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혹시 오타가 보인다면 독자분들도 망설이지 마시고 지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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