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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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옆의 여자애가 좋아하는 사람인가요?"
세린은 곤히 잠든 아이린을 응시했다. 나는 아이린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포시 옆으로 넘겨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네 마음은 받아줄 수가 없어."
만약 아이린이 내 곁에 없었다면 조금 망설였을지도 모르지만, 세상 모르고 행복하게 자고 있는 아이린 옆에서 세린의 추파를 받아줄 수는 없었다.
"루디 씨는 저런 어린아이같은 몸이 취향이신건가요?"
방금 아이린의 눈썹이 꿈틀댄 것 같은데 기분탓이겠지.
솔직히 아이린 정도면 어린애 취급을 받을 몸은 아니었다.
적당히 여문 가슴과 예쁜 다리, 소녀같은 귀여움과 성숙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잡은 외모까지 뭐하나 흠 잡을 것이 없다.
단지 눈 앞의 세린이 남자들의 본능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몸매일 뿐이다.
살짝 몸을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커다란 가슴, 탄탄한 허벅지와 잘 빠진 엉덩이는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르던 나는 최대한 돌려서 말했다.
"그런게 아니야. 중요한건 외모만이 아니잖아?"
하룻밤 상대라면 얼굴만 봐도 되겠지만 서른이 넘게 먹은 지금 그렇게 여자를 후리고 다니고 싶지는 않다. 물론 나같은 아저씨를 여자들이 좋아할리도 없겠지만.
내 진심이 그녀에게 닿았는지 세린은 생각보다 쉽게 물러났다.
"루디 씨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몇 년 전부터 루디 씨와 이렇게 만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오늘 하룻밤 정도는 끝까지 어울려주실거죠?"
세린은 내게 차이고도 가벼운 목소리로 잔을 들었다.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괜찮은 척 하는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기꺼이 그녀에게 어울려 주기로 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나는 옆에있던 맥주병을 들어 그녀의 잔을 가득 채워주었다. 마찬가지로 세린도 비어있던 내 잔에 남은 맥주를 모두 부었다.
그렇게 나는 세린과 밤새도록 대작했다. 처음에는 몇 병이나 마시는지 셌지만, 테이블에 올려져있는 술병이 열 개가 넘어가는 순간 세는 것을 포기했다.
완전히 술에 취한 세린은 팔을 휘저으며 내게 술주정을 늘어놓았다. 이제는 아예 병째로 마시던 그녀는 테이블을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그녀가 내려친 부분이 움푹 파인 걸 보고 감탄했다.
"정말이지! 제 주변에 있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약해 빠진 녀석들 뿐이라니까요!"
아니. 눈 앞에서 테이블을 우그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대부분의 남자는 도망갈 것 같은데. 세린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상당한 실력의 무투파였다. 역시 이 정도는 되야 간부 자리를 꿰찰 수 있는건가.
그녀는 평소에 쌓인 것이 많은지 한참동안 쭉정이 같은 남자들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았다.
"계속 이쪽을 힐끔대는 주제에 정작 들이댈 깡다구도 없는 놈들 뿐이고... 그래서 저는 루디씨만 기다렸는데... 히끅..."
만취한 채로 딸꾹질을 하는 세린이 그대로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에게 맞춰주느라 나도 꽤 술을 마셨지만 아직까지는 정신이 멀쩡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정신을 놓지 않고 있었다. 술을 마실 때마다 마나를 사용해 계속 술기운을 몰아냈다.
나는 쓰러지듯 품에 안긴 세린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그녀는 내 가슴팍을 양 손으로 움켜쥐고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야릇한 숨을 내쉬며 내 가슴팍에 몸을 비벼댔다.
그런 그녀의 윤기가 흐르는 꼬리를 강하게 움켜쥐자 세린은 화들짝 놀랐고, 그 틈을 타서 그녀를 완전히 일으켰다.
예상대로 그녀는 얼굴에 술기운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아까 수인족들과 대작할 때부터 그녀의 주량은 알아봤다. 나와 고작 몇 병 마셨다고 이 정도로 취할리가없지.
"정말이지... 이렇게 해도 안 넘어오시네요. 솔직히 조금 상처 받았어요.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아니. 오히려 너무 매력적이라 곤란할 정도야."
아까 세린이 내게 달라붙었을 때 느낀 부드러운 가슴의 감촉은 분명 내 본능을 자극했다. 몸을 아끼지 않고 들이대는 육탄공격에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어제의 나였더라면 못이기는척 넘어갔을지도 몰라."
세린의 외모라면 다른 남자들에게 먼저 추파를 받았으면 받았지, 이렇게 자존심을 구겨가면서까지 들이댈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아이린과의 관계가 재정립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별 생각없이 세린에게 어울려줬겠지.
오는 여자 막지 않고, 가는 여자 잡지 않는게 내 방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고작 하루 늦었다고 이렇게 될 줄이야. 시간이 참 야속하네요."
세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맞은 여자가 더 이상 궁상을 떠는 것도 보기 안 좋겠죠. 그래도 오해하지 마세요. 전 아직 루디 씨를 포기한게 아니니까.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와주세요."
마지막까지 여지를 남기며 손키스를 날린 세린은 윙크를 하며 만찬장을 나섰다.
아무렇지 않은척 하고 있지만, 그녀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착잡한 기분에 잔에 남아있는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거절하는 것은, 적의를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법이었다.
취하고 싶다는 생각에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 좀 더 맥주를 마시려는 찰나, 맞은편에 앉아있던 루카가 다가왔다.
"루디 씨. 너무 마음에 담아두실 필요 없어요. 세린의 성격이라면 며칠 안 가서 평소처럼 돌아올거에요."
"부디 그러면 좋겠네."
세린의 말투로 봤을 때 다른 남자를 사귄 경험이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첫사랑이라면 내 예상보다도 더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빈 방으로 안내해드릴게요."
마음같아서는 조금 더 마시고 싶었지만 의자에 불편하게 목을 기대 자고있는 아이린의 얼굴을 보고 일어섰다.
꿈나라에 간 아이린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등에 업고 루카의 뒤를 따라갔다. 이미 깊은 밤이라 벽에 걸려있는 발광석의 희미한 빛에 의지해 복도를 나아갔다.
루카가 안내한 곳은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방이었다. 루카가 열쇠로 방문을 열고 전등의 불을 켰다.
유일하게 술을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루카는 장롱에서 침구를 꺼내 침대 위에 이불을 펴고 각자 몫의 베개를 준비했다.
방 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괜찮았다. 푹신한 침대도 두 개나 있고, 욕실까지 딸려있었다. 꾸준히 관리를 했는지 깨끗하게 청소도 되어 있었다.
"신경써줘서 고마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디 씨는 저희의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그저..."
루카는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망설였다.
"신경쓰지말고 말해도 돼. 달리 들을 사람도 없으니까."
등에 업고있던 아이린이 깨지 않도록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 다음에는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옆에있던 의자에 걸터앉았다.
루카는 몇 번이나 입술을 뗐지만, 누워있는 아이린과 나를 번갈아보며 말을 삼켰다. 잠시 후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싱겁기는."
루카는 '푹 쉬세요'라는 인사와 함께 돌아갔다. 나는 희미하게 빛을 내뿜는 전등을 바라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가느다란 빛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 루카가 내뱉지 못하고 삼킨 말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도 세린과는 다르지만 내게 분명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루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도 방금 전 세린의 고백을 거절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겠지.
그녀들의 마음을 받아주면, 나를 이미 좋아하는 아이린과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내가 예전에 어떤 여자든 어울렸던 것은 정말로 사랑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저 마음이 맞아서 하룻밤 몸을 섞는 것쯤은 모험가들에게 있어서 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나는 더 이상 홀몸이 아니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영원히 함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앞에서 다른 여자의 고백을 수락하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일이다.
아이린이 다른 남자와 어울리는 것을 보면 그놈을 두들겨패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처럼, 그녀들도 똑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니 이게 맞는 선택인지도 모르겠군."
이 문제에 정답은 없다. 그저 누구를 상처입힐지의 양자택일만이 존재할 뿐. 그리고 나는 더 소중한 사람을 택했을 뿐이다. 부디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나는 전등을 끄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미 나는 과분할 정도로 많은 여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영주의 딸인 앨리스, 제국민들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성녀 마리안, 고귀한 황족의 핏줄을 물려받은 에디스까지. 당장 생각나는 여자들만 꼽아도 이 정도였다.
꽃과 같은 미녀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일개 포션가게 주인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일이었다. 그녀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나를 필요로 했고, 결과적으로 사랑을 나누게 됐다.
그렇다면 이미 나와 맺어진 그녀들과 세린이나 루카에게 차이가 있는걸까.
루카나 세린이 그녀들보다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미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놓고 이제와서 이러는 것도 우스운 일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방 구석에 비치되어있던 독한 술을 잔에 가득 따라 마셨다. 마나를 쓰지 않고 마셔대자 고작 두 병 정도 마셨을 뿐인데 벌써 술기운이 몰려왔다.
쉬지 않고 마셔댄 여파인지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간신히 정신을 잡고 침대까지 걸어가서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에 눕는 순간 흔들리던 시야가 완전히 암전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몰려오는 숙취에 헛구역질을 했다. 만찬장에서 맥주를 열 병이 넘게 마셔대고, 방에 와서는 안주도 없이 독한 술을 마셔댔으니 속이 멀쩡할리가 없다.
"후우..."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마나를 일으켰다. 술기운을 조금 몰아내자 그제서야 살 것 같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이미 일어나있던 아이린이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주인님?"
"그래. 몸은 괜찮니?"
어제 아이린은 난생 처음 술을 마시고 그대로 쓰러지듯이 잠들었다. 혹시나 속이 안 좋으면 적당히 마나를 주입해줄까 싶었다.
"네. 저보다 주인님은 괜찮으세요?"
아이린이 보기에도 내 안색이 안 좋은지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제 너무 과음하는 바람에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좀 있으면 괜찮아질거야."
사실 새벽에 완전히 기절해버리는 바람에 아직도 머리가 아팠지만 아이린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기는 싫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는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0.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독자 여러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랄게요!
1. 시험도 무사히 잘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원래는 지난주 주말에 복귀하려 했지만, 이번 편을 쓰면서 생각보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걸렸어요... ㅠㅠ.
2. 이번편과 다음편에서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어놔야 앞으로의 전개에도 문제가 없을 것 같아서 나름대로 신경을 쓰면서 적느라 시간이 걸렸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 모두 정말 감사드리고, 방학에는 힘을 써서 매일 연재를 해보겠습니다!!
3. 오타는 댓글로 알려주시면 바로 수정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4.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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