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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화 (237/260)

2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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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내가 먼저 돌아가고 세린은 잠시 뒤에 오기로 했다. 식당으로 돌아오니 루카가 어제 만찬회에서 받았던 선물들을 정리해서 상자에 담고 있었다.

"챙겨줘서 고마워. 네가 준 안경도 잘 쓸게."

"아니에요. 저희가 입은 은혜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요."

루카는 웃으면서 상자 안의 물건들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꼼꼼히 정리했다. 그렇게 얼추 정리가 끝날 때 쯤에 세린이 돌아왔다.

"벌써 돌아가시게요?"

"슬슬 가야지. 나도 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쉬겠지만 내일부터는 다시 영업을 해야한다. 이제 바스티안 영지에 남은 포션 가게는 우리뿐이니 하루라도 쉬면 모험가들의 원성이 쏟아질 것이다.

"그럼 다음에는 제가 가게에 놀러가도 되죠? 우린 '친구'잖아요."

일부러 '친구'라는 부분을 강조하는 세린의 말투에 이쪽을 노려보던 수인족들의 분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얼마든지. 차라도 대접할테니 편할 때 찾아와."

내 긍정적인 대답에 세린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무래도 며칠 안에 찾아올게 분명해 보였다.

그 후로는 루카가 챙겨준 박스를 품에 안았다. 어제 만찬회의 숙취로 아직 일어나지 못한 몇 명을 제외한 수인족들에게 배웅을 받으며 길드 하우스를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와서 선물받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가게 청소를 하자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청소를 끝내고, 오늘은 내가 먼저 씻기로 했다. 바지를 벗다가 주머니에 볼록 튀어나와있는 부분을 보고 손을 집어넣었다.

"아..."

주머니에 들어있던건 다름아닌 '아이린의 반지'가 담긴 함이었다. 어제 완성하고 타이밍을 봐서 선물하려 했는데,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오늘 밤에 주면 되겠네.'

아이린이 이걸 받고 내가 누구보다도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막상 반지를 준다고 생각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반지를 선물하는 것은 '프러포즈'나 다름 없었다.

여심을 장악할만한 말재주도 없고, 고백을 해본 경험도 없는 나였기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전에 결혼한 유부남 모험가들에게 이야기를 들은게 떠올랐다.

'다른건 몰라도, 프러포즈 할 때 만큼은 신중하게 하라고. 까딱했다간 평생 바가지 긁힐 수도 있으니 말이야.'

평생 함께할 상대에게 하는 고백인만큼 신중을 기해야만 했다.

결국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어떻게 프러포즈 해야할지 생각에 빠져 아이린이 말을 걸 때도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인님은 조금 이상하세요."

아이린은 걱정스레 내 이마에 손을 올리고 열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방금 전보다도 더 크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열은 없으신 것 같은데. 역시 어제 과음하신 것 때문에 피곤하세요?"

다행히 아이린은 내가 왜 이러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 그래. 아무래도 오늘은 피곤해서 쉬어야할 것 같구나."

평소에는 저녁 식사 후에 아이린에게 마법을 가르치거나 다과를 먹으며 티타임을 가졌지만 오늘은 더 이상 그녀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등 뒤에서 아이린이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는게 느껴졌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워 주머니에 있던 함을 꺼냈다.

함에 담긴 반지는 어둠 속에서도 찬란한 보랏빛 광택을 뿜어냈다.

아이린의 머리카락과 똑같은 색이었다. 그녀가 이 반지를 끼고 있으면 얼마나 잘 어울릴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꾸만 쓸데없는 직감이 나를 부추겼다.

지금 당장 아이린에게 반지를 선물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속삭였다.

입 닥쳐.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들고가서 무슨 말을 할지도 생각 안 했잖아. 반지만 주고 끝낼거야? 이런 건 좀 더 시간을 들여서... 신중하게...

다행히 이성이 직감의 부추김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직감이 작게 덧붙이는 말에 이성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오늘이 아니면 네가 반지를 줄 수 있는 날이 올 것 같아? 넌 스스로의 감정에도 솔직하지 못하잖아. 결국 계속해서 선물을 미룰테고, 그동안의 초조함은 모조리 아이린의 몫이겠지. 그냥 몸으로 부딪쳐. 그게 네 방식이었잖아.'

빌어먹을 새끼. 누가 내 직감 아니랄까봐 나 자신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선택을 결정하는데는 망설임이 길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타입이었다.

반지가 담긴 함을 손에 움켜쥐고 방을 나왔다. 호흡을 가다듬고는 아이린의 방을 두 번 노크했다.

"주인님?"

다행히 아직 잠들지 않았는지 방 안에서 아이린의 대답이 바로 들려왔다.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들어가도 될까?"

"자, 잠깐만요..."

아이린은 당황한 목소리로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잠시 후에 문을 열어준 아이린의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

흐트러진 이불과 베개.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아이린의 침대에 걸터앉자 그녀도 내 옆에 앉았다.

초조해보이는 아이린은 자꾸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혹시 아이린도 나처럼 긴장한건가? 왼손을 아이린의 어깨에 올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다리를 오므렸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반응에 나는 아이린도 나와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입을 여는데는 내 상상 이상으로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용기보다 더 많은 두려움과 기대감을 가슴에 품은 채 나는 준비해온 말을 뱉어내는데 성공했다.

"아이린. 너한테 선물하고 싶은게 있어."

"선물이요?"

갑작스런 선물에 아이린은 영문을 모르고 당황스러워 했지만 나는 꽉 쥐고 있던 오른손을 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작은 함을 보여주었다.

"직접 열어봐."

아이린은 조심스레 가느다란 손을 뻗어 함을 열었고, 그 내용물을 보고는 양 손을 모아 입을 가렸다.

혹시나 아무런 반응도 안 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보다.

"주인님...이건?"

"네가 지난번에 반지를 선물받고 싶다고 했잖아. 이걸 받고 내게 있어서 늘 네가 첫 번째라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해."

목걸이나 팔찌는 친한 사이라면 얼마든지 선물할 수 있지만 반지는 다르다. 오로지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을 위한 전유물이다.

내가 아이린에게 어떤 장신구를 선물받고 싶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반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었다. 단지 망설였을 뿐이지.

"미안해. 나는 이런 일에 서툴러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도 잘 몰라. 내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건 내가 널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고, 이 반지는 너만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는거야."

보석을 깎고, 마법을 새겨넣는 동안, 나는 아이린 생각을 했다.

아이린 생각만 했다. 보석의 요사한 보라빛을 볼 때마다 아이린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떠올렸고, 이 반지를 받고 기뻐할 아이린의 모습을 상상했다.

부디 아이린에게 내 마음이 닿았기를. 그렇게 기도하며 눈을 감았다.

"...주세요."

아이린의 작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아이린은 방금 전보다도 달아오른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며 억지로 입꼬리를 붙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무척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주인님이 직접 손가락에 끼워주세요."

아이린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왼손을 내밀었다. 투박하고 상처 투성이인 내 손과는 정반대로 새하얗고도 매끈했다.

왼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지탱하고, 오른손으로 함에 들어있던 반지를 들었다.

남은 문제는 하나 뿐이었다. 어느 손가락에 끼울 것이냐.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이린이 왼손을 내민 시점에서 내가 돌려줄 답 역시 정해졌다.

아이린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운 나는 천천히 반지를 밀어넣었다.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 딱 맞았다. 나는 잡고있던 아이린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보통은 결혼식을 올릴 때나 하는 행동이지만, 말재주가 없는 내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동 뿐이었다. 아이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약지에 끼워준 반지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반지는 평생 몸에서 떼어놓지 않을게요."

다행히 내 마음은 아이린에게 잘 전해졌다.

아이린은 얼마나 기뻤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면서도 환하게 웃어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홀린듯이 입을 맞췄고, 아이린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서로의 혀를 진득하게 탐하는 딥키스를 마치고 나는 아이린이 잠들 때까지 침대 옆에 앉아서 기다렸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진도를 빼고 싶지만, 저렇게 기뻐하는 아이린에게 그런 짓을 하기엔 양심이 켕겼다.

침대에 누운 아이린은 왼손을 들어 약지에 낀 반지를 쳐다봤다.

"일 년 전만 해도 내일 살아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노예에 불과했던 제가, 주인님 같은 분을 만나고 사귈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아요."

나는 아이린이 잠들 때까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날 밤은 고백을 성공했다는 기쁨과 흥분으로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부터 아이린과 나의 일상은 조금씩 달라졌다.

가장 먼저 아침에 일어나면 모닝 키스로 아침을 시작한다. 내가 먼저 일어날 때는 아이린을 깨우러가고, 아이린이 먼저 일어났을 때는 나를 깨우러온다.

아침에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로 잠을 깬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건지 깨달았다.

아이린은 더욱 거리낌없이 내게 스킨쉽을 했고, 자기 전에 진한 딥키스를 할 때는 내 손을 자신의 가슴으로 갖다댈 때도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해서 참아냈다. 고작 가슴 조금 만지는게 무슨 대수냐고, 닳는 것도 아니고 뭘 그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최대한 아이린을 소중하게 대해주고 싶었다.

키스를 넘어서 가슴을 만지고, 점점 그런 행위에 무감각해지면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어버릴까봐, 그걸 걱정하고 있었다.

이 뒤의 일은 아이린이 좀 더 성장한 뒤에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아이린의 몸은 소녀 티를 벗지 못했다.

그래도 앳된 얼굴과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가슴과 골반은 미래를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내가 손을 대지 않아 불만스러워 했지만 나는 모르는척했다.

아직 소녀같은 얼굴로도 아무렇지않게 요망한 짓을 해대는데, 여기서 야한 일을 본격적으로 하게되면 완전히 정기를 빨리게 될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즐거운 걱정이군.'

아이린 같은 미소녀를 안을 수 있다면 정기따윈 얼마든지 빨려도 좋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으아아... 분량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원래 이번편과 함께 올리려던 'side by 아이린'은 다다음편인 'side by 앨리스'와 함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 한동안 아이린의 관점에서 글을 안썼더니 꽤나 스토리가 밀려 있었네요. 다음 두 편은 외전격에 가까운 이야기니 가벼운 마음으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스토리를 되돌아보면서 설정 오류가 없게 하려다보니 분량도, 시간도 더 늘어나버리네요. ㅠㅠ.

3. 으으... 어서 한창 많이 쓸 때의 감각이 돌아와서, 글을 빠르게 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에는 한 편 쓰는데 네 시간도 넘게 들어서 정말 힘드네요.

4. 루디가 차려진 밥상을 먹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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