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 Side by 앨리스 -->
산처럼 쌓여있는 서류 더미를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이런 잡무는 원래 사람을 고용해서 시키는게 맞지만, 저희 집안에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누가 서류를 처리했던간에 '보고'를 받는 사람은 가문의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가주인 아버지는 잡무라면 진절머리를 내시며 도망가시니 제가 확인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바엔 차라리 제가 전부 하는게 나아요.'
저희 영지에는 가문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데릴사위를 데려오더라도, 실질적인 영지 업무는 제가 맡게 될겁니다. 그런데 사람을 고용해서 처리하면 어떤식으로든 소문이 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영애가 바스티안 영지를 통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소문이 퍼졌다간 주변 영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호시탐탐 저희 영지를 노리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젊은 영애가 영주 자리에 오르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겠지요.
여자 가주라는 것부터 전대미문의 일이긴 하지만요.
아버지는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만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을 찾지 않으면 저희 바스티안 가문은 정말로 대가 끊겨버릴지도 모릅니다.
이게 제가 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루디'
몇 년 전에 저희 영지에 내려온 남자입니다. 불치병으로 쓰러져 있던 저를 구해준 은인이기도 합니다. 뛰어난 연금술사인 것과 동시에 실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마법사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의 고유한 마나를 볼 수 있었던 저는 그를 마주하는 순간 저를 집어삼키는 듯한 마나의 파도를 느꼈습니다. 어릴 때부터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와 함께했기에 더욱 놀랐습니다.
그의 마나는 아버지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정순했으니까요.
처음 그를 알게 됐을 때, 이용할 수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저희 가문을 집어삼키려는 계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그의 존재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어느 파벌에도 가입하지 않은 능력있는 데릴사위로 그를 데려올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제가 원하는 모든 조건에 부합했습니다. 단지 제가 오판한게 있다면 그가 내 상상이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이겠죠.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하고는 며칠 뒤에 공작가의 치부를 기록한 장부를 들고오질 않나, 오우거를 맨손으로 때려잡질 않나. 제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습니다.
처음에는 대체 저런 사람이 왜 저희 영지같은 변방에서 머무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그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정보원을 풀어본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입수한 정보도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것들 뿐이었습니다.
수도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모험가 파티의 리더였다는 것, 적색 마탑과 청색 마탑의 마탑주들과도 친분이 있다는 것, 이름있는 귀족들이 그를 자신의 파벌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실패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나서야 저는 그가 왜 제안을 듣고 심드렁하게 반응했는지 깨달았습니다. 수도의 귀족들이 온갖 재화와 미녀들로 유혹해도 신경쓰지 않은 사람이, 고작해야 변방 영지의 영애 밑으로 들어갈리가 없지요.
물론 그를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실패했지만 협력을 구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제가 바라던 것과는 정반대의 처지가 되어버렸지만요. 본래는 그를 저희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여올 생각이었지만, 그의 기세에 휘말린 저는 그만 '제 모든 것'을 그에게 바치기로 해버렸습니다.
물론 그 일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때 루디 씨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저희 가문은 그레이스 공작가의 파벌에 합병되었을 겁니다. 이 근방의 영주들을 모두 부하로 삼은 그레이스 공작에게 있어서 저희 영지를 압박하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당장 상인들에게 저희 영지와의 거래를 끊으라고만 해도 저희는 완전히 고립되어 버립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상인들 덕분에 영지의 경제가 돌아간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처음에는 그냥 성격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는 제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저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받아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에게 조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제 몸을 애무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환각 마법을 걸고 알몸으로 거리를 개처럼 기어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런 짓을 당할때는 수치심 때문에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와 했던 계약 때문에 제게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많은 그의 조교에 제 몸은 착실하게 개발되었고, 지금은 하루에 두 번 씩은 자위를 하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음란해졌습니다.
엉덩이를 개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야외 플레이, 노출 플레이 등 그가 요구하는 온갖 성벽을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저도 즐겼으니 딱히 할 말도 없지만요.'
그의 요구가 선을 넘었다면 저는 그걸 지적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늘 나를 배려했습니다.
노출 플레이를 할 때도 다른 사람들에게 제 신분을 들키지 않게하고, 첫 경험을 할 때도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미약과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상냥한 주제에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서툴러서 오해를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몸이 안 좋을 때마다 무심하게 포션을 건네는 것을 보고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요즘에는 그를 만날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자리를 비웠던 아버지가 돌아오셨고, 며칠 전까지 성녀님과 황녀님이 함께 있었으니까요. 재주도 얼마나 좋은지 성녀님과 황녀님을 둘 다 취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미친게 아니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비즈니스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그와 맺어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능력은 부정할 수 없는 진짜배기고, 머리도 좋아서 저희 영지를 물려받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제가 이렇게 서류더미에 파묻혀서 지낼 필요도 없겠죠.
... 물론 몸 궁합도 더할나위 없이 좋구요.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 목숨을 빚지고, 도움을 받은 것도 모자라 그런 것까지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애초에 그가 명예나 자리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조금 조바심이 났습니다. 성녀님이나 황녀님 앞에서는 귀족이라는 제 유일한 장점도 의미가 퇴색되니까요. 제가 그분들보다 나은 점을 찾아보려 했지만 바로 떠오르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재화도, 명예도, 외모까지 어느 하나도 자신이 없어서 루디 씨를 찾아갈 용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정신적으로 힘들 때, 가장 먼저 루디 씨가 떠오르다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그에게 의지하게 된건지 모르겠네요.
그에게는 신비한 마력이 있어요. 마나를 말하는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 말이에요.
그는 평소에는 차가운척 하지만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무척 상냥해집니다. 저도 어느새 그런 그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친구라고 할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지내왔지만, 그와 함께 있으면 오랜 친구처럼 마음이 편해집니다.
가끔씩은 그의 가게에 찾아가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는게 제 몇 안되는 취미입니다.
결국 머릿속이 난잡해진 저는 쌓여있는 서류철을 두고 집무실을 나왔습니다. 제 방으로 돌아와서는 심호흡을 하며 마나를 갈무리 했습니다. 그에게 충고를 들었던대로, 스스로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도록 마법을 꾸준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르쳐준 원소 마법과 정령술을 꾸준히 연습한 덕분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건강해졌습니다. 몸 안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금방 지치는 체력을 보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마법을 연습하는 이유가 그 뿐만은 아닙니다. 루디 씨에게 어울리는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저도 그만한 능력을 갖춰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녀님과 황녀님이 계시니 제가 노릴 수 있는 것은 첩의 자리 정도겠지만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게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정실의 자리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루디 씨나 다른 여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은 제가 맡아서 해야만 합니다. 적어도 저는 사랑만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믿지는 않으니까요. 그의 곁에서 보조하며 살아가는게 목표입니다.
그러고보니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질 않네요.
병사들에게 그에 대한 보고를 간간이 듣기는 했지만 나이트 울프 소속의 길드원들과 숲으로 갔다는 짤막한 정보가 전부였습니다.
'정말이지 그에게는 하나부터 끝까지 빚을 지게 되네요.'
저희 영지의 전속 길드가 '던전 브레이크' 때 몰살당하고, 새로운 길드를 구해야 했을 때 유일하게 저희 영지와 계약을 맺어준 길드가 나이트 울프입니다.
처음에는 왜 A랭크 길드가 이런 변방에, 그것도 헐값에 가까운 가격에 계약을 해줬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이것도 분명 루디 씨 때문이라고요.
지난번에 나이트 울프의 길드 마스터가 루디 씨에 대해 물었을 때부터 직감했지만 새삼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그의 모습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입었던 은혜를 갚고 싶었습니다. 제가 병사와 기사들에게 그의 편의를 봐주고, 잘 챙겨주라고 한 것도 그런 의도에서 였습니다.
지금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 뿐이었으니까요.
지금은 아무런 힘도 없어서 말할 수 없지만, 제대로 빚을 모두 청산하고나면 정식으로 그에게 고백할 생각입니다. 지금처럼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제대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기대되네요.'
부디 그 고백의 대답을 들은 제가 웃고 있기를 바라며, 저는 열심히 마법을 연습하며 스스로를 단련했습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최근 제가 연재주기가 드물어졌다는 댓글이 보이고, 저도 확실히 그걸 실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하루에 서너 편씩도 적었었는데, 요즘에는 사나흘에 한 편도 간신히 쓰는 저를 보면 너무 게을러진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실망하신 독자분께는 죄송합니다. 그래도 최대한 자주 연재하는 것을 목표로 노력할테니 지켜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side by 앨리스 편을 적었던 이유는 일종의 복기입니다. 이때까지 등장했던 히로인들 중에서도 초반부부터 나왔던 히로인의 행적을 되돌아보는 편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3. 다음화부터는 정상적인 스토리로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이틀에 한 편 이상 업로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꾸벅)
4.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