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 Ch 48 -정수- -->
나이트 울프 길드에서의 만찬회가 끝나고, 며칠 동안은 별 일 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나는 아이린과 함께 책을 읽으며 마법에 대해 연구했다.
아이린이 책을 읽다가 궁금한게 있으면 내게 물어봤다. 우리는 둘 다 마법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요즘 들어서 일취월장한 아이린의 마법 실력에 나조차도 감탄이 절로나왔다. 당장 베테랑 모험가들 사이에 던져놔도 마법사로서 제 몫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그렇게 그 날도 평소처럼 아이린은 마법서적을, 나는 만찬회에서 선물받았던 고대인의 기록을 연구하는 중이었다.
루카가 선물한 안경을 끼고 책을 읽자 새겨져 있는 수많은 문자들이 재배열되어 머릿속에 정리됐다.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몰라도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꿈의 아티팩트나 다름없었다. 복잡한 고대어조차 순식간에 해석해서 넘길 수 있었기에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마나에 대한 탐구를 기록한 고대 서적은 현대의 마법사들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마법은 자연의 것이며, 우리가 섭취한 자연의 생물들이 머금은 마나를 흡수하는 것으로 체내의 마나를 증가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분명 마나를 머금은 약초를 사용해서 만든 포션을 마셔서 마나를 회복할 수 있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할 가치가 있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고 책에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도 기록해놓았다. 임프, 서큐버스, 리치 등 이제는 명맥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소수 마족들의 특징도 꽤나 잘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관심있는 것은 '드래곤'에 대해서였다. 이제는 멸종했다고 알려진 환상의 종족. 한 때 시대를 주름잡았던 종족인 드래곤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드래곤에 관한 것들 중에서도 그들의 '용언'이라는 부분에 나는 집중했다.
용언은 강력한 개념마법이었다.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드래곤들이었기에 '말을 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개념의 마법. 그야말로 압도적인 강자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마법이라 할 수 있다.
마나가 적거나 없는 사람은 용언 앞에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이 노출된다.
그런 용언의 열화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언령'이다. 나이트 울프의 길드 마스터인 데린이 사용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는 용언은커녕 언령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조차 드물었기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전에 연구를 해놓고 싶었다.
루카의 말에 의하면 데린 역시 자신이 말을 할 때마다 언령이 발동되는 것 때문에 불편을 겪고 있다고 했으니, 몸 밖으로 흘러나오는 마나를 억제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할 일이 없어서 지루하던 참에 꽤나 재밌는 연구가 될 것 같았다.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소나기에 낮에 드문드문 찾아오던 손님들도 더 이상 오지않았다.
그렇게 아이린과 함께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책을 읽던 도중, 빗줄기를 뚫고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 씩이나.
"흐아. 죽는 줄 알았네. 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
비에 쫄딱 젖은 생쥐꼴이 되어서는 투덜대는 제시카의 셔츠 너머로 검은 속옷이 비쳤다. 성격은 어린애 같으면서 속옷은 꽤나 어른스러운걸 입는구만.
"......"
반면 붉은 로브를 입고있던 안젤리카는 아무 말 없이 가게 앞에서 젖은 머리의 빗물을 털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제시카가 아무 생각없이 빗물을 줄줄 흘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오려하는 것을 뒤에서 잡아당겼다.
이 자매가 소나기를 뚫고 나를 찾아올 일이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우선은 두 사람을 가게 안으로 들여야겠지.
"그냥 들어오십시오. 빗 속에 오래 있으면 감기 걸립니다."
몸이 자산인 모험가에게 있어서는 피해야할 일이었다. 안젤리카는 잠시 망설였지만, 신나서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제시카를 따라왔다.
손가락을 튕겨, 허공에 나타난 불길이 순식간에 그녀들의 옷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바닥에 닿기 전에 가볍게 증발시켰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십시오."
욕실에 가서 수건을 두 개 챙겨와서는 각각 그녀들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두 자매는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내가 만든 화염구에 차가운 몸을 녹였다. 나는 그동안 방으로 돌아가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다. 그녀들에게는 조금 크겠지만 아이린의 옷을 입히기에는 두 사람의 몸매가 너무 좋았다.
아이린은 불청객의 방문에도 웃으면서 차를 내오러 부엌으로 갔다. 확실히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다른 여자들이 오면 경계했을텐데, 아무래도 내 고백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 몸부터 녹이십시오."
비를 맞으면서까지 찾아온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용건을 따질만큼 야박하진 않았다. 다행히 제시카와 안젤리카는 금세 평정심을 찾았고, 아이린이 준비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하아... 이제 좀 살겠네요. 오는 길에 갑자기 소내기가 내리는 바람에..."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손님이 가게에 찾아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두 사람은 다른 목적으로 내 가게를 찾아온 것처럼 보였다.
"제게 다른 볼 일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어라. 어떻게 아셨어요?"
제시카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반면 안젤리카는 살짝 동요한 것이 전부였다.
"아까 '오는 길에' 소나기가 내렸다고 하셨죠. 평소처럼 포션을 사러 올 것이었다면 모험을 가는 아침이나 저녁에 오셔도 상관 없었을 겁니다. 다른 볼 일을 보는김에 오는 것도 아니고, 여관에서 꽤나 떨어진 저희 가게를 찾아올만한 다른 이유가 있었겠죠."
"그냥 저희가 루디 씨의 가게에 놀러왔을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간만에 우리 가게에 와서 차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 놀러오는길에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을 수도 있다.
"신발을 보고 알았습니다."
"신발이요?"
"제시카 씨의 신발에는 진흙이 잔뜩 붙어있죠. 저건 신발 바닥에 붙은 흙이 물웅덩이를 밟으면서 생긴 겁니다. 하지만 여관에서 저희 가게까지 오는 길은 도로가 정비되어 있으니 흙이 묻을 일이 없습니다. 그 말은 두 사람이 오늘 모험을 나갔다가 돌아왔고, 신발의 흙을 털어낼 틈도 없이 옷만 갈아입고 뛰어왔다는 뜻이겠지요."
나를 보는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뭘 놀라는지. 이 정도는 관찰력이 조금만 있으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제 무력이 필요할 정도로 급한 일이었다면 제시카 씨도 갑옷을 입고 오셨겠죠. 하지만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왔다는 것은 무력이 필요없다는 뜻. 그렇다면 아마 제 마법 실력이나 지식을 필요로 해서 오신게 아닙니까?"
그렇게 덧붙이며 찻잔을 들었다. 다른 근거들이라면 얼마든지 더 말해줄 수 있지만 그보다는 그녀들이 찾아온 이유를 듣고 싶었다.
"루디 씨의 말씀대로에요. 저희가 찾아온 건 이것 때문이랍니다."
제시카는 품 안에서 보랏빛 구슬을 꺼냈다. 구슬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마력에 아이린과 내가 동시에 반응했다.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명백히 이질적이었다.
잡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지독한 악의에 바로 구슬의 정체를 깨달았다.
'마족의 정수.'
평범한 몬스터들의 심장 아래에 마나를 머금은 '마석'이 박혀있다면 마족은 그들의 '마력'이 뭉쳐있는 정수를 가지게 된다. 물론 모든 마족이 정수를 가지는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마력을 축적해온 마족만이 정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족의 정수는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흑마법사들의 마법 촉매로 사용할 수도 있고, 정수에 담긴 마력을 정화하고 섭취하면 마나량을 대폭 늘려주는 영약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부르는게 값인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런 물건은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저희가 오늘 숲을 탐험하던 도중 발견한 동굴 깊은 곳에 있었어요."
원래는 볼품없는 나무 상자 안에 담겨있길래 별 가치없는 물건인 줄 알았는데, 안젤리카는 강렬한 마력을 느끼고 모험가 길드에 들고갔다.
하지만 모험가 길드의 직원도 이 물건의 정체를 알아내진 못했고, 결국 마법에 대해 박식한 내게 들고왔다는 말이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바스티안 영지에 마탑이나 연금술사 길드가 없는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들에게 이걸 들고갔다간 값을 후려칠게 뻔히 보였으니까.
어수룩한 모험가를 등쳐먹는 것 하나만큼은 잘하는 놈들이었다.
'나도 예전에는 많이 당했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지난번처럼 이걸 마나 포션으로 만들수도 있고, 마법 연구의 촉매로 사용할 수도 있겠지. 돈이 급하다면 공작가에 있는 연금술사 길드에 가서 제 값을 받고 팔아치울 수도 있다.
정수 안에 내재된 마력을 감안했을 때, 적어도 일 년은 여유롭게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을 받을 수 있을터였다.
내 말을 듣고있던 안젤리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고, 제시카는 언니의 결정을 기다렸다. 아이린은 그동안 마족의 정수를 들여다보며 구경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마족의 힘이 담긴 정수를 보고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루디 씨가 아니었으면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지도 몰랐을거에요. 몇 번이나 루디 씨에게 빚을 졌으니 저 정수는 선물로 받아주시겠어요?"
마족의 정수를 양도하겠다는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방금 전에 내 설명을 듣고도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단순한 호의로는 불가능했다.
안젤리카 그녀도 마법사인 이상 이게 얼마나 연구가치가 있는 물건인지는 깨달았을테니까.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다른 곳에 팔면 당분간은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이 생길텐데요?"
두 자매가 최근 들어 모험가로서의 발전 속도가 엄청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베테랑 모험가들에 비빌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역할이 정해진 네 명 이상의 파티를 꾸려서 탐험하는 이들에 비하면 고작 두 명으로는 실적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겨울이 다가오는 지금, 그녀들에게 여윳돈은 어느 때보다 절실할 터였다.
"괜찮아요. 겨울을 날 수 있을 정도의 돈은 있고, 저희가 모험을 하는 이유는 돈 뿐만이 아니니까요."
안젤리카의 똑부러진 대답에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다.
그녀가 한 번 내린 결정을 번복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족의 정수를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두 분의 선물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받는 것만으로는 제 체면이 서질 않으니 작은 답례를 하도록하죠."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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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분간 업로드 시간이 불규칙해질 수 있습니다!저녁 시간대나 밤 시간대, 둘 중 하나에 올라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틀에 한 편, 혹은 매일 연재를 위해 열심히 쓸 생각입니다!
2. 오타나 오류는 댓글로 알려주시면 최대한 빠르게 수정하겠습니다.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저녁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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