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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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두 자매가 마음에 들었다.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말이다.
조금 바보같지만 솔직하게 호감을 표시하며 언니를 자신의 목숨을 걸 정도로 소중히 여기는 제시카, 그런 동생을 챙기면서도 은혜를 잊지않는 안젤리카.
모험가들 중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인성이 바른 그녀들이었다. 가게에 놀러올 때마다 내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것은 나로서도 환영할 일이었다.
하루종일 가게 안에 있으면 지루하기 짝이 없어서 가끔씩은 모험가로 활동하던 때가 그립기도 하니 말이다. 괜히 사람들이 모험가들이 잔뜩 부풀린 영웅담을 좋아하는게 아니었다. 그런식으로라도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어서겠지.
그런 그녀들에게 가벼운 답례를 하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호의를 베푸는 상대에게는 몇 배로 되돌려주자는 주의였다.
"잠시 창고에 갔다 올테니 쉬고 계십시오."
마족의 정수를 선물로 받은 것에 대한 답례를 하겠다고하자 안젤리카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나는 내 마음에 든 상대에게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린과 정식으로 '사귀게' 된 후로는 마음에 여유가 흘러넘쳤다. 나답지 않게 평소보다 마음이 붕 떠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낮이었지만 비를 머금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는 바람에 창고는 어두컴컴했다.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등불에 불이 들어왔다. 밝아진 창고에는 여러 물건이 난잡하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만들다 만든 포션이 담긴 병, 지난번에 가공하다가 실패한 보석의 파편 등이 발에 채였다.
조만간 창고도 한 번 정리를 해야겠군.
내가 향한 곳은 평소에는 잘 찾지 않는 구석의 철제 상자들이었다. 사람이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상자를 열자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을 저어 먼지를 날려보냈다. 얼마나 오랫동안 열지 않았는지 상자 안에는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이대로는 주기 힘들겠군. 적어도 제대로 날을 닦고나서 줘야할 것 같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들은 다름아닌 예전에 내가 사용했던 무기들이었다. 장검, 단검, 도끼, 방패 등 무기를 가리지 않고 사용했던 나였기에 우연히 전리품으로 괜찮은 무구를 획득하면 팔지않고 모아뒀다.
오랫동안 사용하지않아 녹이라도 슬었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히 마법으로 제련한 덕분인지 대부분의 무구들은 멀쩡해 보였다. 아다만티움이 일부 함유된 롱소드와 미스릴로 검면을 제련한 아밍소드를 양 손에 들고 잠시 고민하다 아밍소드를 챙겼다.
얼핏 보기에는 두 검은 별반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롱소드는 양 손으로 휘둘러야하는 것에 비해 아밍 소드는 한손검이기 때문에 방패를 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제시카와 안젤리카는 둘이서 다니는만큼, 검과 방패를 함께 사용하는게 더 좋겠지.'
전위를 맡는 전사와 몬스터를 공격하는 검사가 분리된 파티가 아니라면 당연히 방패를 함께 사용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방패는 고블린의 돌팔매질이나 오크의 나무 창을 막아낼 때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아밍 소드와 제시카의 체격에 맞는 방패를 하나 챙겼다. 이 방패는 예전에 한 용병단의 남자를 구해주고 보답으로 받은 것이었다. 자기가 줄 수 있는게 이것밖에 없다고, 자기 목숨과도 같은 물건이니 소중하게 다뤄달라는 말과 함께 받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들은 하나같이 사연있는 무기들이었다. 전쟁터에서, 혹은 몬스터들의 부락에 있던 것을 약탈해왔다. 그 무기들의 주인이 지금 어떻게 됐을지는 아마 신만이 알고 있겠지.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청소 마법으로 아밍 소드와 방패에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
제시카에게 줄 무구는 저걸로 됐고, 이제는 안젤리카의 몫을 고를 차례였다.
물론 그녀에게 줄 것은 미리 점찍어놓은게 하나 있었다. 옆에 있는 다른 철제 상자를 열자 이번에는 지팡이나 검집과 같은 보조 무기들이 보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낯익은 지팡이를 하나 집어들었다.
다른 나무 지팡이들과 다르게 푸른 빛을 띄는 그 지팡이는 놀랍게도 거대한 마석을 통째로 깎아내서 만든 마도구였다. 내가 모험가로 한창 활동할 때 사용하던 지팡이기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지만.'
지팡이에 의존해서 마법을 제어하던 때는 옛날 옛적에 지났다. 이제는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게 맞겠지. 지팡이의 막대한 마력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르지만, 안젤리카라면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법이라는 폐쇄적인 학문에서 독학으로 성공하는 것은 그야말로 천재만이 가능한 묘기다. 그런 의미에서 스승 하나 없이 이만한 실력을 갖춘 안젤리카는 분명 신의 축복을 받은 것과 다름 없는 재능을 가졌다.
마법사가 귀한 대접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오로지 재능이 전부니까. 마법사에 적합한 육체를 타고났어도 술식을 암기하고 순식간에 발동시킬 수 있는 명석한 두뇌가 없다면 마법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마법사들은 스승이 하나를 가르칠 때 그 반의 반만 이해해도 수재 소리를 듣는다.
몸의 적성 뿐만 아니라 머리까지 타고나야한다. 그야말로 신에게 선택받은 자만이 마법사가 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도 이만큼 성장한 안젤리카를 잘 챙겨주고 싶었다.
다른 마법사를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녀는 꼭 가까운 '후배'처럼 느껴졌다.
내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예전의 내 모습을 보고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밍소드와 방패 그리고 지팡이를 깨끗하게 닦고는 그것들을 챙겨서 나왔다. 아이린은 자매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짓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내 양손에 들린 무구를 본 제시카의 얼굴이 화색을 띄었다.
제시카는 꽤나 멋진 용병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방패를 보고는 감탄을 터뜨렸다. 강철로 만들어진 방패는 몇 년이 지났는데도 번쩍거리며 튼튼함을 과시했다.
"멋진 방패와 검이네요. 설마 이것들이 답례에요?"
"...너무 과한거 아닌가요?"
안젤리카 역시 한 손에 들린 지팡이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녀도 이 지팡이가 어떤 것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단지 그 가치를 알고 있기에 받기를 망설였다.
"어차피 제게는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들입니다. 부담갖지 말고 가져가십시오."
그 무구의 주인들도 능력있는 모험가들이 사용해주기를 바랄 것이다. 무기가 와인도 아니고, 창고에서 썩어가는 것보다는 계속 사용하는 사람에게 주는게 맞다.
"마침 저도 연구하고 싶은게 있었는데, 마족의 정수라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연구에 도움이 되는 이런 고급 재료는 언제나 양팔 벌려 환영이었다.
제시카는 신이나서 내가 준 검과 방패를 양 손에 쥐어보고는 만족스러워했고, 안젤리카 역시 평소에 쓰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지팡이의 마력에 집중하고 있었다.
"두 분 다 만족스러워 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검도 손에 착 감기고, 방패도 가벼워서 실전에서 무리 없이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스타일을 고려해서 고른 무구였으니 당연한 말이다.
"저도 좋긴 하지만... 정말로 이런걸 받아도 괜찮나요?"
여전히 부담감을 가진 안젤리카에게 미소를 지으며 긍정했다.
"저 녀석들도 자기들을 써 주기를 바랄겁니다. 정 부담스러우시면 유망한 모험가들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해두시죠."
안젤리카와 제시카는 어떤식으로든 이름을 날리게 될 것이다. 제시카도 언니의 압도적인 재능에 가려져서 그렇지, 여자 모험가 치고는 성격 좋고, 멘탈 좋고, 실력도 좋은 편이었다.
이런 성격이 모험가를 오래 할 수 있지. 특출난 점은 없어도, 꾸준히 열심히 노력한다는 점에서 다른 양아치들에 비해 훨씬 나았다.
그렇게 모두가 만족스러운 거래가 끝났다. 안젤리카는 가게에서 떠날 때까지 내가 준 지팡이를 꽉 쥐고 있었다. 나름 오 년 가까이 사용했던 장비라 나름 정이 들었었는데, 좋은 주인을 찾아가서 다행이다.
그렇게 두 자매는 비가 그칠 때까지 차와 다과를 대접받으며 푹 쉬었다가 돌아갔다. 아이린과 함께 즐겁게 담소를 나누던 나 역시 슬쩍 그녀들에게 궁금했던 것을 한 가지 물어보았다.
"그럼 다음에 또 올게요~. 오늘 받은 장비도 잘 쓸게요!"
"...감사합니다. 주신 지팡이, 소중하게 다룰게요."
어느새 그친 소나기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돌아갔다.
겨울이 되면 모험가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쉬는 동안 더 강해지기 위해서 훈련을 하는 부류와, 이때까지 열심히 했던 것에 대한 보상 심리가 들었는지 죽어라 노는 부류. 괜히 겨울에 모험가들이 많이 굶어죽는게 아니다.
도박, 창관에서 살다시피하다 돈을 탕진한 모험가들이 겨울 산을 서성이다 시체가 되서 돌아오는건 드문 이야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안젤리카라면 이번 겨울 동안 내가 준 지팡이로 한 차례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럼...슬슬 나도 할 일을 해볼까."
두 사람이 돌아가고 빈 자리의 찻잔과 접시를 치우며 중얼거렸다. 사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마족의 정수가, 최소 중급 마족의 것으로 보이는 막강한 마족의 정수가 대체 왜 바스티안 영지에서 발견된걸까. 그런 정수가 던전도 아니고, 그냥 동굴의 상자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는 건 명백히 부자연스럽다.
제시카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우연을 잘 믿지 않는 주의라서.
방금 전 그녀들과 대화를 하면서 물어본 것 역시 이 정수를 발견한 동굴의 위치였다.
혹시나 영지에 위협이 되는 녀석이라면 일찌감찌 처리하는 편이 좋을테니 말이다. 평소에 입던 외투를 걸치고 아이린을 불렀다.
"함께 산책하러 가지 않겠니?"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원래 어제 저녁에 올리려 했는데, 간만에 영화보고 오느라 쪼끔 늦었습니다! 그래도 8분 밖에 안 늦었으니 한 번만 봐주세요!
2. 오랜만에 등장한 모험가 자매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성격이 비슷한 쌍둥이 자매쪽도 좋아하지만, 그건 또 다른 작품에서 다뤄볼 기회가 있겠지요!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에는 글 쓰는 속도가 빨라져서 막힘없이 쓸 수 있어서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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