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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화 (244/260)

2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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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그치고 거리는 건물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어수선했다.

"갑자기 무슨 소나기람. 하여튼 이놈의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니까."

"천막에 뒀던 내 물건 다 젖은건 아니겠지?"

"그래도 소나기라 다행이지. 겨울에 비가 오면 온 몸이 쑤시더라."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아이린과 손을 잡고 거리를 걷자 남자들이 힐끔거렸다. 요즘 들어서 색기까지 흘리는 아이린은 어엿한 숙녀가 다 됐다.

시골 영지의 처녀들이 주근깨나 여드름으로 고생할 때, 아이린은 백옥같은 피부에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그녀에게 남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나같이 부럽다는 듯이 나를 지켜보는 눈길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왜 그러세요. 주인님?"

"아이린 네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해서 그래."

내 말뜻을 이해한 아이린은 미소를 지으며 맞잡은 내 손을 자신의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전보다 굴곡이 생긴 계곡 사이에 내 팔을 끼웠다. 앨리스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커진 가슴이 물컹하고 기분좋게 내 팔을 감쌌다.

'요즘 들어서는 색기도 생겨서,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게 힘들단 말이지.'

어디서 저런걸 배워왔는지는 몰라도, 남심을 흔드는 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가장해서 걷고 있는데,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사람이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루디 씨. 아이린 양도 함께 어딜 가시는건가요?"

"손님도 없고해서 잠시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왔습니다. 그러는 아르웬 씨는 어디를 가는 길이십니까?"

"이번 가을 곡식 수확량을 확인하고 세금 할당량을 매겨야하거든요. 그래서 외근이랍니다."

슬슬 수확이 끝나고 세금을 걷을 때니 시청에서 근무하는 아르웬이 가장 바쁠 터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결산까지 생각하면 당분간은 눈코뜰새 없이 바쁘겠지.

"고생이 많으시군요."

"이게 제 일이니까요. 그래도 올해는 루디 씨 덕분에 한숨 돌렸답니다."

"저 덕분에요?"

딱히 아르웬에게 도움을 준 적은 없는데. 곰곰히 생각해봤지만 아르웬에게 포션을 저렴하게 계약했줬던 것을 제외하고는 떠오르는게 없었다.

"네. 루디 씨 덕분에 올해는 세금에 대한 부담을 한결 덜었지 뭐에요. 작년까지 있었던 다른 포션가게들은 하나같이 재료도 불확실하고, 장부도 공개하지를 않아서 세금을 매기는데 애먹었지만, 루디 씨는 성실하게 납부 해주셨잖아요."

하긴. 아르웬 앞에서 말하기는 뭣하지만 그들뿐만 아니라 영지내 점주들의 대부분은 탈세를 한다. 특히 식당이나 노점상은 일일이 품목을 장부에 남기지 않으니 세금을 매기는게 더욱 까다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다들 알게모르게 세금을 적게 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작년에는 농사도 흉작이어서 터무니 없이 세금이 적게 걷어졌다고 완전 혼났는걸요."

아무래도 내가 낸 세금 덕분에 올해는 꾸중을 면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바스티안 영지의 경제는 모험가들 덕분에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나는 모험가들에게 필요한 포션을 독점으로 판매한다. 아마 나는 바스티안 영지에서 가장 잘 버는 가게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당연히 내가 내는 세금도 어지간한 상단의 세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 별의별 수작을 부리겠지만, 돈에 미련이 없는 나는 번 돈의 삼 할을 망설임없이 세금으로 냈다.

"나중에 시간이 나시면 가게에 한 번 찾아와주십시오. 좋은 차를 준비해놓겠습니다."

"어머. 기대할게요. 그럼 다음에 봬요. 아이린 양도 다음에 또 봐요."

아르웬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는 펜을 끼운 장부를 안고 걸어갔다. 그녀는 딱히 아이린과 내 관계를 신경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우리 둘이 사귄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겠지.'

아이린을 처음 데리고 왔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만큼 그런 생각을 할 확률은 희박했다. 덕분에 이렇게 붙어서 다녀도 사이좋은 친척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동쪽 성문에 도착할 때 즈음에는 가자 이제 막 상단의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서 마차를 검사하는 병사들이었다. 가까이 가자 몇 번이나 안면이 있는 병사가 인사를 했다.

"루디 씨 아니십니까? 이곳은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지난번에 병사들이 다쳤을 때, 무상으로 포션을 베풀었던게 효과가 있는지 그는 내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잠시 성 밖에 볼 일이 있는데, 나갈 수 있을까요?"

"나갈 수는 있지만... 곧 날이 저물어서 위험하실 겁니다. 급한 용건이십니까?"

"네. 오늘 중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서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 귀에다 속삭였다.

"원래는 이러면 안되지만... 오늘 밤에 보초를 서는 녀석들에게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나중에 성벽 밑에서 불을 피우시면 녀석들이 알아보고 문을 열어드릴겁니다."

나는 그런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 혼자서 나갔다면 몰래 성벽을 뛰어넘으면 되지만, 아이린도 함께 나가는 이상 절차를 지켜야만 했다.

성 밖으로 나오자 곧 겨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순식간에 해가 저물었다. 늦은 밤에 숲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지만, 나는 마법으로 빛을 비추며 숲을 가로질렀다.

안젤리카가 종이에 간단하게 그려준 약도를 따라 십 분 정도 걷다보니 동굴로 이어지는 길이 나왔다.

보통 동굴 주변에는 오크나 고블린 같은 몬스터들이 부락을 짓고 살기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이 동굴 주변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안쪽을 탐색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 손가락을 튕기자 생겨난 하얀 구체가 앞장서며 길을 밝혔다. 동굴의 벽면이 점점 거칠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동굴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텅 빈 동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허름한 나무 상자 하나 뿐이었다. 안젤리카와 제시카가 말했던 정수가 담긴 상자가 이거겠지.

반쯤 열려있는 상자에서는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껍데기뿐인 상자를 걷어차서 치우고는 상자가 있던 곳 주변을 살폈다.

조금 뒤쪽에 땅이 파여있는 것을 보고는 마법을 사용해서 땅을 파냈다. 흙이 갈라지며 묻혀있던 뼈의 잔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꽤나 악랄한 짓을 해놨군.

묻혀있던 뼈는 인간의 것이었다. 손상된 정도를 봤을 때 오십 년도 넘어보였다. 수십 년 전에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아이린은 산더미처럼 쌓인 뼈 무덤을 보고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뺨을 양 손으로 가볍게 문질러주면서 토닥였다.

"괜찮아."

잠시 후 진정이 됐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인 아이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제서야 평소처럼 돌아온 아이린은 곁에서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구덩이에 파묻힌 뼈들을 얼추 걷어내자 비로소 그 밑에 깔려있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수십 년 동안 흙 속에 파묻혀서 너덜너덜하게 삭은 서적들이었다. 그중 한 권을 집어들었다.

책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어내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시꺼먼 표지를 넘겼다.

지금의 제국어와는 조금 달랐지만 내용을 읽을 수는 있었다. 책에는 '악마' '흑마법' '마족'이라는 세 단어가 반복해서 나왔다.

책장을 넘기자 악마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내용과, 그를 소환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적혀 있었다.

수십년 전에는 한창 전염병이 발발해서 흑마법사들이 날뛸 때가 있었다고 들었다. 그때 병으로 죽어나간 환자들을 데리고 악마를 소환하겠다고 날뛰는 광신도 집단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말이다.

"이놈들이 그 녀석들인가?"

스승님에게 들었을 때는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들었는데, 이걸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수십 년 전에는 별의별 미친놈들이 다 있었군.

다른 책을 들고 읽어봤지만 내용은 거의 다 비슷했다. 증거도 없고, 막연한 추측만 늘어놓은 주제에 병에 걸린 환자들을 납치해서 제물로 삼았다.

이 놈들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탈을 쓴 짐승새끼들일 뿐.

어쩐지 마족의 정수라고 해도 너무 지독한 악의가 베어있다 싶었는데, 이제보니 그럴 수 밖에 업었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을 제물로 삼았으니 처절할 정도로 악의가 느껴질 수 밖에.

남아있는 서적들과 뼈무덤, 그리고 내가 받은 마족의 정수를 종합해보면 결과는 금세 나왔다.

수십 년 전 이곳에서 흑마법사들이 악마를 부활시키려는 의식을 치렀고, 마족의 정수와 전염병 환자들을 제물로 삼았겠지.

옆의 벽면을 구체로 비추니 발톱을 크게 휘두른 듯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아마 의식이 불완전했거나, 자신들이 제어할 수 없는 존재가 튀어나왔고, 결국 흑마법사들까지 떼몰살을 당한 것으로 추측됐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바스티안 영지에 그런 악마가 나타났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 힘을 잃고 소멸했거나 마계로 돌아갔지 않을까 싶다.

흑마법사의 마법과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의 영혼이 담긴 정수를 남기고 말이다.

옆에 쌓아뒀던 뼈무덤을 다시 땅에 파묻었다.

흑마법사 놈들의 뒤처리를 하기는 싫었지만, 제물로 끌려온 환자들의 뼈가 섞여있을지도 모르니 간단하게나마 무덤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아이린. 밖에 나가서 나무 판자 하나 주워오겠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에 그녀에게는 간단한 심부름을 시켰다. 처음 왔을 때처럼 땅을 완전히 파묻고는, 그 위를 흙으로 덮어서 작은 봉분을 하나 만들었다.

신이나 사후세계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이 좋은 곳으로 갔기를 빌어주었다. 아이린이 들고온 평평한 나무 판자를 무덤 위에 꽂아놓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적어도 흑마법사들이 불러냈던 악마가 다시 돌아올 일은 없어보이고, 바스티안 영지에 피해를 끼칠 일도 없겠지. 그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여기까지 온 보람은 충분했다.

========== 작품 후기 ==========

분량 조절 실패 때문에 오늘 저녁에 다음편이 바로 올라옵니다... ㅠ.

1. 조금 읽다가 끊어지는 느낌이 드실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다음편을 업로드하는걸로 하겠습니다.

2. 오타나 오류는 댓글로 남겨주시면 최대한 빠르게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번 설을 기점으로 소설에 투자하는 시간을 늘릴 생각입니다.

3. 다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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