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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화 (245/260)

2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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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길에 동굴은 입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혹시나 다른 모험가들이 내가 만든 무덤을 찾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볼 일은 모두 끝났지만, 돌아가기 전에 잠시 쉬기로 했다.

오는 동안 꽤나 오래 걷기도 했고, 맑은 밤하늘에 떠오른 별이라도 구경하기로 했다.

바닥에 떨어진 나무의 잔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다. 장작으로는 흑마법사들의 책을 썼다. 마지막 책까지 불길 속에 집어 던진 다음 아이린과 함께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주인님. 하늘에 별이 너무 예뻐요."

밖에서 아이린과 별을 구경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끔씩은 이런것도 나쁘지 않아. 어차피 남아도는게 시간인데, 느긋하게 즐겨도 되겠지.

아이린과 함께 아름다운 별무리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쳐다보는 시간은 방금 전에 가라앉았던 내 기분을 끌어올려주었다.

모험가로 활동 할 때 별을 봤던건, 야간 행군을 할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일 뿐이었는데, 그 때를 떠올려보면 지금의 내가 얼마나 여유로워졌는지 실감됐다.

아이린은 호기심을 보이며 하늘에 보이는 별자리들에 대해 물었고, 나는 내 지식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알려줬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별자리와 관련된 신화를 들려주니 더 좋아했다.

그렇게 달이 중천에 뜰 때 즈음, 나는 모닥불의 불씨를 꺼뜨리고는 발로 밟아서 재를 흐트러뜨렸다. 깊은 밤의 숲속은 상상 이상으로 고요했다.

아이린은 조금 더 별을 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이만 돌아가지 않으면 경비병들이 걱정할지도 모른다.

"나중에 또 보러 올테니 너무 아쉬워하지마렴."

나는 평온함을 찾아서 내려온 것이지, 돈을 벌려고 바스티안 영지에 내려온게 아니었다. 아이린이 즐거워한다면 그걸 위해 시간을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다행히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이린도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영지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도 아이린에게 예전 모험가로 활동할 때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린은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경청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성벽 아래에 도착했고, 작은 성냥에 불을 붙여 챙겨온 잔가지에 불을 옮겼다.

성벽 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금세 문을 열어주었다.

"아까 이야기는 전해들었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나와 아이린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미 깊은 밤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대로 아이린과 함께 돌아와서는 몸을 씻었다.

아이린도 내색은 안했지만 꽤나 피곤했는지 씻고나서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자렴."

"안녕히 주무세요... 주인님..."

잠이 적은 아이린이 저렇게 졸린 모습은 처음봤지만, 이미 새벽이 깊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이린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걸 확인하고는 따로 상자에 넣어뒀던 마족의 정수를 꺼냈다.

잡는 것만으로도 스산한 마력이 손을 타고 흘렀다. 이 마력의 근원을 알고나자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졌지만, 뛰어난 소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대로 사용하는건 힘들겠지만, 쓸모는 많아.'

억울한 희생자들의 영혼이 들어간만큼, 악의를 정화해야겠지만 이 정수에는 그런 수고를 들일 가치가 충분했다.

'오히려 마족들 입장에서는 이 상태를 더 좋아하겠지만.'

마족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절규와 악의를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그들에게 훌륭한 식량이 되어준다. 심지어 마족들은 서로의 심장과 마석을 취할수록 더욱 강해지기 때문에 이런 정수를 본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게 틀림없다.

괜한 파리가 꼬일 수도 있으니 당분간은 조심해서 관리해야겠군. 혹시나 눈썰미 좋은 사람이 알아보면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

정수를 작은 상자에 담아, 창고 구석에 갖다놨다. 마침 내일은 휴일이니, 아이린과 함께 다른 영지를 구경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머릿속으로 이번 주말을 보낼 계획을 짜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눈을 떴을 때, 일어나자마자 이불을 들어 아래를 확인했다. 평평하기 짝이 없는 아랫도리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아침에 당연히 왔던 반응이 오질 않았다.

나이를 먹어서 정력이 딸리는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개운한걸 보면 피곤해서 그런건 아닌데...'

몸이 피곤해서 발기가 안 되는 거였다면 전보다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리가 없다. 결국 이에 대해서는 의문을 남긴 채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이린은 아직 자고 있는지 방문이 닫혀있었고, 나는 잠을 깰겸 찬장에서 찻잎을 꺼내 물을 끓였다. 마리안이 두고 간 찻잎도 나름 아껴 마셨는데도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는 날 받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지금쯤 마리안과 에디스는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에디스는 임신까지 했으니 움직이기도 힘들텐데...

내가 찾아갈 때마다 웃으면서 반겨주던 마리안과 처음에는 사납게 굴었지만 나중에는 완전히 내게 의존하게 된 에디스가 그리워졌다.

아이린이 걱정할까봐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매일같이 만나며, 몸과 마음을 공유했던 사람이 둘이나 사라지니 공허함이 장난아니었다.

두 사람을 보내준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식은 딸이려나, 아들이려나.'

내가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 없었지만, 만약 된다면 확실하게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 기왕이면 딸이면 좋겠는데. 나같은 아들을 키우는 것보다는 아이린처럼 귀여운 딸을 키우는게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았다.

아이린 같은 딸이라면 열 명도 더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릴 때부터 마법을 교육시키면 나를 뛰어넘는 대마법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이니까.

"...주인님? 무슨 생각 하세요?"

귀여운 딸들에게 아버지라 불리는 상상에 빠져있던 나는 어느새 등 뒤에 다가온 아이린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잠깐 정수를 활용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단다."

차마 생각하고 있던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대충 둘러댔지만, 오늘따라 아이린은 집요했다.

"그런 것치고는 되게 기뻐 보이셨는데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되요."

나도 모르게 입꼬리까지 올라갔던건가. 잠시 망설였지만,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아이린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가만히 듣고있던 아이린은 딸을 키우고 싶다고 한 부분을 물었다.

"주인님은 딸이 좋으신건가요?"

"그래. 날 닮은 아들을 키워봤자 붙임성도 없을 것 같고 말이야."

"전 주인님을 닮은 아들이라면 대환영인걸요? 물론 저는 딸이든 아들이든 주인님의 자식이라면 열심히 키우겠지만, 주인님을 꼭 빼닮은 아들도 키우고 싶어요!!"

갑자기 잔뜩 흥분해서 소리치는 아이린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무, 물론 그런 일이 있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요... 헤헤."

아이린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렇게 덧붙였지만 역효과였다. 아이린의 방금 그 말로 내 인내심이 슬슬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까.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은 아이린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내 다짐이 무색하게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참는데 성공했다.

단순히 나를 좋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벌써 자식을 가질 생각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부끄러워 하는 아이린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쯤에서 화제를 돌려주는게 좋겠지.

"그래. 오늘은 밖을 둘러볼 생각인데 몸은 괜찮니?"

아이린이 아직 피곤하다면 계획은 취소하고 집에서 하루 쉴 생각이었지만, 아이린은 양 팔을 위로 올리며 문제없다고 소리쳤다. 오랜만의 데이트에 무척 기뻐했다.

'어제 있었던 일은 데이트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으니까.'

함께 누워서 별을 보는건 정말 좋았지만, 땅을 파서 뼈무덤을 만드는 짓 같은걸 데이트라고 부를 순 없었다.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챙겨입으렴. 오늘은 멀리 나갔다 올거니까."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데이트라도 할 걸 그랬다. 아이린은 멀리 나간다는 내 말에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바스티안 영지가 아니라 다른 영지에 갔다오자는 뜻이란다. 우리 영지는 이미 질리도록 둘러봤잖니?"

아이린과 함께 산책할 때나, 외식을 할 때 중심가의 가게들은 대부분 둘러봤다. 바스티안 영지가 규모가 작은만큼, 볼 거리도 적고 공간도 협소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바스티안 백작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레이스 공작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마차를 타면 반나절 정도 걸리지만, 직접 말을 몰고가면 정오쯤에는 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씻고 나갈 준비하고 있으렴. 잠시 나갔다오마."

"네. 알겠습니다!"

아이린은 무척 기뻐하며 나갈 준비를 하러 돌아갔다. 그녀는 요즘 들어서 향수도 꽤나 뿌리고, 조금씩이지만 화장하는 법도 배우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예뻐지면 다른 날파리들이 잔뜩 꼬일텐데.

집을 나서서 중심가를 향해 걸었다. 이제 막 문을 연 식당과 노점상들이 손님들에게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거리는 붐볐다.

하지만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그야 영주님 저택 앞에서 장사를 하다가 무슨 트집을 잡히려고 그러겠는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간만에 앨리스의 얼굴도 보고, 기사들의 말 중 한 필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짐마차나 끄는 말이나, 여관에서 빌릴 수 있는 비루먹은 말보다는 당연히 기사들이 타고 다니는 말이 좀 더 좋지 않겠냐는 근거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퇴고까지 한 번 거치고나니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네요. 으으...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는 졸려서 이만 자러 가보겠습니다...

2. 운전면허 따는 것도 모자라서 이에 충치까지 생겼네요. 새 해가 밝은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들만 생기는지... ㅠㅠ. 조만간 치과에 가서 치료 받아야겠습니다.

3. 저도 못하는 데이트를 아이린과 루디가 한다고 생각하니 질투나네요. 하아... 나도... 끼워줘...

4.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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