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6화 (246/260)

24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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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도 보초를 서고있던 병사들은 성실했다.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정문을 지키고 있던 그들은 내 얼굴을 보자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루디 씨 아니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었기에 언질을 듣지 못한 병사들이 용건을 물었다. 딱히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내가 제조한 포션이 영애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과, 지난번 병사와 모험가들이 잔뜩 부상을 입었을 때 헐값에 가까운 가격으로 포션을 제공했다는 사실은 영지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영지에 있는 병사들중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애님의 마법 수련에 도움이 될 포션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지난번 앨리스가 내 가게에 찾아왔던 이후로, 마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바스티안 백작가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바스티안 가문은 다른 귀족 가문과 달리 그런걸 제지하지 않았다.

당장 그녀의 아버지도 천생 검사였고, 이런 변방 영지에서 사교회 같은게 열릴리도 없으니 귀족 영애가 마법을 배운다는 사실을 흠 잡힐 일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영애님의 명령도 있었으니 들어가십시오."

두 기사가 손수 문을 열어주었고, 정원에 들어서자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던 메이드 중 한 명이 보고는 인사했다.

"어머. 혹시 아가씨를 보러 오신건가요?"

"네. 혹시 지금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요. 아직 아가씨는 주무시고 계실텐데... 우선 응접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나는 그녀의 말대로 얌전히 응접실에 앉아서 앨리스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그 사이에 다른 메이드가 내온 차를 절반쯤 마실 때쯤, 누군가가 응접실 문을 두 번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예상대로 들어온 사람은 앨리스였다. 자다 막 일어났는지 평소와 다르게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뒤에 서 있던 메이드는 좋은 시간 되시라는 말과 함께 문을 닫고 돌아갔다.

내 맞은편 소파에 앉은 앨리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약속도 없이 무슨 일로 찾아왔어요?"

"한동안 못본 것 같아서 얼굴도 보고, 겸사겸사 부탁이나 하나 드리려고 왔습니다."

"부탁이요?"

앨리스의 반쯤 감겨있던 눈이 떠졌다. 내가 그녀에게 부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네. 오늘 그레이스 공작가에 놀러갔다올 생각인데, 좋은 말 한 필만 빌려주십시오."

"뭐야. 고작 그런 거였어요?"

부탁의 내용을 들은 앨리스가 김이 빠졌는지 노골적으로 실망했다. 보통 부탁 내용이 별 것 아니면 좋아해야할텐데, 앨리스는 정반대였다.

"꼭 제가 큰 부탁이라도 하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빚진게 한 두 개가 아니니까요. 갚을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갚아두는게 좋잖아요."

확실히 내가 모르는 사람이 상대였다면 내가 그녀를 도와줬던 것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받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는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몇 번이나 내 편의를 봐줬으니 너그럽게 봐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앨리스와 나는 더 이상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었다.

비록 서로가 서툴러서 진심을 전하지는 못해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 정도는 양쪽 다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면서 대가를 바라는 남자는 없는 법이다.

이런 마음을 앨리스에게 설명하기는 귀찮았기에, 그냥 행동으로 보여줬다.

앉아있는 앨리스의 턱을 잡고, 얼굴을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앨리스가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더듬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다.

그리고 정확히 삼 초 후, 앨리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래서 경험 적은 여자는 놀려먹는 보람이 있다니까.

"미, 미쳤어요? 밖에 사람도 있는데 여기서 뭘!"

앨리스는 잔뜩 흥분에서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다. 고작 키스 정도로 저러긴.

"전에는 이보다 더한 짓도 해놓고 이 정도로 그러시는 겁니까?"

불과 몇 달 전에는 앨리스의 방에서 섹스까지 잔뜩 해댔었다. 물론 그 때는 앨리스의 아버지가 자리를 비워서 들킬 걱정 없이 할 수 있었서 그랬지만.

"...당신. 요즘 들어서 능글맞아진 거 알고있어요?"

나도 그걸 실감하고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그런지 어울리지도 않는 농담이 가끔씩 튀어나왔다. 이게 누구 덕분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후우. 좋아요. 시종에게 말해둘테니 마구간에 있는 군마(軍馬)들 중에서도 제일 좋은 녀석으로 빌려주라고 할게요."

"영애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내 장난스런 대답에 앨리스는 짜게 식은 표정을 지었다. 너무하는구만.

"그러고보니 이번 겨울에는 축제 같은건 없습니까?"

모험가나 주민이나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혀있는게 겨울이었다. 영지의 경제를 순환시키기 위해서라도 행사를 열 필요는 있었다.

특히 모험가들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바스티안 영지에서는 모험가들의 돈주머니를 가볍게 만들기 위한 이벤트를 작년에도 열었던 적이 있다.

"작년까지는 무슨 행사가 있었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둔게 없는지 앨리스가 내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불치병으로 쓰러져있던 앨리스가 병석에서 일어선지 아직 일 년도 안 지났다. 그 전의 일을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작년에는 영지의 식당들과 연계해서 잡아오는 동물이나 몬스터의 고기로 요리를 만들어줬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요금은 받지 않고 말이다. 겨울에 식량을 구하지 못한 몬스터가 바스티안 영지로 오는 마차를 습격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 이벤트는 예상 외로 큰 호응을 받았는데, 모험가들은 돈 한 푼 안들이고 고기 요리를 배터지게 먹을 수 있어서 좋고, 식당 주인들은 부가 수입을 올릴 수 있어서 싱글벙글이었다.

모험가들이 고기만 먹겠는가? 추운 겨울에 식사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술이 고프고, 공짜 고기라는 생각에 술을 잔뜩 퍼마시게 된다. 식당 주인들은 요리를 하는 수고를 술을 팔아서 메꾸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윈-윈이긴 했다.

물론 멧돼지를 잡아오겠다고 호기롭게 눈 내리는 겨울산을 오른 녀석 한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지만, 정신이 멀쩡하게 박힌 놈이라면 그런 짓을 하지는 않으리라.

"그랬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알려줘서 고마워요."

"별 말씀을. 그럼 나중에 말을 돌려드리러 올 때 다시 뵙겠습니다."

나가기 전에 앨리스를 한 번 끌어안고, 키스를 한 번 더 해주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아까 그렇게 부끄러워한 주제에, 이번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춰왔다. 겉으로 티만 안낼 뿐이지, 앨리스도 은근 변태같은 구석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느긋하게 키스보다 더한 짓도 하고 싶었지만, 집에서 아이린이 잔뜩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다음번에 뵐 때는 좀 더 느긋하게 이야기하도록 하죠."

먼저 방을 나간 앨리스가 말해뒀는지 정원으로 나오자 병사 한 명이 나를 저택의 마구간으로 안내했고, 그 중에서도 눈에 익은 놈을 끌고나왔다.

지난번 수도로 갈 때 나와 아이린을 태웠던 말이었다.

녀석은 나를 알아봤는지 거칠게 투레질을 하며 머리를 흔들었다. 당황한 병사가 채찍으로 녀석을 내리쳤지만 좀처럼 진정하질 않았다. 아무래도 전에 탈진 직전까지 부려먹었던게 녀석의 뇌리에 각인된 모양이었다.

손을 뻗어 녀석의 몸에 갖다대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내 마나를 받아들인 녀석은 방금 전까지 온 몸을 비틀어댔던게 거짓말인 것처럼 얌전해졌다. 간단한 복종 마법이었다.

지성이 없는 동물을 제어하는 것 정도는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원래 이런 녀석이 아닌데..."

"괜찮습니다. 영애님께 빌려주셔서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가볍게 말 위에 올라탄 나는 옆구리를 발로 한 번 찼고, 녀석은 수도에 갈 때 그랬던 것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확실히 평범한 말보다 훨씬 빠른게 군마(軍馬)다운 티가 났다.

못 본 사이 갈기도 멋지게 기른 녀석은 누가봐도 감탄이 나올법한 말이었다. 말을 탄 채 거침없이 거리를 달리자 중간중간 사람들이 비켜섰다. 그들 중 일부는 나를 알아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인사를 해주기도 전에 지나쳐버렸다.

순식간에 집 앞에 도착하자 나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멈췄다. 녀석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연신 거친 숨을 푸르륵하고 내쉬고 있었다.

"걱정 마. 이번에는 멀리갈 것도 아니고, 지난번처럼 무리해서 달릴 일도 없으니까. 대신 아까전처럼 거칠게 달렸다간..."

말고기는 너무 질겨서 가죽 구두를 씹는 것 같은 맛이었지만, 계속 씹다보니 나중에는 육포처럼 입이 심심할때마다 간식처럼 먹곤 했다.

다행히 내 뜻이 잘 전해졌는지 녀석은 더 이상 몸을 비틀지 않았다.

아이린은 이미 준비를 마쳤는지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있었다. 함께 집에 있을 때의 청순한 모습과 달리, 아이린이 마음먹고 꾸미자 정말 아름다웠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화장까지 했다. 평소보다 붉게 반짝이는 입술과 고혹적인 눈매가 부각됐다. 무엇보다 기품있어 보이는 검은색 원피스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포니테일을 하자 정말로 어른스러워 보였다.

어디 귀족가의 여식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아이린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잘 어울리나요. 주인님?"

"...어. 정말 잘 어울려."

묘하게 파여있는 가슴골과 드러난 허벅지가 남심을 자극했다. 게다가 꽃 향기까지 풍기는걸보니 향수까지 뿌린게 분명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린의 기분전환이라도 시켜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아이린은 나 이상으로 이번 데이트를 기대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원래 여자들은 첫 데이트에 상상 이상으로 많은 기대를 하는 법이죠. 아이린도 다르지는 않습니다!

2. 이번 설 연참을 위해 열심히 글을 써놨습니다! 기대해주세요! (다음편부터는 분량도 더 늘어날 예정입니다!)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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