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
예상대로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 사람들은 내 등 뒤에 타고 있는 미녀에게 시선이 고정됐다. 심지어 아이린은 예전에 수도에 갔을 때보다도 육체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부드럽게 내 등을 짓누르는 가슴의 감촉에 나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갈 뻔했다.
안장 위가 흔들린다는 이유로 아이린은 내 허리를 양 팔로 감아서 끌어안았다. 게다가 그녀의 손의 위치 역시 위험했다. 배꼽 아랫부분에 손을 겹친 아이린의 손이 금방이라도 아래로 향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
다행히 내 걱정은 기우였다. 흥분한 말을 성벽에 도착했을 때 멈춰 세우느라 조금 고생했지만 이미 나에 대해 들은 병사는 별다른 검문도 없이 통과시켜주었다.
성문을 지나 탁 트인 도로로 나오자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혹시 아이린이 무서워하면 한 번 멈춰세울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예쁜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려 조금 헝클어졌지만, 머리카락을 귓가로 넘기는 그런 모습마저도 아름다워 보였다. 콩깎지가 씌인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의 아이린을 보고 반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대로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동안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했다. 지나가면서 아이린이 궁금해하는 구조물이나 몬스터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다.
"주인님. 저기 있는 천막은 뭔가요?"
"모험가나 지나가는 행상인들이 쉴 수 있도록 만든 쉼터같은거란다. 저곳을 기점으로 야영을 하는 상인들도 많단다."
보통 걸어서 하루 거리 정도마다 저런 쉼터가 있기 때문에 영지간의 거리를 가늠하는 척도로 쓰이기도 했다.
"저 앞에 있는건요?"
아이린이 가리킨건 대로 가장자리에 어슬렁거리는 검은 형체였다.
"블랙 포이즌이라고 하는 몬스터란다. 슬라임처럼 액체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보다 훨씬 강력하지. 평소에는 작은 동물을 잡아먹지만, 사람을 발견하면 독을 머금은 브레스를 내뿜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내가 설명을 마치는 순간 우리를 발견한 녀석이 검은 입을 쩍 벌리더니 새까만 브레스를 뿜어냈다. 하지만 가벼운 바람 마법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브레스의 방향을 손쉽게 바꿀 수 있었다.
저 녀석의 독낭은 해독제를 만드는데 재료로 쓰이지만... 오늘 같은 날 저런 녀석을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가뿐히 무시하며 계속해서 길을 달려나갔다.
한 시간 정도 더 지났을 때, 그레이스 영지의 성이 보였다. 바스티안 영지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높은 성벽, 그리고 성문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상인들의 마차가 보였다.
아침부터 저럴 정도니 그레이스 공작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제국에 다섯개 뿐인 공작령을 일개 변방 귀족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도.
지난번에는 워프 게이트를 사용하기 위해 바로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느긋하게 둘러볼 예정이었다. 공작가의 영지 정도되면 영지 안에 별의별 것들이 다 있기 마련이다.
공연장, 결투장같은 문화시설부터 시작해서 수도만큼 크지는 않지만 마탑도 존재했다.
길게 줄을 서 있는 이들을 옆으로 지나쳤다. 줄이 줄어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인들은 앞질러버리는 나를 보고 손가락질 했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성벽 아래에서 검문을 하고있는 병사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나를 제지했다. 나는 그들 앞에서 말을 멈추고는 품에 챙겨둔 1급 시민 증명서를 내밀었다. 병사들은 증명서를 찬찬히 훑어보더니 바스티안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그레이스 공작령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깐깐하게 검문을 반복하고 있던 병사들의 달라진 태도에 나를 쳐다보는 상인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물론 그레이스 공작령은 바스티안 영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세가 높지만, 일개 병사들이 뭘 알겠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백작, 공작을 가릴 것 없이 귀족은 하늘만큼 높은 분들이었고, 그들의 인장이 찍혀있는 것을 보고도 통과시켜주지 않을 간 큰 병사는 없었다. 그레이스 공작령은 주변의 다른 귀족들의 중심 파벌이라고 하더니, 그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규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성문을 통과해서 들어오는 순간부터 거리가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선 노점상들 중에서는 정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팔고 있는 곳도 있었다.
우선은 타고온 말을 맡겨놓기 위해 여관을 찾았다. 묵을 것도 아니고, 말을 하루 맡길 수 있는 곳이라면 아무데나 괜찮았기에 마구간이 있는 가장 가까운 여관에 갔다. 여관 주인은 한 눈에 좋은 말이라는걸 알아보고는 잘 보살피겠다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호언장담했다. 물도 좀 먹이고, 푹 쉬게 해주라고 전하며 그에게 은화를 두 닢을 지불했다.
늘 아는 사람들만 봤던 바스티안 영지와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이곳에서는 길을 잃기 쉽상이었다. 아이린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아침부터 말을 타고 달려왔더니 슬슬 공복감이 들었다.
마침 옆의 노점상에서 팔고있는 닭꼬치를 두 개 샀다. 아이린에게 하나를 건네주자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입을 살짝 벌려 닭꼬치를 오물거렸다. 처음 한 입 베어물고는 꽤나 뜨거웠는지 입술로 후후 불어가며 먹는게 무척 귀여웠다.
닭꼬치를 먹으면서 다른 가게들을 둘러보던 할 때, 건물 중앙의 광장에서는 공연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은 광장 옆에있는 의자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 올라가 있는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아아! 로버트! 어째서 당신은 평민인건가요!"
"줄리아! 비록 우리 사이를 신분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오. 부디 나와 함께해주지 않겠소?"
마침 클라이막스에 이르는 부분이었는지, 남자의 고백에 여자는 결심한듯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로버트. 당신과 함께할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포기하겠어요."
이윽고 두 사람은 입을 맞추며 격렬한 포옹을 하는 것으로 연극은 끝이났다. 공연장에서 숙련된 배우가 아니라 그런지 중간중간 연기에 어색한 부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관객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러댔다. 개중에는 연극을 본 값으로 은화나 동화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린도 연극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흥분한 기색이었다. 나는 아이린과 함께 은화를 한 닢씩 던졌고, 이때까지 연극에 참여했던 배우가 모두 나와 허리 숙여 인사했다.
연극이 끝난 배우들이 퇴장하자 관람객들도 하나둘씩 광장을 빠져나갔다. 아이린은 방금 연극의 여운이 남아있는지 방금 전 배우들이 했던 대사를 중얼거렸다.
"아이린. 그렇게 연극이 재밌었니?"
분명 연극에는 아이린이 평소에 즐겨 읽는 연애 소설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거나, 그걸 극복하면서 결과적으로 두 사람이 이어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네. 그런데 주인님...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응?"
"아까 남자 배우의 대사를 주인님의 목소리로 듣고 싶어서요. 안 될까요?"
잠시 망설이자 아이린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고, 나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대사가 듣고 싶은거니?"
방금 전 남자 배우가 했던 대사는 하나같이 낯간지러운 것들 뿐이었다. 아이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귓가에 대사를 속삭였다. 그걸 다 듣고나자 나는 방금 전에 수락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해주겠다고 한 말을 번복할 수도 없는 노릇. 헛기침을 한 두 번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광장 외진 곳에서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 그러니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주겠어?"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대체 배우들은 어떻게 이런 대사를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내뱉을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만약 내가 아는 다른 사람이 이 모습을 봤다면 당장 혀를 깨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몹시 만족했는지 황홀한 표정으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여자들은 이런걸 좋아하는건가?
내가 보기에는 한없이 느끼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이린의 취향에는 적중한 듯 했다.
'그래. 좋아하니 그걸로 됐지.'
내 자존심과 아이린의 웃음을 바꿀 수 있었으니 꽤나 값싼 거래였다. 그 후로는 광장을 지나 번화가로 접어들었다. 물론 방금 지나온 거리도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이쪽은 좀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척 봐도 부자같아 보이는 상인들과, 기품이 흘러넘치는 영애와 귀부인들이 즐겁게 웃으며 지나다녔다. 확실히 잘 나가는 귀족이라면 이곳만큼 문화 생활을 즐기기에 좋은 곳은 없으리라.
당장 식당에 적혀있는 음식의 가격만 봐도 평범한 식당의 세 배가 넘었다. 평범한 주민은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큰 돈이었다.
평소에 검소하게 생활하는 아이린도 메뉴판에 적힌 금액을 보고는 동공이 흔들렸다.
"주, 주인님. 여긴 너무 비싼 것 같아요."
"가끔씩은 이런 것도 괜찮아."
귀족들이 괜히 이런 식당을 찾는게 아니다. 일반 식당에서는 보기 힘든 고급 재료,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운 요리사와 향신료가 들어갔기에 기꺼이 그만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다.
'물론 가격에 거품이 끼어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여전히 식당 안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아이린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순식간에 내게 끌려온 아이린은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눈을 크게 떴다.
바스티안 영지에서도 고급 식당을 데려가본 적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레이스 공작가에 있는 곳과는 규모부터가 달랐다.
고급 원목을 사용한 테이블과 의자는 광택이 났고, 중앙에서는 악사 두 명이 잔잔한 식당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미니 스커트에 가까운 메이드복을 입은 미소녀들이 접시를 들고 다녔고,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천막을 쳐서 분리되어 있는 공간도 있었다. 카운터를 보고있던 점원 중 하나가 다가왔다.
"어서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네."
그녀는 나와 아이린을 훑어보더니 미소를 머금었다.
"어느 자리로 안내해드릴까요? 원하시는 곳이 딱히 없으시다면 제가 추천해..."
"조용하고 전망 좋은 자리로 부탁합니다."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 그녀에게 튕겨주었다. 얼떨결에 금화를 받은 그녀의 눈빛이 완전히 바뀌었다.
"알겠습니다. 3층의 테라스로 안내하겠습니다."
만약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1층의 가장 구석진 자리로 안내했을 것이다. 아이린과 나는 겉으로 보기에 수수하기 짝이 없는 옷차림이니 말이다.
돈을 낭비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즐길 때는 제대로 즐기자는게 내 신조였다.
1층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귀족 자제들로 보였다. 남자와 여자가 둘씩 짝을 지어 즐겁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나와 아이린이 지나가자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2층에 있는 사람들은 상인을 비롯한 귀부인들이었다. 식사가 아닌 차와 다과를 먹으면서 웃는 그들은 점원이 나와 아이린을 안내하는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그들답게 가게에서 처음 보는 우리가 누구인지 필사적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자 아이린은 조금 무서워했지만, 내가 손을 꽉 잡자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오늘 밤에 한 편 더, 그리고 내일 낮이나 저녁에 한 편 더 올라올 예정입니다!
2. 다들 즐거운 명절 보내셨는지 모르겠네요. 내일까지 푹 쉬시고, 기운내서 올 한 해도 잘 지내시길 바라겠습니다!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은 늘 확인하고 있으니, 바라는 점이나 오타가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세요!
쿠폰은 작가의 연참의 원동력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