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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248/260)

24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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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는 사람이 두 명 밖에 없었다. 꽤나 귀티나는 미소년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랐을게 분명한 소녀가 웃으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지나칠 때, 소년의 시선이 아이린에게 고정됐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테라스석은 어느 식당에서나 가장 비싼 편이었다. 그렇게 자리를 안내한 점원은 들고온 메뉴판을 내밀었다. 고급 식당답게 종류도 무척 다양했다.

메뉴판에는 사십 가지가 넘는 메뉴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해물 스파게티, 크랙 피쉬 튀김, 고블린 목살, 칠면조 통구이 등 아이린이 처음 보는 메뉴가 잔뜩 있었기에 풀 코스 요리 2인분을 점원에게 부탁했다.

아이린이 저렇게 말라 보이지만 나보다도 먹성이 좋다는걸 고려하면 다 먹기에는 충분했다.

점원은 메뉴판을 돌려받고는 허리를 한 번 숙이고 내려갔다. 그 동안 나는 아이린과 함께 테라스 밖의 전경을 구경하며 방금 본 연극에 대해 떠들었다.

"이번 연극은 다 좋았지만 아쉬운게 하나 있었어요."

"어떤 부분이 그랬는데?"

"개인적으로는 여자보다 남자가 귀족인 편이 더 재밌었을 것 같아요."

만약 그게 바뀌었더라면 아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전제가 성립되질 않았을 것이다. 귀족 남자들 중에는 평민 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미녀를 첩으로 들이는 경우가 잦았으니까.

여자가 귀족이고, 남자가 평민이라는 상황이었기에 연극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감을 더했을 것이다. 물론 즐거워하는 아이린에게 찬물을 끼얹을만한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린이 저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더 기뻤다. 방금 아이린의 말대로 신분이 뒤바뀐다면 아이린과 나의 관계도 그와 별반 다를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린은 노예고, 준귀족 취급을 받는 1급 시민인 나와는 어마어마한 신분의 격차가 있었다.

"아이린.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각인을 지워줄 수 있어."

한참 전부터 하고 있던 생각을 틀어놓자 아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왜? 아이린 네가 내 노예가 아니라고 해서 외면할 일은 절대 없을거야."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던 아이린이 오히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나는 조금 흥분했다. 아이린이 아직 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게 아니에요. 주인님. 이 각인은 제가 주인님의 것이라는 증표같은 거라서 지우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늘 주인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기도 하고요."

그녀는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애틋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걸 보니 차마 더 이상 각인을 지우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이린이 그만큼 나와의 연결고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조금 두근거리기도 했다.

"알았어. 그래도 각인이 지워지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줘."

"네. 늘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 대화가 끝난 직후, 점원이 올라왔다. 하지만 방금 전과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는 다른 점원이 도수가 약한 와인 한 병과 잔을 두 개 들고오고 있었다.

"식전주와 에피타이저입니다."

아이린과 내 앞에 각각 놓인 접시에는 훈제 연어가 놓여있었다. 한 입이면 먹을 것처럼 감질나는 양이었지만, 이런 식당에서의 코스요리가 다 그런 법이지.

문제는 에피타이저가 아닌 술 쪽에 있었다.

도수가 약한 와인이라고는 해도, 아이린은 지난번 만찬회에서 한 잔 만에 뻗어버린 전과가 있었다.

"아이린. 술은..."

"저는 괜찮아요. 주인님."

다행히 아이린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쓴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잔을 거절했다. 혹시나 또 아이린이 취할까봐 걱정했던 나는 티나지 않게 안도했다. 술에 취한 아이린을 말에 태워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점원에게는 아이린이 마실 음료를 한 잔 부탁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도 주스를 한 잔 가져다 주었다.

와인을 잔에 붓고, 연어를 한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부드러우면서도 진한 육즙이 입 안에서 맴돌았는데, 향신료를 많이 썼는지 뒤로 갈수록 짠맛이 심해졌다.

그때 마침 와인을 한 모금 마시자 짠맛이 중화되며 은은한 여운이 입 안에 맴돌았다. 코스 요리의 장점 중 하나였다.

혼자 먹을 때는 안 좋게 보이던 음식도, 다른 것과 함께 먹거나 순서를 바꿔서 먹으면 오히려 장점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그걸 조합해 내는게 요리사의 역량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곳의 주방장은 합격점을 충분히 줄 수 있었다. 비록 전채 요리밖에 먹지 않았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요리사들이 수두룩했다. 귀족들은 누구보다 그런 부분에 민감했고, 이 식당에 왜 손님이 많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스프, 거위 간, 크랙 피쉬 구이가 순서대로 나왔다. 크랙 피쉬는 일반 생선과는 달리 체내에 독을 품고있는 몬스터였다. 하지만 독을 제거하고 요리하면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러운 생선 살을 발라먹을 수 있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요리인데 이런데서 먹을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아이린에게 크랙 피쉬에 대해 설명해주자 독이 들어있다는 부분에서 얼굴이 파랗게 됐다고, 독을 제거해서 안전하니 마음 놓고 먹어도 된다고 하자 그제서야 조심스레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그렇게 다음 요리인 비프 스튜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도중,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커플의 식사가 끝났다. 소년은 집까지 바래다 드리겠다고 했지만, 소녀는 집사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괜찮다고 거절했다.

당연하지만 두 사람 다 귀족이었다. 그렇게 영애가 먼저 내려가자, 소년은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려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는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무래도 귀찮은 일에 꼬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아름다운 마드모아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당연하게도 안면이 없는 남의 식사 자리에 합석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한 것을 넘어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까부터 이 녀석이 아이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물론 짜증이 치민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였다.

갑자기 자신에게 들이대는 소년을 보고 당황한 아이린이 내게 눈빛으로 구조신호를 보냈다.

"갑자기 남의 식사에 끼어들었으면, 자신이 누군지 먼저 밝히는게 예의 아닙니까?"

내 일침에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정체를 떠벌렸다.

"이런. 확실히 그렇군요. 제 이름은 그레이스 드 다비안. 그레이스 공작가의 삼남입니다. 편하게 다비안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아름다운 마드모아젤."

자신의 가문을 자꾸만 강조하는걸 보니 어지간히도 그레이스 공작의 핏줄이라는게 자랑스러운 듯 했다.

다비안은 저런 느끼한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하며 아이린에게 윙크를 했다. 당연하지만 아이린은 질색하는 표정으로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지만,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딱 봐도 허우대만 멀쩡한 한량이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영애와 함께 있다가 아이린에게 들이대러 온 걸 보면 절조 없는 호색한인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그레이스 공작님의 영식께서는 어쩐 일로 오신겁니까?"

나는 마지막으로 다비안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무례하게 들이댄 것은 젊을 때의 치기로 봐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린과 함께있는 이 시간에 험한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나와 생각이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야 물론 이 아름다운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왔습니다만? 그러는 그쪽은 이 아가씨와 무슨 관계입니까?"

다비안은 무척 귀족답게 눈치 없이 굴지 말고 빠지라는걸 완곡하게 돌려서 말했다.

잠시 머릿속으로 눈 앞의 얼간이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아버지라는 빽을 믿고 이런 짓을 하는 모양인데, 그 착각을 바로잡아줄 필요가 있어보였다.

"커흑...켁!!"

순식간에 다비안의 목을 한 손으로 낚아챘다. 내 악력에 그는 숨이 안 쉬어지는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양 손으로 내 팔을 잡았다. 하지만 곱게 자란 도련님답게 팔 힘이 터무니없이 약했다.

"네놈...!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흠. 조금 부족한가?"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됐는지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아슬아슬하게 뼈가 부숴지기 직전까지 힘을주자 놈의 얼굴이 터질듯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컥...커억...큭..."

이제 좀 대화를 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팔을 양 손으로 두드렸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녀석의 목을 조르던 손을 풀자 그대로 바닥에 자빠져서는 추한 몰골로 숨을 내쉬었다.

"커윽... 하악...하아..."

그의 얼굴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혹시 이런 모습을 보고 아이린이 무서워하면 어떡할까 싶었는데, 예상 외로 아이린은 기뻐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을 위해 나서준게 기쁜걸까?

"네놈... 이번 일은 공작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정식으로 공작가에서 네놈의 살인 미수 행위에 대해 응징할 것이야!"

방금 그런 짓을 당했는데도 나를 향해 삿대질하는걸 보면 달고 있는 머리는 장식인 모양이었다.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믿고 기세등등한 철부지 도련님의 교육을 좀 시켜주기로 했다. 겸사겸사 기분 좋게 즐기고 있던 식사를 망친 화풀이도 하기로 했다.

손을 펴고 힘을 뺀 채로 가볍게 놈의 뺨을 후려쳤다. 나름 힘을 뺐는데도 뺨을 맞은 그는 옆으로 나자빠지며 의자에 머리를 부딪쳤다.

"끄악! 으윽..."

그는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끙끙 앓아댔다. 그런 그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내가 모험가일 때 신고 다녔던 징이 박힌 부츠가 아니었던게 지금처럼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꾸엑!"

놈은 반사적으로 입에서 침을 뿜으며 테라스 구석까지 굴러갔다. 나는 벌써 뺨에 붓기 시작한 그의 얼굴을 잡고 흔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짓을 한거냐? 응? 대낮에 사이좋은 남녀가 식당에 오면 무슨 관계인지 당연히 알거 아니야. 방금 전에 네가 작업치던 저 영애한테나 집중하지. 왜 분수에 맞지도 않는 짓을 하냐고."

짝. 짝. 짝.

내가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뺨을 얻어맞은 다비안의 얼굴이 좌우로 꺾였다.

"우... 우리 아버지가..."

이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를 찾는걸 보면 이때까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여자들을 꼬셔왔는지 짐작이 갔다.

공작가의 핏줄이라는 명함, 반반한 외모. 이 둘이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넘어왔겠지. 그걸로 안 넘어오는 여자들은 아버지에게 말해서 그 여자의 집안에 압력을 넣는 방식으로 취했을테고.

나는 어지간하면 욕을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말수 자체가 적은 편이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을 선호했다. 그런 내게 욕이 나오게 했다는 점에서 그는 칭찬받아 마땅했다.

"야이 쪼다 새끼야."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한심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반면교사로 말이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간만에 글이 쭉쭉 써져서 기분좋게 적었네요. 요즘 치통 때문에 조금 고생했는데, 오늘은 그나마 괜찮아서 열심히 썼습니다.

2. 여러분도 열심히 양치하세요. 이가 아픈 것도 서러운데, 진료받고 돈이 왕창 깨질 걸 상상하니 벌써부터...으으... 이제 명절도 끝났으니 빨리 병원가서 치료받고 평소처럼 돌아올 예정입니다.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여유있게 올릴 수 있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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