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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화 (249/260)

2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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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안은 처음 겪는 공포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부족함이란걸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공작가의 삼남으로 태어난 그는 진작에 가문을 물려받을 생각을 접었다.

어차피 장남과 차남인 형들이 그보다 훨씬 똑똑했고,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다비안은 검을 휘두르는 것도 싫어했고, 오직 노는 것과 여자를 만나는 것만 좋아했다.

그런 다비안을 본 그레이스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자식이라고 가끔씩 부탁을 하면 들어주거나 용돈을 주곤 했다.

원래 다비안은 바스티안 영지의 영애와 약혼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 구해왔는지 바스티안 가문에서 그레이스 공작가의 치부를 낱낱이 파해친 서류를 내밀었고, 약혼은 자연스레 파기되었다.

다비안이 더욱 거리낌 없이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당장 오늘도 미모가 훌륭하다는 아버지 휘하의 남작의 딸을 꼬시기 위해 식당에 왔었다.

하지만 그녀는 좀처럼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무슨 말을 해도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결국 이번에도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야하나 고민하던 도중, 눈 앞에 여신이 지나갔다.

찬란한 보랏빛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성숙미를 더하고, 자신 또래로 보이는 것 치고는 가슴도 제법 컸다. 무엇보다 남심을 잡아끄는 색기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부터 눈 앞의 영애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결국 영양가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자신에게 질린 영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그는 그녀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음에도 없는 배웅을 하고는 방금 전의 여신이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옆에 남자가 있기는 했지만 상관 없었다.

적어도 귀족 중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고, 그 말은 자신에게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얼굴 하나는 잘 타고났기에 평소같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유혹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남자가 말을 끊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자신의 가문 이름을 듣는 순간 고개를 조아릴 것이 분명했다. 이 곳에서만큼은 자신은 왕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그가 실수한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눈 앞의 남자가 귀족이나 가문 따위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는 자신의 사람에게 손을 댄 사람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착각의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야이 쪼다 새끼야."

이미 피멍이 든 그의 얼굴을 붙잡고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아직까지도 아빠만 찾는 애새끼 같은 모습 때문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다못해 달려들면서 반항이라도 했으면 마음놓고 팼을 것이다. 적어도 남자다운 모습은 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버지의 권력에 기대는게 아니면 아무것도 못하는 얼간이 새끼는 상대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아버지한테 일러봤자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을거다."

물론 눈 앞의 애새끼는 이렇게 말해줘도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믿을 구석이 아버지밖에 없는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입고있던 외투를 한 번 잡아당겨서 먼지를 털었다. 옆을 보니 접시를 들고 올라오던 점원들이 난장판이 된 모습에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나는 손짓으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는, 쓰러져 있는 다비안의 무릎을 걷어쳤다.

녀석은 더 이상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애벌레처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다가올 충격에 대비할 뿐이었다.

"한심한 새끼."

그가 다른 여자들을 꼬시든, 후리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앞에서 아이린에게 손을 대려고 한 것도 모자라, 같잖은 가문의 이름으로 협박을 하려 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만약 내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장 가문의 위세를 업고 아이린을 협박했을게 분명하다. 대체 얼마나 사람을 물로 봤으면 이렇게 뻔뻔한 짓을 한단 말인가?

처음 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 정도라면, 그가 평소에 영지 내에서 어떤 행실을 보였을지는 안 봐도 짐작이 갔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화를 가라앉혔다.

썩어도 준치라고, 다비안이 공작가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상 공작가는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보복할게 분명했다. 물론 분노에 휩쌓여서 생각보다 크게 일을 벌이긴 했지만, 대안 하나 없이 이런 짓을 저지른건 아니었다.

앨리스에게 건네줬던 자료는 아직 내 손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나라도 퍼졌다간 그레이스 가문이 당장 반토막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비밀들이었다. '고작해야 삼남'의 명예를 위해서 가문의 안위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물론 귀한 도련님의 얼굴이 피떡이 되서 돌아가면 문제가 번질게 분명했기에, 겉모습만큼은 원래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회복 마법으로 녀석의 어긋난 코뼈와 얼굴에 든 피멍을 치료했다. 아까 내가 걷어찰 때 갈비뼈도 몇 개 박살났길래 고쳐줬다.

순식간에 상처가 나으며 고통이 사그라들었지만 반대로 다비안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치유 마법을 사용하려면 적어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고위 마법사여야 했다. 그제서야 상대를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웅크려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서 무릎을 꿇었다.

원래 사람은 상식을 벗어난 충격을 받게되면 목숨부터 구걸하기 마련이었다.

다비안은 본능에 충실하게 살던 놈 답게 자존심을 버리는 것도 빨랐다. 손바닥 뒤집듯이 용서를 구하는 모습에는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마법사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당장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그는 무릎까지 꿇은 채 마음에도 없는 말을 주워섬겼다.

아이린에게 찝적댄 대가로는 조금 부족했지만, 이 정도로 봐주기로 했다.

'이 이상 일을 벌렸다간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으니.'

내 정체를 들켰다간 당장 내게 1급 시민권을 발급해준 앨리스부터 그레이스 공작가의 표적이 될지도 모른다.

"오늘 있었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 나도 아무한테도 말 안할테니까. 오늘 여기선 아무런 일도 없었던거야. 알겠냐?"

"네! 물론입니다!!"

이 지옥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다비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아이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만약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간... 이 정도로는 절대로 안 끝날거다."

살기가 가득 담긴 내 목소리에 녀석의 얼굴이 시퍼렇게 물들었다.

"무, 물론입니다!"

녀석은 내심 찔렸는지 딸꾹질까지 하면서 내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최대한 비굴하게 빌었다. 이런 놈을 믿을만큼 인간을 신뢰하진 않지만, 적어도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 정도는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먼저 나가봐. 직원들한테는 잘 둘러대고."

손에 적당히 힘을 실어 그의 등짝을 두들겼다. 내쫓기듯이 떠밀린 다비안은 터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귀족이라는 자존심까지 내팽개치며 목숨을 구걸했던 이상, 자신의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는 짓도 하기 힘들 것이다. 만약 그랬다간 한 번 더 심한 꼴로 만들어줄 뿐이다.

물론 두 번째에는 힘조절을 못해서 몸의 어디 한 군데를 영영 쓸 수 없게 되버릴지도 모르지만.

다비안이 내려가고 삼 분쯤 뒤에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메인 요리를 즐기지도 못하고 떠나는 것은 탐탁지 않았지만 이렇게 난장판이 된 곳에서 식사를 이어서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안하다. 아이린. 괜히 내가 흥분하는 바람에 좋은 시간을 망쳤구나."

다비안 녀석을 패버린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린이 식사를 즐기고, 다음을 기대하고 있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도 나인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아니에요. 주인님. 저도 그 남자는 부담스러웠고... 사실..."

아이린은 양 손을 깍지를 끼더니 몸을 꼬았다. 부끄러워하며 그녀가 내게 속삭인 말이 다시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주인님이 저를 위해서 나서셨을 때, 무척 기뻤어요."

빨갛게 달아오른 아이린의 사랑스러운 얼굴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아까웠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구나. 식사는 다른 곳에 가서 마저 하도록하자."

계단을 내려가자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는지 인기척이 없었다. 아마 다비안이 나가는 길에 모두 쫓아낸 것 같았다. 완전히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닌 모양이군.

일 층까지 내려오자 아까 우리를 접대하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동을 일으켜서 미안합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이라고 전해주십시오."

나는 들고왔던 금화 주머니를 하나 점원에게 건넸다. 다비안을 집어던지고, 테이블을 걷어차면서 파손된 가구가 꽤나 됐다. 무엇보다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입막음 하기 위해서는 돈을 뿌리는게 제일 편했다. 나중에 지배인이 와서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고도 납득할 수 있는 금액을 주면 굳이 일을 키우지는 않겠지.

그리고 내가 다비안을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본 점원은 두 명 뿐이었다. 주머니에 있던 금화를 꺼내 두 명의 손에 두 닢씩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쥐어주었다.

"아까 들었겠지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함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두 분을 믿어도 되겠죠?"

다행히 두 소녀는 평소에도 다비안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는지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이에요. 사실 다비안 도련님은 저희 가게에서도 가끔씩 직원들의 치마를 들추거나 엉덩이를 만지시는 일이 잦아서... 조금 통쾌했답니다."

"저도 동감이니 비밀은 꼭 지켜드릴게요."

두 소녀에게 확답을 들은 다음 식당을 나와 다시 거리를 걸었다.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했기에 배를 채울 수 있는 노점상 위주로 돌아다니며 바스티안 영지에서는 맛보지 못한 새로운 음식을 하나씩 군것질했다.

오크 귀 꼬치, 블랙 버드 알 구이, 하피 다리 튀김 등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식성이 좋은 아이린은 그 중에서도 하피 다리 튀김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섯 개나 먹었다.

비록 값비싼 요리는 아니었지만, 아이린과 함께 먹어서 그런지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점심 때가 조금 지날 때쯤,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서는 웃옷을 벗은 근육질의 남자 한 명이 투기장을 홍보하고 있었다.

"오늘은 특급 몬스터 아울베어와 검투사의 혈투입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가 단돈 은화 한 닢!!"

오락거리가 적은 평민들에게 있어서 투기장은 가장 자극적인 구경거리였다. 검투사와 검투사가, 혹은 검투사와 몬스터가 둘 중 한 명이 목숨을 잃을 때까지 싸우는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를 보는 순간 광기에 전염되니까.

하지만 아이린에게 투기장은 너무 야만적으로 느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이린은 눈 앞의 남자가 들고있는 팻말에서 눈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투기장이 가보고 싶니?"

"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으니까 어떤 곳인지 구경해보고 싶어요."

아이린이 보기에는 너무 잔인한게 아닐까 싶었지만, 좀 있으면 그녀도 성인이고 이번 기회에 몬스터와 인간의 전투를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충치와 깨진 이를 치료하느라 조금 쉬다왔습니다. 아직 조금 후유증이 남아있긴하지만, 그동안 쉰 분량만큼 열심히 써서 메꿀 생각입니다. 기대해주세요!

2. 글의 패턴이 단조로워지지 않도록 당분간은 책도 열심히 읽고, 스스로 예전에 썼던 글을 비교하곤 합니다. 최대한 독자분들의 의견을 반영할테니 가탄없이 말씀해주세요.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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