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회
Ch 49 -데이트-마법으로 만들어진 밧줄에 묶여 끌려가는 아울베어를 본 아이린은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신경쓰이는 거라도 있니. 아이린?"
"...아뇨. 단지 저도 주인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팔려갔다면, 저렇게 목줄에 구속구를 차고 가축처럼 끌려다녔을거라고 생각하니 슬퍼져서요."
부상을 입은 채로 끌려가는 아울베어를 보고, 과거의 일이 떠오른 것 같았다. 노예로 구속되어 있을 때의 일이 그녀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이린. 괜찮아. 더 이상 아무도 너를 험하게 다루지 못해.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지켜줄테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아이린을 품에 꼭 안아주자 그제서야 진정된 그녀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언젠가 아이린이 이런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 적어도 나와 함께 있을 때만큼은 그녀가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주인님..."
내 품에 안긴 아이린이 물기가 젖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고, 그 시선을 참지 못한 나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아래의 일반석에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았기에 신경쓰지 않고 키스를 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피가 튀기고, 사람들이 질러대는 함성과 광기에 전염됐는지, 우리도 평소보다 더 대담하게 키스했다.
처음에는 서로의 입술을 맛보듯이 부드럽게 문질렀지만, 조금 지나자 허리를 팔로 감아서는 끌어안았다.
서로의 입술과 타액을 맛보며 진한 키스를 몇 번이나 나누고 나서야 투기장에서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밖에서 이런 스킨쉽을 하는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츄웁...츄웃...으응..."
모험가들이 피를 보고 돌아오면 늘 창관을 찾듯이, 아이린도 투기장의 전투를 보고는 몸이 달아오른 듯 했다. 그녀는 애정을 갈구하듯이 내게 매달렸고, 나는 그런 아이린의 등을 쓸어주며 부드럽게 입술을 문질렀다.
더 흥분한 아이린이 내 입 안으로 혀를 밀어넣으려하자 그쯤에서 그녀를 살짝 밀어내며 흐름을 한 번 끊었다.
이미 투기장에 남아있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었다. 아이린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아쉬워하며 입술을 혀로 요염하게 핥는 것으로 참아주었다. 투기장을 나오자 아까 입구에서 표를 팔던 남자들이 또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허리를 숙였다.
투기장은 번화가와 홍등가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한쪽은 마음에 드는 여자와 자기 위해 창관을 기웃거리는 남자들이었고, 나머지 한 쪽은 화려한 옷이나 값비싼 보석을 파는 상점가였다. 아이린과 함께 번화가 쪽으로 가는 길목에서 특이한 천막을 발견했다.
안이 전혀 보이질 않는 새까만 천막은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뭘 하는 곳인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천막을 골목에 세워놨는지 몰라 기웃거리던 도중, 천막 안에서 늙은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끌끌. 기웃거리지만 말고 어서 들어오게!"
어차피 저녁까지 시간도 남았기에 한 번 구경이나 해보기로 했다. 천막 안에서 불법적인 약이나, 고물을 파는게 아닐까 싶었던 내 생각과 달리, 노파는 작은 탁자 위에 타로 카드를 펴 놓고 있었다. 점술사인가?
"특이한 커플이구만. 한 쪽은 반마(半魔)에 한 쪽은..."
중얼거리던 노파가 키득거리며 나를 응시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나는 노파를 죽일 생각까지도 했었다. 도시 한 가운데서 아이린이 마족이라는 사실을 들켰다가는 좋은 꼴을 볼 수 없을테니 빠르게 증거를 인멸하려 했다.
하지만 정체를 단숨에 꿰뚫어본 노파는 그런건 신경쓰지도 않는지 기분 나쁘게 킬킬대며 타로 카드를 내밀었다.
"클클. 너무 긴장하지 말게. 자네들도 내 나이쯤 되면 알게될걸세. 그보다 점이나 한 번 보지 않겠나? 싸게 해 주지."
"...그러죠."
마족이라는 사실을 들킨 아이린은 여전히 굳어있었기에 내가 대답했다. 노파의 정체를 알 순 없지만 적어도 당장 이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어보였다. 단순한 점술사는 아닌 것 같고, 아마 신통력을 가진 마녀일 가능성이 높았다.
"좋아. 그럼 어떤 점을 봐 줄까? 금전운, 생명운도 괜찮지만 나는 연애운을 추천하고 싶군. 마침 자네는 옆의 아이와 사귀고 있지않은가?"
노파의 권유를 받아들이자 그녀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카드를 뒤섞어서 다시 펼쳤다. 아이린은 노파의 현란한 손재주에 시선을 빼앗겼다.
"카드는 총 세 장 뽑아야하니 각자 한 장씩 뽑아보게. 마지막 장은 내가 뽑겠네. 아, 뒤집지는 말게나. 끌끌."
아이린은 잠시 고민을 하다 마음에 드는 카드를 골라 살짝 빼냈고, 나도 내키는 카드를 아무렇게나 한 장 뽑았다. 노파는 아이린과 내가 빼낸 카드를 보고는 한 장씩 뒤집었다.
먼저 아이린이 뒤집은 카드는 '태양'이었다.
"오호. 이 아가씨는 자네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구만. 지금의 생활에 만족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관계를 꿈꾸고 있어. 하지만 상대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망설이고 있군."
아이린은 정곡을 찔렸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그녀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노파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 내가 빼냈던 카드도 뒤집었다.
내가 고른 카드는 한 남자가 옥좌에 오만하게 앉아있었다.
"황제로군. 이 카드를 뽑는 사람은 좀처럼 없는데 말이야. 킬킬.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신만의 신념을 관철하는 철의 인간들에게 어울리는 카드지."
그 말에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타인의 시선, 생각따윈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만 몰두했던 과거가 있었다. 이제와서는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분명 아이린을 만나기 전의 나는 내심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상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아이린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카드를 뽑았다는게 기분 좋지는 않았다. 노파의 말대로라면, 내가 여전히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으니까. 지금 내게 있어서 누구보다 소중한 것은 바로 내 곁에 있는 아이린이었다.
"이제 마지막 한 장만 남았군. 그럼... 어디보자."
노파는 고민도 하지 않고 가운데에 있는 카드를 꺼내서 뒤집었다. 마지막 카드에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그려져 있었다.
"킬킬. 운명의 수레바퀴라고 불리는 카드지. 아무래도 두 사람은 정말로 이어질 운명이었나 보군. 서로가 서로를 만나는 것으로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어. 아가씨에게도, 당신에게 있어서도 삶의 전환점이 된게지."
노파의 목소리는 감탄마저 어려 있었다.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내가 평소에 하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털어놓은 것 같았다. 그건 아이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는 아까의 불안한 모습이 거짓말처럼 내 손을 꼭 잡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 앞의 노파에게 신통력이 있다는게 확신으로 바뀌기도 했다.
"남자는 여자를 상처입힐까봐 다가가지 못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폐가 될까봐 망설이고 있군. 좀 더 서로를 믿어도 괜찮을게야. 킬킬. 간만에 재밌는 궁합을 봤군. 이런 궁합은 오십 년에 한 번도 잘 나오지 않는데 말이야."
오십 년에 한 번 이라니. 대체 몇 년을 산거야? 어쩌면 내 스승에 버금갈 정도로 나이를 먹은걸지도.
"...아무튼 감사합니다. 복채는 얼마입니까?"
"복채는 됐네. 간만의 여흥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두지. 다음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고."
복채도 주지 않고 가면 찝찝할 것 같아서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려는 순간 엄청난 마력이 우리를 휘감았고, 눈을 떠 보니 아이린과 나는 어느새 천막 밖으로 나와 있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방금 전까지 천막이 있었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그저 음침한 뒷골목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들만이 우리를 반겨줄 뿐이었다.
"...대체 뭐였을까요. 주인님?"
아마 주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유의미한 정보를 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구나."
마녀들이 심심하면 인간들의 축제에 몰래 끼어들어 작은 장난을 친다고는 들었지만, 그걸 직접 겪을 줄은 몰랐다. 방심하고 있긴 했지만 나를 상대로 마법을 사용해서 내쫓을 줄이야.
나한테 폐를 끼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도와준 쪽에 가까우니 깊게 파고들지는 않기로 했다.
'아이린이 설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은...'
나는 아이린의 과거를 생각해서 천천히 다가가려 했지만, 그녀는 나와 좀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했다. 방금 전 노파의 해석에 반발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게 사실이란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이 이상의 관계라면...'
이미 키스는 매일같이 하고 있다. 평범한 연인들보다도 훨씬 스킨쉽이 잦다고 생각하는데 이걸 넘어서는 관계라는건 역시 '그거' 밖에 없다. 아이린이 나한테 그걸 원한다고? 정말로?
만약 평범한 처녀였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진 않았을텐데, 첫 경험을 치르는 것과 동시에 아이린이 완전한 서큐버스로 거듭난다는 것을 고려하면 조금 망설여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말로 아이린이 내게 안기고 싶어한다면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그렇게 나만의 생각에 잠길 때 쯤, 차가운 물방울이 내 뺨에 떨어졌다.
처음에는 한 방울씩 떨어졌지만, 이내 굵은 빗줄기가 되어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갑작스런 소나기에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가까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아이린의 손을 잡고 근처의 여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는 없었고, 결국 쫄딱 젖어버리고 말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를 보고 있던 여관 주인은 혀를 차며 벽에 걸려있던 수건을 건네줬다. 먼저 아이린의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팔과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 바람에 비에 젖어 아이린의 얼굴에 번진 화장이 수건에 묻어버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수건의 화장이 번지지 않은 쪽으로 머리를 대충 닦은 나는 금화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놨고, 쫄딱 젖은 채로 들어온 우리는 흘겨보던 주인장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며 여관에서 가장 큰 방으로 안내했다.
"욕실은 방 안에 있으니 편한대로 사용하시면 되고, 필요한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드릴까요?"
"아뇨. 나중에 내려가서 먹겠습니다."
"흐흥~ 즐거운 시간 되세요."
주인 아주머니는 은근한 말투로 나와 아이린을 번갈아 보고는 물러났다. 아마 우리를 나이 차가 있는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긴, 함께 비를 맞고 여관을 찾아올 정도면 그렇게 생각하는게 타당하긴 하지.
아이린의 몸도 어린아이 티는 진작에 벗어던졌고, 이제는 충분히 성인의 매력이 느껴질 정도로 잘 빠진 몸매였다.
비에 젖는 바람에 원피스 안의 속살이 희미하게 비치고,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향기가 풍겼다. 머리를 뒤로 묶으며 드러난 새하얀 목덜미가 내 시선을 강탈했다.
아까도 노출이 꽤나 있는 원피스였는데, 비를 맞았더니 완전히 아이린의 몸에 달라붙어서는 속옷이 다 보였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우선은 아이린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아이린에게 먼저 욕실을 양보하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물에 젖은 검은색 원피스를 살짝 끌어내리며 남자라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애절한 눈빛으로 감미로운 미성을 속삭였다.
"주인님. 혹시 싫지 않으시다면... 함께 씻지 않으실래요?"
[작품후기]
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앞으로의 계획 (2일 1회 이상 연재, 매일 연재 목표). 평균 용량은 13KB 정도로 연재하는게 목표입니다!
2. 서큐버스 키우기의 본래 준비해둔 다른 스토리를 보여드리며 슬슬 아이린과의, 그리고 종반부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나 오류는 댓글을 확인하는대로 수정하니 바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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