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화 (258/260)

258회

Ch 50 -그녀를 위하여-마족의 정수를 정화하는 방법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했다. 

정화만이 목적이었다면 신관이나 성기사에게 부탁하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지만, 정수에 담긴 마력을 그대로 남기기 위해선 신성력을 사용해선 안 된다.

엄청난 양의 마력을 머금고 있는 이 정수를 아이린이 취할 수 있다면 성인식을 치르는데 필요한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을터였다.

"가장 먼저 탁한 마력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마력을 가진 존재의 눈물이 필요하다. 하이 엘프나 요정, 혹은 드래곤과 같은 존재의 눈물이라면 모두 중화제로 사용할 수 있다."

하이 엘프는 엘프들 중에서도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존재로 엘프들이 머무는 숲 깊은 곳에서 사는 존재고, 드래곤은 수백년 전에 멸종했다고 알려졌다. 그나마 희망이 있는 요정은...

'이걸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작은 병에는 지난번 데린이 선물한 요정 여왕의 눈물이 담겨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요정 여왕의 눈물인만큼 다른 연금술사들이나 마법사들이 억만금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아이린을 위해서라면 이까짓것 정도는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오히려 이걸로 확실하게 정수를 정화해서 아이린이 다치지 않는다면 훨씬 싸게 먹히는 셈이었다.

"그 다음 재료는..."

그 후로 필요한 재료를 모두 확인해보니 절반 정도는 내게 있는 재료였다. 다행히 요정의 눈물 같이 구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재료는 더 이상 없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 내게 없는 품목을 정리해 메모장에 적어놓았다. 나머지 재료들을 구하는 동안, 먼저 정화를 위한 밑작업을 해놓으면 되겠지. 

그래도 간신히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자 사흘 동안 쌓여있던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왔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속이 비명을 질러대자 사흘 동안 변변찮은 식사를 하지 않았던게 떠올랐다.

걱정하는 아이린이 식사를 차려왔지만, 빈 속을 채우기 위해 스프만 조금 먹고 나머지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다.

'배가 부르면 일에 집중할 수가 없으니까.'

적당한 공복은 작업 능률을 올려주는 법이다. 배불리 먹었다가 잠기운이 몰려오기라도 하면 졸음을 쫓아내려다 곱절로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일단은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밖으로 나가자 개미 한 마리 없는 것 같은 적막이 나를 반겼다.

모험가들이 활동하지 않는 겨울. 거기다 때 아닌 장마까지 겹치니 찾아오는 손님도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온전히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었기도 하고. 이제 와서는 아이린에게 포션 제조까지 맡겨도 되겠지만, 너무 그녀에게 의지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부엌에 남아있는 빵이나 스프로 대충 속을 채울 생각이었지만, 식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아이린을 보고 발걸음이 멎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작은 냄비에는 스튜가 담겨있었다.

조금 식긴 했지만, 향과 맛은 뭐하나 흠잡을 것 없었다. 아이린의 요리 솜씨는 날이 갈수록 좋아졌다. 요리책이라도 몇 개 사다줘야하나.

접시를 들고와 스튜를 조금씩 덜어먹자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아이린이 눈을 떴다. 

잠이 덜 깼을 때 그러듯이, 눈을 몇 번인가 깜박이며 졸음과 싸우던 아이린은 내가 손을 흔들며 웃어주자 눈을 번쩍 떴다.

"...읏."

혹시나 자면서 침을 흘리지는 않았는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허둥지둥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러웠다.

물론 내 눈에는 아이린이 자는 모습도 평소와 똑같이 예뻐 보였다. 살짝 옆으로 쏠린 앞머리도, 전보다 길어진 속눈썹과 요염하게 반작이는 입술도 하나같이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모든 부분이 사랑스럽게 보이니, 확실히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는게 실감됐다.

"계속 날 기다리고 있었던거야?"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빛이 아직 남아있는걸보면 밤은 아니었다. 

"네. 주인님이 잠도 안 주무시면서 열심히 연구하시는데, 저만 편하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부담가질 필요는 없는데."

아이린이 원래 이런 아이라는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를 다독였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에 그녀가 부담감음 짊어질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이 일은 그녀만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기도 하니까.

"방법은 찾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부담가질 필요도 없고."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나는 최대한 열심히 혓바닥을 놀렸다. 사흘 동안 아이린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세뇌하듯이 말했다.

내가 있는 이상 모든게 잘 될거라고. 

그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았다. 

냄비에 남아있는 스튜를 다 먹은 것으로도 허기를 달랠 수 없었기에 찬장에 남아있던 빵까지 먹어치웠다. 사흘이나 쫄쫄 굶었더니 몸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주린 배를 채우니 평소처럼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이린은 혹시 부족하면 지금이라도 요리를 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손사래를 쳤다. 괜히 빈 속에 과식해서 탈이 나는 것보단 이 정도가 적당하다.

사실 허기보다도, 오랜만에 맡는 아이린의 냄새가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의 몸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향긋한 체취. 전에는 딸같은 아이로 키우겠다고 생각해서 절제했지만, 연인이 된 지금은 그런 선마저 사라져버렸다.

"꺄앗...주인님?!"

갑자기 내 품에 안긴 아이린은 당황스러워했다.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변태처럼 냄새를 맡아대자 그녀는 간지러워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으응...거기는.. 꺄웃...간지러워요...주인님..."

서큐버스의 페로몬일지도 모르는 달콤한 향을 정신없이 맡아대던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목덜미를 빨아들이듯이 찐하게 키스를 하자 아이린이 묘한 신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의 목덜미 구석구석에 키스마크를 남기고 나서야 나는 입을 뗐다.

"으으... 주인님. 다른 사람들이 이걸 봤다간 어떡하시려고요."

아이린은 목덜미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삐진 척 하는 아이린도 귀여웠지만 확실히 옆에서 보니 손으로는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키스 마크가 많이 남아있었다.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그녀를 달랬다.

"괜찮아. 겨울이니 당분간은 모험가들이 찾아올 일도 없을테고, 둘이서 느긋하게 지내면 들킬 일 없어."

열심히 일하는 동안 잊고있었던 아이린의 온기를 느끼며 한참 동안 그녀를 내 무릎 위에 앉혀놓고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이린은 부끄러워하면서도 내가 끌어안기 편하도록 자세를 바꿔주었다.

가볍게 입을 맞춘 우리는 창 밖으로 가늘게 내리는 부슬비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상단에 필요한 재료를 의뢰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비가 와서는 상단도 물건을 구해오기 힘들 것이다. 

다행히 비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 완전히 그쳤다. 

거리는 오랫동안 내린 비 때문에 바닥에 모래나 자갈의 파편이 일어나서 엉망이었다. 진흙이 발에 묻지 않도록 걸으니 인부들이 완전히 엎어진 블록들을 정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인부들을 통솔하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카르멘 씨. 오랜만입니다."

"루디 씨도 나오셨네요. 요즘 뭐하고 지내셨어요?"

"손님도 없겠다,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냈죠. 카르멘 씨는요?"

"저희도 장마 동안에는 휴가를 보냈는데... 보시다시피 거리의 블록들이 다 일어나는 바람에 당분간은 유지 보수를 맡게 됐네요."

그래도 앉아서 서류만 보는 것보다는 이렇게 밖에 나오는게 운동도 되고 더 좋아요. 그렇게 웃은 카르멘은 멀리서 인부들이 부르자 다시 근무를 하러 돌아갔다. 조금 더 걸어가자 번화가가 나왔다.

내가 찾은 상단의 건물 앞에는 마차가 두 대나 대기중이었다. 마차 바퀴에 기름을 칠하고, 서둘러서 짐칸에 물건을 싣는 남자들은 장마 동안 밀렸던 일을 해치우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브리튼 상단은 바스티안 영지 내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올 정도로 유명한 상단이었다. 특히 모험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재료나 여러 포션들을 매입해 오기도 했다. 

"그건 저쪽에 옮겨놓고, 마차가 출발하기 전에 싣도록 하세요."

전에 봤을 때보다 키가 조금 더 커지고, 남자다운 티가 나는 소년이 직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괜히 바쁠 때 찾아왔나. 하지만 내게도 사정이 있는만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신은... 어라. 루디 형?"

그제서야 나를 발견한 바크가 직원들을 잠시 물렸다. 직원들 중 몇 명은 나를 알아보고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형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되게 오랜만인 것 같은데."

바크의 말대로 내가 상단 건물까지 찾아오는건 거의 일 년 만의 일이었다. 아이린을 처음 데려오고 며칠 안 되서 포션의 재료를 구하러 왔었으니 말이다. 바크가 내 가게에 가끔씩 찾아오거나, 길거리에서 마주쳤을 때 잠깐 이야기를 한 것 빼고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일 년 동안 바크도 꽤나 변했다. 상단 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카리스마도 생겼고, 외모도 성숙해지면서 소녀들 뿐만 아니라 영지의 처녀들의 마음을 홀릴 정도로 멋있어졌다.

"연구하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의뢰하고 싶어서. 혹시 안 되려나?"

며칠 동안 거래가 멈춰있었다면 확실히 밀린 일을 처리하기에도 바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일면식도 없는 다른 상단에 맡기는 것보다는 잘 알고 있는 바크에게 의뢰하려 했다. 하지만 맡은 거래를 하기도 벅차다면 무리해서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긴하지만... 루디 형의 부탁이라는데 거절할 수도 없죠. 재료는 어떤건데요?"

어제 재료를 적어뒀던 메모를 건네자 바크는 재료를 확인하고는 의문을 품었다.

"형. 이렇게 많은걸 다 어디다 쓰려고요? 저희한테 없는 재료도 있고, 설령 다른 상단에서 구해온다 하더라도 전부 다 합치면 가격도 엄청나게 나올텐데..."

"돈은 신경쓰지 말고, 적혀 있는 재료를 전부 구할 수 있겠어?"

바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묻자 내가 장난이 아니란걸 알았는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구할 수 있을 것 같긴해요. 매물이 적긴 하지만 흔하게 사용되는 것들도 아니고, 아마 연금술사 길드나 마탑에 수주를 넣으면 며칠 안에 받을 수 있을거에요."

내가 직접가도 상관없겠지만, 일일이 발품을 팔며 돌아다니는 것보단 상단의 여러 사람을 풀어 한 번에 물건을 받는게 훨씬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럼 부탁 좀 할게. 여기 선금."

"에이. 형이랑 저 사이에 무슨 그런걸..."

"야. 그래도 지킬건 지켜야지 임마."

이렇게 큰 돈이 들어가는 거래에는 당연히 선금을 받아야한다. 바크는 필요없다고 했지만,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결국 들고온 금화 주머니를 그에게 안겨주고 나서야 나는 잘 부탁한다고 말하며 상단을 나왔다. 바크는 재료를 모두 찾는대로 사람을 보내겠다고 했다.

아마 모든 재료를 모으는데는 일주일 정도 걸릴 거라고 했으니, 나는 그때까지 정수의 정화를 위한 밑작업을 해둘 생각이었다.[작품후기]선작, 추천, 코멘트 감사합니다!

1. 며칠 동안 열심히 글 쓰면서 비축분도 쌓았고, 스토리라인도 정리했습니다. 아무래도 많은 분들이 보시는 금, 토, 일에 집중적으로 연재하게 될 것 같네요.

2. 저도 예전에는 일요일에 노블레스 하루 끊어서 몰아보곤 했었는데, 독자분들도 그러신지 모르겠네요.

3.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완전한 아이린 공략을 위해서 열심히 진도를 빼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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