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예고
제니의 놀라운 힘(?) 밀러 부대원 전혀 쪽도 못쓰다! 그리고 갑작스런
예기치 못한 전투. 실비아와 이스마엘의 운명은......
문제의 라이언 일병과 조우하는 밀러 부대, 도대체 일병 하나를 위해
12명이 희생을 감수하는 이유가 뭔지 드디어 내막을 알게 되다.
마지막 전투의 운명의 시간은 다가오고, 고조되는 위기와 긴장에
메딕 미스 리는 어떤 활약을 할까요.
野說 스타 크래프트 '메딕 미스리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제 4 부
********** 코프룰루 태양력 6월 9일 11시 00분
"중대장님. 고스트의 긴급 호출 입니다."
코사크 상사가 건네 준 텔콤의 파란 바탕 화면에 고스트가 보낸 송신문이 한 줄로 주욱
떠올랐다. 고도의 훈련을 통해 눈과 귀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 올린 고스트는 전투 시
저격수로서의 임무 뿐 아니라 부대 이동 시엔 전위 초계병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본진이 합류할 때까지 그 자리에 대기하도록!"
고스트에게 지시를 내린 밀러는 부대원에게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다. 그런데 지금 고스트가 조금 이상한 보고를 해 왔다. 204연대
2 공략대가 투입 된 다리에서 후방 3키로 지점인 스와핑 71에리어에 정보에 없던
프로토스의 기지가 하나 있다는데 포토 캐논으로 입구를 막아 놓아 고스트가 정찰을
할 수 없다는구만."
코사크 상사의 양미간이 찌푸려졌다.
"출발 전에 그런 정보는 없지 않았습니까? 사령부에서 적 기지 파악을 소흘히 했단
얘긴데 이건 문제가 심각하군요. 적진 한 가운데 고립된 2 공략대에서 라이언 놈을
찾아야 하는 상황만 해도 갑갑한데, 후면까지 프로토스의 기지가 이런 식으로 널려
있다면 전투시 사방에서 적이 집결해 후방 퇴로를 끊어버리면 아군이 전멸하는 것
아닙니까?"
밀러 대위의 가는 눈꼬리가 더욱 가늘어졌다.
"글쎄 그렇긴한데 지금은 뭐라 판단을 할 수 없구만. 일단 가 보면 알게 되겠지."
"기분 증말 드럽구만요. 우리야 원래 목숨 내놓고 산다지만 이렇게 황당하게 대놓고
적진 한가운데에서 노는 것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새미 존슨이 투덜거렸다. 다른 부대원들도 마찬가지 심정인 듯 그들의 얼굴 표정에는
불만의 빛이 진하게 흐르고 있었다.
"자. 자. 어쩌겠어? 군 말 말고 가자. 윗 분들이야 일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뭐 알겠어? 그냥 의자에 앉아 이렇게 저렇게 명령내리면 전쟁이 잘 끝날 거라 생각
하는 거겠지. 결국은 우리 살 길은 우리가 찾는거야. 우리 부대 좌우명이 왜 '살아
돌아가자'로 정해 졌겠어? 각자 알아서 하도록 해. 개 죽음 당하면 지만 억울하니까."
말을 마치고 성큼 앞장 서가는 코사크 상사의 넓은 등을 보며 영혜는 밀러 부대가
기왕에 보아왔던 다른 해병들과는 확실히 다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들에겐 자신들의 소속인 테란 연합에 대한 사명감이나, 충성심 같은 것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 일 뿐이지
프로토스나 저그족과의 지겨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테란 연합에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승리에 바쳐지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사선을 같이 넘어 온 동료에 대한 믿음과,
중대장 밀러 대위에 대한 경외가 이 부대의 개개인을 이어주는 매개체일 뿐 이었다.
정보에 없었던 프로토스의 기지는 의외로 숨겨진 곳이 아닌 넓은 분지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활짝 핀 커다란 꽃과 같은 모양의 거대한 포톤 캐넌들은 삼각형으로
화망을 구성할 수 있도록 정확한 거리에 맞추어 기지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디텍터의
역할을 겸비하고 있는 그 포톤 캐넌은 프로토스 족의 강력한 방어용 건물(Guard Tower)
이었다. 테란의 과학 기술의 총아라 할 수 있는 고스트의 클로킹 능력은 포톤 캐넌에서
발생하는 플라즈마 자장(磁場)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면 무용지물이 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어느 곳이던지 자유롭게 드나들던
고스트가 지금은 포톤 캐넌의 시야가 닿지 않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숨죽이고 숨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가드 타워로서의 포톤 캐넌의 능력은 디텍터로서의 역할과 그 가공할 화력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저그 족이나 테란과는 달리 프로토스의 포톤 캐넌은 대공과 대지의
동시 공격이 가능하였다. 테란의 벙커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화력의 크기나
사정거리의 면에서 포톤 캐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대공 방어를 위해
따로 미사일 터렛(Missile Turret)을 건설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테란은 안아야만 했다.
저그 족이야 애당초 대공과 대지를 동시에 갖춘 방어 시설이 없으므로 크립 콜로니를
성큰과 스포아로 각각 변태시켜 적의 외공에 대비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 시설물이
차지하는 공간 제약도 큰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변태시킬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수를
늘리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방어를 하기가 힘들다는 종족 고유 특성
때문에 저그 족은 전투가 벌어지면 고지를 지키기보다는 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많은
병사를 생산해서 공격 일변도로 밀어 붙여 적을 제압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밖에
없었다.
적절히 배치된 포톤 캐넌을 뚫고 돌파하려면 상당한 희생이 뒤따를 것은 불문의 사실
이었다. 고스트는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 있었는데, 이미 포톤 캐넌에 한 방 맞은 듯
강화복의 옆구리가 터져 있었다. 본진이 도착하자 고스트의 급한 보고 내용이 밀러의
텔콤에 문자로 표시되었다. 코사크 상사는 바위 위로 올라서서 캐넌의 배치 사이로
뚫고 갈 틈이 있는지 살펴 보았다. 노련한 코사크는 곧 캐넌의 포격을 받지 않고 적
기지를 우회해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히쭉 미소가
흘렀다.
"오케이! 옆으로 돌아 나가면 되겠어. 한 군데서 포톤의 품으로 들어가긴 하지만
그 옆의 바위에 붙어서 일렬로 돌아 나가면 포톤의 직격탄은 피할 수 있을것 같다.
대장님. 큰 피해 없이 빠져 나갈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코사크의 미소는 오래 갈 수 없었다. 텔콤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밀러의 얼굴
표정이 전에 없이 굳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상치않은 일이 생긴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중대장님 좋지 않은 일이라도......?"
밀러는 천천히 부대원들을 돌아보았다. 부대원들은 아연 긴장을 하고 밀러의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 영혜를 포함한 메딕 삼인도 분위기를 눈치채고 밀러에게 주목했다.
"고스트가 포톤에 한 방 맞으면서 기지 안을 슬쩍 들여다 본 정보에 의하면 적
기지 중앙에 탑이 높이 솟은 묘한 시설물이 솟아 있다는구만. 그리고 소수의
질럿이 그 시설물 앞에 엎드려 있다 하는데..."
"차식들이 싸움을 앞두고 지들의 신(神)이라고 하는 젤-나가에게 참배하나 부죠.
제발 죽지 않게 해 달라구요. 근데 그게 뭐 대수인가요?"
이스마엘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어투로 끼어 들었다. 그러나 밀러는 이스마엘의
말을 무시하고 코사크를 쳐다 보았다. 코사크 상사의 머리 속에서는 수많은 전투를
통해 쌓아 놓은 정보들이 어지러이 검색되고 있었다. 밀러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토스 족이 전쟁터에 탑이 높은 시설물을 지었다면, 그리고 그 앞에서 질럿이
얼쩡거리고 있다면, 그것은...... 생각해 볼 필요도 없겠지."
곧 코사크 상사의 낮은 목소리가 밀러의 말을 바로 이었다.
"아.. 둔..의 성지......."
아둔의 성지(Citadel of Adun).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는 병사들은 적어도 프로토스와의 전투에 관한 한
겪을 것은 다 겪어 보았다는 역전의 용사들 일 것이다. 분대장 오하라를 비롯한 밀러
부대원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긴장의 빛으로 바뀌었다. 전투 경험이 적은 이스마엘과,
영혜와 실비아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이었다.
"아둔의 성지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해서 이렇게 긴장들 하는 겁니까?"
역시 이스마엘이 긴장의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바로 퉁명스럽게 말을 뱉아내었다.
이스마엘의 그런 당돌함이 귀여워보이는 듯 코사크의 입꼬리에 잠시 미소의 기운이
감돌았다.
"앞으로 질럿들 상대하기가 좀 껄끄러워지겠군요."
분대장 오하라가 가우스 소총의 안전 장치를 한번 철컥 풀며 말했다. 반사적으로 새미
존슨도 똑같이 안전 장치를 풀었다.
"그렇지.아무래도 질럿들의 정신 강화가 이루어질 테니 우선 그 빠르기가 현저하게
차이가 날거야."
코사크의 진중한 말에 이스마엘이 반발하듯 바로 말을 이었다.
"짜식들이 빨라져봐야 얼마나 대단하겠어요. 난 하나도 겁이 안난다구요. 겨우
질럿 따위가 강화되었다고 밀러 부대가 이렇게 얼어붙다니 참 한심합니다. 이거
고참님들 다시 봐야 겠네요."
"짜식아. 질럿의 속도 강화 따위에 신경 쓰는게 아니야. 저 놈의 아둔 성지가
있으면 프로토스 놈들의 정신 강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바로 템플러 아카이브가
(Templer Archive)가 소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단 말이야. 너가 아무리 전투
경험이 적다해도 토스의 고등 기사단(High Templer) 놈들을 상대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들어 본 적이 있을 것 아니냐?"
제레미가 이스마엘에게 핀잔을 주었다. 이스마엘이 순간 머쓱해지며 낯이 벌개졌다.
그래도 지지않고 뭐라 대꾸하려는데 밀러가 그의 입을 막았다.
"제레미의 말이 맞다. 아둔 성지가 보인다면 반드시 템플러 아카이브는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보통은 본진에 소환하는 고급 시설물을 이렇게 전진 배치
했다는 것은 이미 이 지역 전체가 토스의 본진이란 얘기다."
"그렇다고 봐야죠. 어쩌면 우리가 찾는 204 연대의 전진 부대는 이미 전멸했을
지도 모르겠군요."
"그 시키 진작에 칵 뒤져 버렸으면 이런 고생 안해두 되는데...... 산 놈인지
죽은 놈인지 알지도 못하는 놈을 구하러 사지로 들어 가야 하다니"
코사크 상사의 말에 이어 새미 존슨이 중얼 거렸다.
"여하튼 중대장님. 포톤의 사이로 빠져 나갈 틈이 한 군데 있습니다. 전황이
더 어려워지기 전에 72 에리어로 들어가지요. 가보면 라이언 놈이 죽었나
살았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코사크 상사의 재촉이 있었음에도 밀러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무엇인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는 듯한 밀러의 모습을 보고 부대원들은 순간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오랜 동안 동고 동락 해 온 탓에 중대장 밀러의 반응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외부에서 배속된
제레미 병장과 메딕 삼인만이 그 의식의 흐름을 눈치 못 챌 뿐 이었다. 애초부터 특수
병기로 선발된 고스트는 주어진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지라 이런 분위기는 아랑곳않고
프로토스의 기지 내부를 시야가 닿는 범위 내로 계속 둘러 보고 있었다.
오하라와 새미 존슨, 그리고 이스마엘은 은근히 밀러에게 시위하려는 듯 입을 비쭉
내밀어 불만의 표현을 했다. 조용한 퐁수린은 고스트처럼 묵묵히 있을 뿐이고, 밀러의
침묵의 의미를 모르는 제레미 병장은 계속 이 사람 저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영혜는 적진 한 가운데서의 긴박한 상황인 것도 잊고 부대원들의 이런
각각 다른 반응을 재미있게 살펴 보았다. 한동안 답답해 보이는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코사크 상사가 입을 열었다.
"중대장님 무리 입니다. 우리의 화력으로는 저 기지에 침입 할 수 없어요. 그냥
우회해서 통과 하는게 나을 듯 합니다."
코사크 상사의 말이 터지자마자 동시에 제레미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아니 지금 이 병력으로 저 기지를 치자고 고민하셨던 겁니까? 중대장님. 말도
안돼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도 어느 정도지.... 이건 말도 안돼요."
밀러가 제레미를 보며 히쭉 웃었다. 밀러 같은 남자는 그 웃음에서조차 다른 사람을
기죽이는 어떤 것이 존재 하였다. 그것은 순전히 밀러가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에 기인
한 것이며 끝없는 자신감으로 표현되는 것 이었다. 밀러의 웃음을 대한 제레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밀러의 다음 말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우리 임무 밖의 일이다. 그러니 나로선 강요하지 않겠어. 여러분들의
각자 판단에 따라 의견을 말하면 그것에 따르겠다. 분대장부터 차례로 말해 봐."
밀러와 눈이 마주친 오하라는 고개를 숙였다. 바닥의 잔돌을 군화로 톡톡 건드리며
머리를 굴리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제레미의 말대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죠. 다
죽고 말 것 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대장님이 하려고 하는 일인데......
대장님께 목숨 빚진게 하도 많아서 이때나 갚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난 그냥
하라는대로 따르겠습니다."
밀러의 눈이 새미 존슨으로 향했다. 새미 존슨은 혀로 입술을 한번 축이고 말했다.
"나야 워낙 말을 못하니 분대장처럼 멋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동감 입니다.
대장님 꼴리는대로 써 먹으십쇼. 따르지요."
퐁수린은 밀러의 눈을 받자 씩 웃으며 가우스 소총에 새 크립을 끼어 넣음으로써 답을
대신 했다. 그러자 바로 이스마엘이 흥분한 어조로 소리쳤다.
"우이 씨~ 난 말이죠. 불가능이니 가능이니 그런거 신경 안써요. 프로토스 족
최강의 전사라는 하이 템플러라는 놈들이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맞붙어 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린다구요."
난처해진 것은 제레미였다. 당연히 모두 반대할 줄 알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어긋나자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부대원들을 계속 둘러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포기했다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거 모두 미친 놈들이네. 죽는 결정을 뭐 이리 쉽게 해? 다들 죽고 나면 나
혼자 여길 빠져 나갈 수도 없구. 완전히 좆 됐네. 이 부대로 배속되서 영광으로
생각했더니만 완전히 죽을 길로 들어 선 거구만. 애라. 맘대로들 해라. 이래도
죽구 저래도 죽을 거니 느그들 한테 이쁘게나 뵈야지. 좋아요. 대장님 첨 만난
사이지만 나두 대장님께 내 목숨을 담보로 주지요. 한번 해 봅시다."
제레미 다음으로 밀러의 눈길을 받은 영혜는 생각할 틈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분위기로 보아 도저히 반대할 수도 없었지만 그 보다도 묘하게 밀러의
행동에 대해 믿음이 가서 왠지 이 무모한 작전이 성공할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메딕
소대장 영혜가 찬성하자 제니가 깔깔거리며 말했다.
"호호..... 소대장님도 이젠 담이 엥간히 커졌네요. 나 제니야 원래 화끈한 것을
좋아하니까 당연히 찬성 입니다. 실비아 어때? 너두 괜찮지?"
실비아가 방긋 웃었다. 여전히 천진난만한 웃음 이었다.
"뭐 소대장님하구 언니가 찬성하니 저야 당연히 같이 가지요. 열심히 해 볼께요."
말을 하는 그녀의 눈길은 저절로 이스마엘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따사로운 시선을
느낀 이스마엘이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붉히더니 보기좋게 씩 웃어 줌으로써 실비아에게
화답했다.
"그런데 대장님.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설마 정면 충돌하자는 것은 아닐테구."
코사크 상사는 원래부터 밀러가 가는 곳은 지옥 끝까지 따라 간다는 주의로 살아가는
골수 밀러 추종자이므로 의견을 물어 볼 필요조차 없었다. 역시 그는 작전 계획을
물었을 뿐 이었다. 부대원 모두의 의견을 들은 밀러는 고개를 들어 포톤으로 방어진을
짠 프로토스의 기지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이 나의 뜻에 동참하겠다는 데에 감사를 표한다. 어차피 누가 해도 할
일이니 딴 놈들이 어설프게 나서서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야 테란의 정예 특공대인
내 부대가 하는 것이 훨씬 성공 확률이 높다고 생각되어 맡은 일은 아니지만 한번
나서 보는 것이다."
똑 떨어지게 말하고 나서 밀러는 다시 한번 부대원을 주욱 훑어 보았다. 부대원들은
밀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다구 개 죽음 당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상사의 말처럼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적 기지에 들어 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후방의
원조를 요청한다."
"그렇다면 레이쓰 편대의 지원을 요청하실 겁니까?"
"그 레이쓰 부대로 저 포톤의 감시망을 뚫고 기지를 부술 수 있다곤 볼 수 없지.
더구나 하이 템플러가 이미 기지 안에 존재 한다면 레이쓰 편대는 그야말로 종이
비행기에 불과할 거야. 레이쓰로는 안돼!"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한번에 다 부수려면 역시 핵 밖에 없다. 다행히 우리 팀에 고스트가 있지 않은가?"
코사크 상사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대장님이 그 생각을 하시리라고 예측 했습니다. 그럼 우리의 할 일은 뻔한
거군요. 고스트가 포톤 밭을 뚫고 들어 갈 수 있도록 해야겠군요. 그런데 군단에서
핵의 사용을 허가해 줄까요?"
"템플러 아카이브가 건설되어 있을지모르는 적 기지가 눈 앞에 있는데, 군단에서
망설이진 않을거야. 전장에 하이 템플러가 나오기 시작하면 가뜩이나 불리한 차우
사라의 이 전투는 완전히 포기해야 돼. 아무리 멍청한 사령부 놈들일지라도 차우
사라를 적들에게 내어 주려고야 하겠나? 우리는 상사 말대로 고스트가 적진에 잠입
할 수 있게만 하면 된다. 자 그러면 상사는 포톤 밭을 뚫고 침투 할 수 있는 정확한
좌표를 계산하도록 해. 나는 군단과 통신을 열 테니까."
밀러가 텔콤의 비상 호출 번호를 눌러 군단과 핫 라인을 연결하는 사이에 코사크는
고스트와 함께 프로토스의 포톤 캐넌의 배치를 다시 관찰하기 시작 했다. 마땅히
할 일이 없는 영혜는 슬쩍 밀러의 옆으로 다가갔다. 조용 조용 말하던 밀러의 언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야! 이 개새끼들아.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 듣는거야? 템플러가 뜨고 나면 시즈고
레이쓰고 아무 의미가 없어! 이 먹통 놈들아. 사단장한테 연결해 봐! 직접 보고 할
테니까!"
잘 안되고 있는 듯 하였다. 밀러의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귀를 파고 들었다. 적의
약점과 아군의 장점을 냉정하게 파악하여 최고의 전투를 이끄는 그의 평상시의 모습과
너무도 다른 격한 흥분 이었다. 영혜는 밀러의 이런 양면적인 모습을 보고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진급이 한참 늦어 특공 부대를 이끌고 사지만을 전전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뭐야? 이런 쓰발! 나오라는 사단장은 안 나오고 넌 또 뭐야? 뭐?... 뭐?... 예라이!
썩어질......"
텔콤에서도 악쓰는 소리가 들려 나왔다. 한동안 밀러와 텔콤이 서로 누구 목소리가
큰가 시합을 하듯 맹렬하게 말다툼을 하였다. 그러다가 밀러가 갑자기 영혜를 쳐다
보았다. 그 시선이 하도 험악해서 영혜는 순간적으로 찔끔했다. 밀러는 묵묵히 텔콤을
영혜에게 건네 주었다. 한껏 인상 쓰는 얼굴과는 달리 영혜에게 말하는 목소리는 그리
거칠진 않았다.
"소대장 받아 보시요. 군단 정보 장교가 소대장을 바꾸라는구만. 한시가 급한데
이게 뭐하는 짓인지......? 유 모 대위라는데 소대장 안 바꾸면 핵이고 나발이고
없다고 지금 아주 눈 까 뒤집고 지랄치고 있어. 비러먹을... 나보다 목소리가 더
큰 놈을 만날 줄은 정말 몰랐네."
화면을 들여다 본 순간 작은 충격으로 영혜의 몸이 떨려 왔다. 한없는 그리움을 불러
일으켜 주는 다정한 얼굴이 그녀와 똑같이 감격에 젖은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영혜야...... 영혜야......"
유 재인 대위의 모습을 본 순간 영혜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도 부끄러워서 차마 보일 수 없었다. 텔콤으로부터 들리는 유 재인 대위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영혜야. 너 무사하지? 어디 다친데는 없지? 이렇게 너를 볼 수 있다니 너무 기뻐서
말이 다 안나오네."
영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롱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떠날 수 가 있니? 내가 얼마나 절망에 빠졌는지 알아? 텔콤은 왜
꺼 놨어? 아무리 해도 연락이 안 닿아서 난 네가 일 당하고 죽은 줄 알았어."
영혜는 유 대위의 급한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입을 열면 울먹거릴 것 같았고
그것은 너무도 부끄러운 일 이었다. 당당하게 그를 떠나오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겪은
일로 인해 한결 성숙해진 영혜는 자신의 떨리는 감정을 억지로나마 추스를 수 있었다.
격정을 참는 영혜의 모습을 보며 유 대위는 잠시 말을 끊고 다정한 눈 빛으로 영혜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영혜도 마주 보았으므로 서로의 눈길이 정겹게 마주 쳤다.
영혜가 부드럽게 미소를 띄우자 유 대위도 벅차 올랐던 감정이 진정 된 듯 마찬가지의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래. 이젠 네 생각을 존중해 주기로 했어. 하지만 결코 잊지 마. 영혜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살아 돌아와야 해. 너 없으면 나는 살아갈 수 없어. 너는 내 생명
이야. 알았지? 영혜야."
영혜는 여전히 말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때 옆에서 밀러 대위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곁 눈길로 슬쩍 보니 밀러가 연신 헛기침을 하는 것이 그만 끊어 주었으면
하는 의도가 역력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본 탓에 기분이 한없이 편해진 영혜는 밀러
에게 곱게 눈을 한 번 흘기고 유 대위에게 말했다.
"재인씨. 여기 상황이 너무 위험해요. 재인씨가 할 수 있으면 힘을 꼭 써 줘야 할
것 같아요."
유 대위의 빙긋 웃는 모습이 화면에 떠 올랐다. 언제 봐도 싱그런 웃음 이었다.
"이런! 처음 하는 말이 겨우 그런 말이라니......
그래. 영혜야. 내가 생각해도 거기 상황은 1급 비상 사태야. 단지 여기 사정도
좀 갑갑한 구석이 있는지라...... 하여간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안되니까
밀러 대위를 바꿔 줘. 작전이 되도록 해 봐야지."
영혜는 잠시 재인을 쳐다 보았다. 얼굴 구석 구석 세밀한 부분까지 머리 속에 담아
두고 간신히 한마디 말을 했다.
"사랑해요. 재인씨."
"나두 사랑해 영혜야."
재인의 마지막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영혜가 텔콤을 밀러에게 건네 주었기 때문
이었다. 약간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텔콤을 받아 든 밀러는 부대원들과 좀 떨어진
바위 뒤로 몸을 옮겼다. 지금부터 말 할 내용이 특급 기밀에 대한 것이므로 누구라도
그 내용을 들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에 고스트의 침투 경로를 확인하고, 각자 해야 할 일을 할당 받은 부대원들은
밀러가 통신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영혜는 벅찬 가슴을 안고 제니와 실비아의 옆에
섯다. 제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영혜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실비아는 괜히
실실거리며 웃기만 했는데 그녀의 웃음에 맞추어 두어 발자국 떨어져 있는 이스마엘도
바보처럼 실없이 따라 웃었다.
이윽고 통신을 마친 밀러는 부대원들에게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영혜에게 말
했다.
"소대장. 이번 작전에서 소대장은 절대 다쳐서는 안되겠소."
뚱딴지같은 밀러의 말에 영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밀러의 거친 턱수염이 실쭉거렸다.
평소의 밀러로서는 별로 익숙치 않은 웃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소대장의 신상에 나쁜 일이 생긴다면 지옥 끝까지 쫓아와 나를
죽이겠다고 지금 유 대위가 공갈을 놓는구만. 내가 그런 애송이를 겁낼리야 없지만
군단에 있는 장교 치고는 의외로 생각이 트인 녀석 같아 괜찮은 친구인 것 같은데
괜히 원수 짓고 살 필요는 없거든."
잽싼 제레미가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이런 행동은 답습되는 것이라 곧 오하라와 새미
존슨도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불려고 하였다. 그러나 밀러가 손을 저어 그들을
제지 하였다.
"자. 잘 들어 봐. 지금 군단과는 작전을 일치시켰다. 문제가 조금 있긴 하지만 어쨋건
핵 한 방과 레이쓰 세 대를 지원해 주겠다고 군단장이 승인 했어. 중요한 것은 딱 한
방이라는 거야. 거기다 레이쓰는 포톤의 사정 거리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으니 후퇴할
때만 도움이 될거야."
"뭐 상관 없지요. 어차피 그 한 방이 실패한다면 우린 다 죽어 있을테니까요."
밀러의 말을 받는 코사크 상사의 말에는 약간 비장한 감이 어려 있었다.
"그렇지. 단 한번의 시도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상사가 이미 침투 경로를 다 계산
해 놓았을 테니, 모두 고스트가 제대로 적진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수고를 아끼지
말도록. 이번 작전은 포톤의 사정권 안에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아군의 피해가 없을
수 없다. 견디기 힘들 것 같으면 제 때에 뒤로 물러서서 메딕의 서포트를 적절히
받도록 해라. 자 그럼 지금부터 3 분 후에 작전을 개시한다. 각자 위치로!"
밀러의 명령이 떨어지자 조금 전까지의 웃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가우스 소총을 단단히 꼬나 잡은 부대원들은 급히 각자 정한 위치로 산개 했다.
고스트가 프로토스의 기지로 들어가기까지 그를 사정거리 안에 놓고 요격할 수 있는
포톤은 정확한 계산에 의하면 4개였다. 그 4개의 포톤에서 발사된 캐넌을 모두 다
맞을 경우 고스트는 꼼짝 없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다. 그러므로 고스트 대신 그
캐넌을 맞아주면서 시선을 끌어 줄 마린이 필요한 것이다. 포톤 캐넌이 한 발을 쏜 뒤
다음 한 발을 발사하기까지의 지연 시간을 이용해서 고스트는 적 기지 속으로 달려
들어가고, 대신 맷집이 되어 준 마린도 다음 캐넌을 맞기 전에 포톤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 이 작전의 요점 이었다. 일단 포톤의 디텍팅 시야만 벗어나서
적 기지내로 잠입 할 수만 있다면 자랑스러운 클로킹 능력으로 적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고스트는 방해 받지않고 핵 탄두의 투하 지점을 핵 사일로(Nuclear
Silo)의 컴퓨터에 전송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자원 문제 때문에 기지 내부까지
포톤 캐넌으로 도배 했을리는 없으므로 잠입한 고스트의 행적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 이었다. 포톤 캐넌 같은 디텍터가 없으면 절대로 고스트의 행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3분의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밀러의 낮은 휘파람 소리가 울리자
분대장 오하라를 선두로하여 퐁수린, 새미 존슨, 제레미가 달려 나갔다. 제니 플라잉
중사와 실비아 하사도 뒤 질새라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맨 뒤에 고스트가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달렸다.
오하라가 제일 먼저 사정거리에 들어서자 펼쳐진 꽃 잎처럼 퍼져 있던 포톤 캐넌의
한 가운데서 탑과 같은 포신이 불쑥 솟아 올랐다. 포신에 하얀 빛이 어리는 순간,
굉음과 함께 한줄기 빛이 포톤에서 오하라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양자포 였다. 한 방
맞은 오하라의 비명이 터졌다. 그러나 오하라는 충격으로 몸을 움찔하면서도 몇 걸음
더 포톤쪽으로 달려가서 앞 쪽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가우스 소총의 방아쇠를 미친 듯
당겼다. 다음 포격을 위해 꽃 술 속으로 급히 사라지는 포신에 탄알이 튕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오하라의 목표는 방금 공격한 포톤이 자신에게만 화력을 집중하도록 유도
하는 것 이었다. 양자포에 의해 진탕되어서인지 꾹 다문 입가로 한줄기 핏물이 주륵
흘러 내렸다.
포신이 다시 솟아 오르며 두 번째 포격의 빛을 번쩍 거리는 순간 오하라는 강화복 등
뒤의 구멍으로부터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따끔한 충격이 척추에 느껴졌고, 곧바로 등줄기로부터 신경 조직을 타고 물이 흐르는
듯한 기분좋은 감각이 퍼져 나갔다. 양자포에 의해 진탕된 내장이 안정되며 고통이 확
줄어 들었다. 그리고 제니의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 귀에 울려 왔다.
"힘 내라구. 지금 치료로 앞으로 두 방은 더 버틸 수 있으니까 한 방 더 맞으면 바로
뒤로 후퇴 해."
고개를 돌려보니 제니가 힐링 팩의 주입을 끝내고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윙크를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오하라는 씩 웃으며 알았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포톤의
중심부를 향해 가우스 소총을 난사했다. 포톤의 사정 거리를 완전히 벗어나 달리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맡은 바 역할을 완수한 것이다. 그 때
포톤에서 한 줄기 빛이 다시 그에게로 번쩍였지만 그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두 번째 포톤에 대한 맷집 역할은 퐁수린이 담당하였다. 과묵한 성격 탓인지 평소에는
잘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작전에 임하는 그의 태도는 언제나 진지하였고 실수가 없었다.
밀러 부대의 숨은 공신은 이 퐁수린 이었다. 오하라와 마찬가지로 양자포 한방을 얻어
맞으면서도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는 포톤에 접근 하여 공격을 감행 하였다.
제니는 퐁수린에게도 아낌 없이 힐링 팩을 사용하여 일차 치료를 해 준 뒤 파이어 뱃
제레미를 뒤 쫓았다.
일정 사정 거리를 가진 가우스 소총을 무기로 하는 일반 마린과는 달리 근접전을 해야
하는 돌격병(Fire Bat)인 이스마엘과 제레미는 당연히 포톤에 바싹 달라 붙어야만
공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위험도가 다른 마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메딕
두 명이 아예 전담해서 그들의 힐링을 맡았다. 이스마엘과 실비아가 기지 왼쪽 귀를
지키는 포톤으로 달려 들자 그 오른쪽의 포톤으로 제니와 제레미가 덮쳐 갔다. 제니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허공으로 울려 퍼졌다.
"헤이. 마린들...... 신나게 한번 싸워 보자! 나중에 이 언니가 니들 다 잡아 먹을
때까지 절대로 죽지 말라구! 살아서 천국 가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까......"
한치의 오차도 없이 포톤 캐넌의 공격 방향을 자신들에게 집중 시키는데 성공한 밀러
부대원들은 고스트가 안개에 휩싸인 듯 형체를 가물거리며 적 기지로 뛰어드는 것을
보고 이 작전이 성공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기지 입구에서 요란하게 포격과 가우스 소총 소리가 터지니 프로토스의 기지 내부가
조용할 리가 없었다. 기지 안 쪽에서 질럿들이 한 분대 가량 뛰쳐 나왔다. 과연 정신
강화가 이루어진 듯 질럿의 이동 속도는 대단히 빨랐다. 처음에 점으로만 보였던 질럿
무리가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접근했다.
세 번째 포격을 맞은 오하라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눈 앞에서 퐁수린이 자신과
똑같이 비틀거리며 도망쳐 나오는 것이 보였다. 자신이 맡은 포톤의 탑신이 솟아 나고
있었다. 저 네번째 포격 마저 맞으면 몸이 버틸 수 있을지 자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피한다면 그 포격은 퐁수린에게 향할 것이고, 퐁수린이 그것을 맞고 여기까지
후퇴 하는 동안 최소한도로 한번 더 포격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퐁수린은 살기
힘들 것 같았다. 이런 것은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는 일인지라 오하라는 뒤로 물러
설 생각을 버리고 일어선 채 포톤을 향해 계속 소총을 갈겨 자신에게 양자포를 집중
시켰다.
번쩍 빛이 일며 가슴이 터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오하라는 뒤로 튕겨 날았다. 바닥에
부딛칠 때 몸이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는 아픔이 있었다. 그래도 의식이 남아 있을 때
몸을 일으켜야 하는데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어서라도 포톤의 사정거리를
벗어 나려 애썼지만 바닥을 버르적거리며 긁어 댈 뿐 제 자리를 빙빙 돌기만 했다.
쿨럭하고 치받는 기침을 하면서 동시에 피를 한 사발이나 토해 내었다. 머리 속이
아득해지면서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팽이처럼 빙빙 돌아갔다. 바로 이렇게 죽는
거구나 생각하며 의식을 잃는 순간 억센 손이 그를 확 끌어 당겼다. 그리고 지체없이
그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 올랐다. 희미해져가는 시야로 밀러의 수염으로 덮인 얼굴이
들어 왔다. 바람소리가 귀에 스치는 것으로 보아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 소리에
섞여 밀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다.
"애썼다. 수고 했어."
오하라를 들쳐 업은 밀러의 뒤로 양자포가 다시 번쩍거렸으나 밀러는 충격으로 전방을
향해 조금 튕겨났을 뿐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의 뒤를 오하라의
소총을 주워 든 퐁수린이 미친 듯 쫓아 달렸다. 영혜가 강화복의 옆구리 장비 쌕에서
힐링 팩을 꺼내 들고 이들에게 달려갔다. 코사크 상사는 부상 당한 이들 삼인의 옆 땅
바닥에 일전에 전사한 콜린의 것이었던 자동화기를 쑤셔 박아 넣고 총구를 프로토스의
기지로 고정 시켰다.
포톤이 밀러를 뒤 쫓는 공백을 이용해서 이스마엘과 제레미가 전속력으로 후퇴했다.
이미 두 세방 이상의 양자포를 맞았으나 실비아와 제니가 각각 달라 붙어 힐링을 해
주었기 때문에 이들은 부상 정도는 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들의 뒤로 십 여명의
질럿이 쫓아 오고 있다는 것 이었다.
이스마엘과 제레미가 마지막 포톤의 사정거리를 벗어나는 순간 코사크 상사의 자동
화기가 뒤 쫓는 질럿 떼를 향해 불을 뿜었다. 질럿의 방어 실드에 총탄이 튕겨 나갔다.
포톤 캐넌의 영향이 없는 지점이므로 이스마엘과 제레미도 바로 몸을 돌려 제일 앞에
달려 온 질럿을 향해 화염 방사기의 출력을 한껏 높여 발사 하였다.
순식간에 푸른 화염에 휩싸인 질럿이 주춤거리며 잠시 뒤로 물러섯지만 그의 방어
실드를 어느 정도 손상 시켰을 뿐 치명적인 공격이 되진 못했다. 프로토스의 보병
전사 질럿의 막강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이었다.
다시 덤벼든 질럿의 날카로운 플라즈마 검이 제레미를 가로 갈랐다. 강화복이 마치
두부가 갈라지듯 서억 베어지며 핏방울이 튀었다. 제레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
섯고, 제니가 황급하게 질럿의 앞을 막아서며 제레미의 옆구리 베어진 상처에 힐링
팩을 쏟아 부었다. 이스마엘이 발사한 화염이 질럿을 다시 한번 덮어 버리고, 연이어
밀러와 코사크, 그리고 퐁수린의 소총이 불꽃을 뿜으며 질럿을 뒤로 날려 버렸다.
그러나 가공할 맷집의 질럿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성한 다른 질럿들이 앞으로
튀어 나오는데 밀러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전원 뒤로 후퇴하고 메딕이 길을 막아라! 삼 분만 버티면 레이쓰가 온다!"
세 명의 메딕이 후닥닥 앞으로 뛰어 나와 질럿의 서슬 시퍼런 플라즈마 검 앞에 몸을
곧추 세웠다. 묘한 일 이었다. 금새라도 절단 낼 듯 덤비던 질럿들은 메딕이 길목을
막아서자 그녀들에게 플라즈마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일순간 난처하다는 듯한 빛이
그들의 쾡한 눈에 번쩍이며 흘러가는 것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공격 안하는 그들을
굳이 자극할 필요가 없으므로 마린들도 소총의 난사를 멈추었다. 일촉 즉발의 긴장이
양쪽에 흐르긴 하였으나 서로 충돌 없이 노려보는 기이한 대치 상태가 되어 버린 것
이었다.
"저 놈들은 고도의 정신 이상주의를 꿈꾸는 놈들이라 공격 능력이 없는 메딕을 살상
하는 것을 엄청안 수치로 여기고 있거든. 아무튼 메딕은 이래 저래 살아날 확률이
마린들에 비해서 굉장히 높은 편이야."
좋은 말인지 비꼬는 말인지 모를 코사크 상사의 중얼거림이 이 긴장 속에서 조금은
여유를 보이는 말 이었다. 밀러가 얘기한 삼 분의 시간이 지나자 과연 공기가 파열
하는 소리가 왼쪽 언덕 너머에서 들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 소리를 듣고 질럿들은
동요하는 듯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날카롭게 곧추 세운 플라즈마 검을 내리고 언덕
너머를 주시하는 것 이었다.
곧 요란한 굉음 소리와 함께 은 빛의 레이쓰 세 대가 언덕을 넘어 날아 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공 공격 능력이 없는 질럿들은 화들짝 놀라며 후딱 포톤의 방어진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레이쓰 역시 위협적으로 질럿의 뒷 땅을 향해 몇 발 사격을
했을 뿐 포톤밭에 의해 보호 받는 질럿을 향해 돌격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진 않았다.
클로킹조차 포톤의 디텍팅에 의해 다 드러나기 때문에 할 수 없었고 그저 사정거리
밖에서 선회 비행을 할 뿐 이었다.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요절낼 듯 했던 조금 전의
상황과 순식간에 돌변한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서 생각해보니 영혜의 입가에 쓴 웃음이
감 돌 수밖에 없었다.
저그 족의 괴물들이 메딕을 공격 안 한 것은 틀림 없이 지능 발달은 미약하고 오로지
본능만 발달 된 탓에 메딕을 당장 위협이 안되는 대상으로 여겨서였다. 우선적으로
위협을 주는 대상부터 제거하고나면 그 다음이 메딕의 차례가 되는 것 이었다. 그래서
메딕 혼자만 있을 경우에는 저그 족의 공격을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같은 적으로
여기고 있지만 프로토스 족은 그 지능 발달이 저그 족은 물론 인간 족인 테란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도 메딕을 공격하지 않는 것 이었다. 비록 공격 능력이
없다 하여도 메딕이 사실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들의 발달된 지능으로 보아
모를 리가 없었다. 메딕 두 셋이 섞인 마린 한 분대는 능히 질럿 한 분대를 당해 낼
수 있었다. 끝없이 힐링을 시킬 수 있는 메딕의 능력은 이른바 무한 스팀 팩이라는
저주의 전술까지 고안해 내게 한 가공스러운 것 이었다.
그런데 이렇듯 위협적인 메딕을 단지 무장 안한 여자라는 이유로, 프로토스족의 높은
정신 세계에서는 공격하는 것을 대단한 수치로 여긴다는 것 이었다. 적이라면 무조건
최후의 최후까지 섬멸해야 하는 테란군의 강령을 외우고 있는 영혜는 프로토스 족의
이런 습성을 보고 지금껏 가져왔던 가치관에 작은 혼동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을 눈 앞에 두고도 공격 않는 질럿들의 행동은 그녀에게 있어 충분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비로서 이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옳은 목적인가라는 의문이 그녀에게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해 있는 테란이 과연 절대적인 선인가 하는 작은 회의가
자신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에 또아리를 틀어 버린 것이다. 수 백마리의 저글링이
덤벼들 때 밀러의 부대원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학살 하였다. 또 지금
포톤 밭에 몸을 숨기고 있는 질럿들과 기지 안에 있을 프로토스 족의 병사들은 잠시
뒤 엄청난 핵 폭탄이 그들의 기지를 휩쓸어 한 순간에 흔적도 없이 날려 버릴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테란의 전쟁 목적이 이 황량한 차우사라에서 프로토스와 저그 족을 완전히 없애는 것
이라면 프로토스나 저그 족의 전쟁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어째서 세 종족이 이렇게
어지러이 싸우게 된 것일까? 여태까지 한번도 그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고 그저 당연히
나의 적은 프로토스와 저그 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프로토스와 저그가 적인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작전에 참가한 지난 며칠동안 여러 고비를 넘기면서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하고 있는
영혜였지만 다른 족과의 전쟁에 대한 이런 식의 의구심이 생긴 것은 지금 처음이었다.
이것이 공화국의 영웅 짐 레이너나 현재 작전을 지휘하는 밀러 대위나, 프로토스 족의
영웅에 해당되는 태사다나 패닉스 같은 거물이 빠져 들었던 전쟁에 대한 짙은 회의의
시작이라는 것을 영혜는 아직 알 리 없었다.
"드디어 카운트 다운이 시작 되었다. 조금 뒤면 고스트가 빠져 나올거야."
밀러 대위의 나직한 말이 영혜의 생각을 깼다. 흠칫 놀란 영혜가 고개를 돌려 보니
밀러는 텔콤을 향해 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있었다.
"후퇴하는 고스트가 질럿과 포톤에 치명상을 받고 쓰러지지 않도록 레이쓰 편대는
포톤 캐넌을 공격하는 시늉을 했으면 한다. 그렇다고 너무 무리 하진 말고. 본진도
레이쓰의 후미를 쫓아 공격에 들어 가겠다."
"아이. 아이. 썰. 명령 접수 했다. 레이쓰는 알아서 하겠다. 귀 부대의 건투를
빈다."
레이쓰 편대장의 명쾌한 대답이 들려 오고 세 대의 레이쓰는 기수를 프로토스의 기지
쪽으로 돌려 큰 원을 그리며 선회 했다. 거리가 상당히 먼 탓에 밀러 부대가 위치한
곳에서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레이쓰는 프로토스의 기지 안 쪽에서
물살처럼 자취를 일렁거리며 뛰어나오던 고스트가 포톤의 디텍팅 시야에 들면서부터
안개가 걷히듯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단 클로킹이 벗겨지자 잠시
고스트는 뜀을 멈추었다. 이때 비로서 그를 발견한 질럿들이 우르르 그에게 몰려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요란한 굉음과 함께 레이쓰가 무서운 속도로 지면으로 내리 꽂히며
질럿을 향해 대지용 기관포를 쏟아 부었다. 마찬가지로 사정거리 안에 레이쓰가 포착
되자 포톤의 양자포가 공중으로 빗살처럼 퍼부어졌다. 질럿이 레이쓰의 총탄을 피해
잠시 우왕좌왕하고, 포톤이 레이쓰에 양자포를 쏘게 된 틈에 고스트는 전력을 다해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한번의 하강 공격으로 질럿 떼는 쫓아 내었지만 포톤 공격을
그대로 받아 기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레이쓰 편대는 전속력을 다해 공중으로
높이 치솟아 올라 간신히 포톤의 양자포를 벗어났다. 밀러의 텔콤에 레이쓰 편대장의
다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기체의 삼분의 이가 손상 되었다. 더 이상의 공격은 무리다. 레이쓰 편대는 적
기지 밖에서 선회 하겠다."
"오케이. 수고 했다 그 정도면 됐다. 다음은 우리 차례다."
이미 언덕을 내려 온 밀러 부대는 달려 나오는 고스트를 향해 포톤이 재 충전한 양자
포를 쏘려고 포신을 드러 낼 때 먼저 포톤을 향해 사격을 하였다. 당연히 공격 받은
포톤은 자동으로 양자포를 밀러 부대에 조준하고 발사 하였다. 결국 처음과 똑같은
방법으로 밀러 부대는 고스트의 탈출을 돕는 것 이었다. 고스트가 강화복에 풀풀
연기를 날리며 밀러 본진에 겨우 달려 와 탈진 되어 쓰러진 순간, 겁 없이 그를 뒤
쫓아 포톤의 보호막을 벗어난 두명의 질럿이 레이쓰 세대와 밀러 부대의 집중 사격을
받고 견디지 못하고 결국은 연기로 승화되어 죽고 말았다.
고스트의 생명 게이지는 겨우 7이 남아 있었을 뿐 이었다. 포톤 한 방만 더 맞았으면
고스트는 시체로 돌아 올 뻔 했다. 질럿들은 분한 듯 플라즈마 검을 치켜 들고 위협
하듯 허공으로 흔들었지만 포톤의 보호막을 벗어나면 바로 레이쓰 편대의 사격을 받게
되므로 감히 나오질 못했다. 결국 이 작전은 대원들의 부상이 심각하긴 했지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 밀러의 완벽한 승리였던 것이다.
"진짜로 카운트 다운 시작이다. 앞으로 십 초. 모두 차폐 막을 내려라."
텔콤을 보고 있던 밀러의 명령에 따라 부대원 전원이 헬멧의 녹색 차폐 막을 내렸다.
레이쓰 편대도 프로토스의 기지에서 조금 떨어진 안전한 곳으로 자리를 이동하였다.
코사크 상사가 돌연 손가락을 펼쳐 하늘을 가리켰다. 하얀 연기의 궤적을 그리면서
하늘에서부터 핵 미사일 한 방이 프로토스의 기지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모두 고개를
다리 사이에 묻은 자세로 몸을 바짝 움크렸다.
강한 섬광뿐만 아니라 모든 소리까지 차단하는 차폐막 덕에 번쩍이는 녹색의 빛만
느꼈을 뿐 적막만 끝없이 감돌았다. 영혜의 혼자만의 시간이 꽤 오랫동안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핵 미사일로 인해 발생 된 결과를 차폐막을 올리면 곧 알게 되겠지만
웬지 그것을 그녀의 눈으로 확인하기가 겁났다. 그냥 결과를 확인 안하는 이런 상태가
계속되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눈 앞에 펼쳐질 광경이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악몽
처럼 남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전쟁터
에서 이런 안일함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다고도 생각되었다. 아직 영혜는
그녀의 마음 속에서 갈등하고 있는 두 가지의 생각을 각각 정리해 낼 수 없었다.
그 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는 것 같아 고개를 치켜 드니 제니가 차폐 막을 올리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차폐 막을 올리자 매캐한 산소 타는 냄새가 코에
아리게 와 닿았다. 조금 망설이다 눈길을 전방으로 향해보니 두 눈에 가득 들어오는
프로토스의 기지는 그렇게 황량하게 바뀌었을 수가 없었다.
큰 삽으로 땅을 푹 떠 간 듯 깊은 분지로 지형 자체가 탈바꿈 되어 버렸다. 입구의
포톤 캐넌은 핵 미사일의 폭발 반경에 들지 않았던 탓에 대 여섯개가 실드를 날리고
불이 붙은 채 아직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본 기지가 사라져 버린 다음에야 그
쓸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포톤 캐넌의 틈에 숨어 있던 질럿들은 절반 정도는 이미
죽은 듯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저 살아 남은 대 여섯명이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
앉아 허탈감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들의 심오한 정신 세계의 궁극의 성전인 아둔의
성지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자 모든 의욕이 없어져 버린 듯 했다.
"차식들 까불더니만 꼴 좋다."
이스마엘이 비양거렸다. 그러나 비양거리는 이스마엘조차도 이런 모든 것의 말살에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듯 했다. 모두의 생각이 비슷한지 침묵만 무겁게
장내를 덮고 있을 뿐 이었다.
"레이쓰 편대장이다. 작전 성공을 축하한다. 남은 포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힘이 모자라면 레이쓰도 돕겠다. 답변 바란다."
텔콤에서는 승리에 도취한 레이스 편대장의 기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밀러는 약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신경 쓸 것 없다. 남은 적은 이미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좌표만 기록해 두면
나중에 시즈 탱크로 포톤을 부수면 된다. 밀러 부대는 계속 임무를 수행하겠다.
귀 편대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건투를 빈다."
밀러의 대답을 듣고 세 대의 레이쓰는 공중으로 한 껏 치솟았다가 땅으로 곤두 박질
치는 곡예의 비행을 함으로써 영광의 표식을 그린 뒤 밀러 부대의 옆을 수평으로 날아
가며 존경의 표시로 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큰 원을 그리며
선회 비행하였다. 그리고 왔던 길로 돌아가려고 기수를 언덕으로 돌리는데,
돌연!
귀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기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모두 소리 난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레이쓰가 날아가는 방향의 바로 앞 쪽에 하얀 거미 줄같은 파장의
막이 형성된 것을 볼 수 있었다. 형체는 보이지만 실체는 잡히지 않는 듯한 그런 막
이었다.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쳐 형성된 그 막은 마치 전기의 자장처럼 레이쓰를
가두었다. 수직 이 착륙 및 공중 정지가 가능한 레이쓰였지만 그 막은 레이쓰의 모든
움직임을 봉쇄하였다. 곧 이어 레이쓰의 기체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하였다. 텔콤으로
레이쓰 조종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 이게 뭐야? 아아아악!......"
이미 포톤 캐넌의 양자포에 의해 상당히 손상을 입은 레이쓰 기체는 순식간에 펑펑
터져 버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벼락치는
듯한 밀러의 명령이 터져 나왔다.
"싸이오닉 스톰(Psyonic Storm)이다! 모두 가능한 한 멀리 흩어져라! 템플러가
근처에 있다!"
밀러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 이었다. 메딕의 치료로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고스트부터
곧바로 클로킹을 하여 형체를 감추면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다른 부대원들도
황급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동작이 무척 빨랐음에도 달려가는 그들의
귀에 또 다시 기분나쁜 날카로운 음향이 파고 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거미 줄 같은 허연 싸이오닉 스톰의 막이 사정없이 펼쳐져 버린 것이다.
-4부 끝-